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그래요. 기대도 안 했어요.”
“자넨, 그 나이 먹고.”
레이디 퍼스는 럼버트 부인에게 눈치를 주며, 에스페란사를 이끌고 다른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번엔 나이 대가 좀 더 다양했다. 에스페란사 또래의 여자들도 보였다.
뒷줄에서 슬그머니 도망가려던 소녀를 붙잡은 레이디 퍼스는 돌연 엄격한 얼굴을 했다.
“카밀라,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네 딸에겐 노란색이 안 어울린다.”
소녀와 닮은 부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제가 보기엔 잘 어울리는데요.”
“눈이 삐어서 그렇지. 자, 이쪽은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일세. 에이번데일이 데려왔더군.”
몰려 있는 아가씨들 중 몇 명의 눈이 뾰족해진다. 정말로 나름대로 추종자가 있는 모양이다. 하긴, 외모만큼은 훌륭하니까.
“피후견인이에요. 파오룬에서 살다 왔는데 달리 연고가 없어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어머나, 파오룬에서 사셨어요? 좋겠다. 파오룬은 여기랑 많이 다른가요?”
파오룬에 대해 저들만큼도 모르는 에스페란사는 잠깐 흠칫했다.
“……분위기야 좀 다르지만, 사람이 사는 데는 다 비슷하죠. 음식이나 날씨는 좋다고 생각해요.”
“여기처럼 하루 종일 흐리고 비 오는 곳도 드물지. 그런 의미에서 험프리는 생각을 참 잘했어. 온실 파티라.”
“그러게 말이에요. 미스 헌터, 이쪽으로 와서 우리랑 이야기해요. 파오룬 얘기를 좀 더 해 주세요.”
“백작님 얘기도 좋고요! 피후견인이라면서 백작님이랑 왜 같이 안 온 거예요?”
에스페란사는 눈짓으로 레이디 퍼스를 가리켰다. 소녀들이 깔깔 웃었다. 곧 무리는 몇 개로 갈라졌는데, 에스페란사는 계속 말을 붙이던 쾌활한 소녀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아, 소개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어머나. 미안해요. 정말 이렇다니까요. 사교계란 게, 워낙 새 사람을 볼 일이 없는 곳이다 보니까요. 전 루신다 맥스웰이에요. 이쪽은 실비아 험프리.”
실비아 험프리. 15살밖에 안 된 소녀에게서 에스페란사가 알던 23살 실비아 험프리의 모습이 보였다. 일방적인 친분이지만 이 소녀를 여기서 보니 반가웠다.
“원랜 어머니를 도와야 하지만, 몰래 피난 와 있어요.”
실비아가 눈을 찡긋했다. 에스페란사는 기분이 좋아졌다. 실비아의 욕심 많은 아버지는 딸이 더 크면 팔아 치우려 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평화롭다. 그리고 팔아 치우기 전에 에스페란사가 막아 줄 테니까.
“비밀로 할게요.”
“계속 소개할게요. 여기 이 애는 글로리아 서픽스예요. 그리고 얘는, 얘, 코델리아, 괜찮니?”
“……머리가 좀 아파서. 괜찮아. 코델리아 마벨우드예요.”
마벨우드, 찾았다.
* * *
열여덟 살의 코델리아는 인형처럼 예쁜 아가씨였다. 금발 벽안의 미녀라는 다소 전형적인 외형이었지만, 전형적인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코델리아는 결혼 적령기에 도래하지 않은 아가씨들 중 가장 예뻤다. 자연히 말 한마디에도 수십 쌍의 눈빛이 따라붙었는데, 글로리아와 루신다는 그중 질 나쁜 자들의 수작을 자연스럽게 떼어 내는 데 도가 텄다.
그걸 어찌 알았느냐면, 에스페란사와 소녀들이 대화를 나누는 아주 짧은 사이에도 헛기침을 해 가며 접근하는 남자들이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코델리아는 지금 좀 피곤해요.”
“저는 서픽스 양이 아니라 레이디 코델리아께 말했습니다만?”
뻔뻔한 낯을 한 남자가 그렇게 대꾸했다. 너희들이 코델리아의 인기를 질투하는 게 아니냐는 얼굴을 한 채로. 에스페란사가 탄식했다. 남자들의 고루한 이간질 책략이다. 다행히 이 애들은 그런 것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했다. 혹은 이골이 난 것일지도.
“제 친구에게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조프리 씨와는 춤추지 않을 거예요.”
조프리라 불린 남자가 씩씩거리고 간다고 해서 끝은 아니었다. 코델리아 마벨우드와 한 번이라도 춤을 추려는 자들, 어떻게든 구애해서 예쁜 레이디 코델리아와 광활한 마벨우드 영지를 얻으려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루신다, 나랑 춤추러 가자.”
루신다가 오빠의 친구라는 남자와 춤을 추러 떠나고, 글로리아도 춤 신청을 받았다. 실비아는 진작 험프리 부인에게 걸려서 끌려갔다. 코델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스페란사, 다음 춤 신청은 받으세요. 저 때문에 여기 앉아서 춤 한 번도 못 추고 계시잖아요.”
에스페란사는 앉은 자리에서 다섯 명을 거절한 상태였다. 지참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집안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여자에게까지 춤 신청이 이만큼 들어오는 걸 보면 괴짜라도 시더 클라이번의 보증이 믿을 만한 건가.
‘로드 에이번데일이 내 지참금을 챙겨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두 사람 모두 지참금이고 결혼이고 아무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저도 슬슬 춤을 추고 싶고요.”
코델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에스페란사는 푹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남자 놈들 때문에 마벨우드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 물어봤다.
에스페란사는 언변이 좋은 편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의심받지 않고, 무례하지 않게 마벨우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시더 클라이번의 능구렁이 같은 혓바닥을 빌려 왔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건 에스페란사의 일이다. 그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다시 말해 상당히 무례하게 와선 머뭇거리는 남자 하나를 에스페란사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얼른 말해!”
“그래, 망설이다 숙녀분이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쪽으로 시선이 모인다. 아, 싫다.
“미스 헌터? 제레미 로웰입니다. 저와 춤을…… 대, 댄스카드를 주시면.”
에스페란사는 보란 듯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저쪽으로 바로 가서 뭐라도 먹고 있을걸. 식사하는 숙녀에게 와서 춤을 추자고 끌고 가진 않으니까.
“레이디 코델리아께선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저 친구, 아까부터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저 친구를 좀 구해 주세요.”
코델리아가 머뭇거리다 에스페란사를 향해 미소를 보이며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결국 에스페란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약된 사람은 없어요.”
손끝까지 시뻘게진 남자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멀리서 친구들인지 모를 또래 남자들에게 붙잡혀 있던 시더가 그 모습을 보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춤출 줄 알아요?’
‘신경 꺼요.’
조금 신경질이 난 에스페란사가 대꾸했다.
그 무리들이 얼마나 시간을 딱 맞췄는지, 에스페란사가 일어나자마자 춤곡이 시작됐다. 그들은 조금 바쁘게 대열에 들어갔다.
“저, 죄송합니다, 미스 헌터. 친구들이 워낙 극성이라.”
“덕분에 구경거리가 됐네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제레미 로웰은 그의 무례한 친구들에 비해서는 제법 제정신이 박힌 자였다. 하지만 무리 속으로 들어가면 지금의 멀쩡한 이성을 잃고 무리와 한 덩어리가 되겠지. 어쨌든 지금도 대화하기 즐거운 사람은 아니고.
에스페란사는 그와 쓸데없는 대화를 하면서, 그의 재미 없는 인생과 그의 넓은 영지 얘기를 듣던 에스페란사는 문득 반색했다.
“마벨우드 영지도 그렇다던데.”
처음으로 파트너의 흥미를 이끌어 낸 로웰이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렇지요. 근처니까요.”
“아, 마벨우드와 가깝군요.”
“예. 증기 마차로는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영지입니다.”
“마벨우드에는 듣기로 안 좋은 사건이 있었다는데, 로웰 씨의 영지는 괜찮은가요?”
제레미 로웰은 대번에 뻣뻣해졌다.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말했다.
“그 얘기를 그렇게 거침없이 하시는 분은 처음 봅니다.”
“숨겨야 할 일인가요?”
“아뇨, 엄연히 따지면 마벨우드 가문의 잘못도 아니고요. 우연일 뿐이겠지만 불길한 일이긴 해서, 이 일대에서는 쉬쉬하는 편입니다.”
규모가 작은 사건이지만 사람들이 난데없이 증발해 버렸다는 것은, 특히 그렇게 흩어져 사는 지역에서는 실질적인 위협이다.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흉악한 범죄나 무시무시한 재해로 다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마도 공학으로 대양을 건너는 배와 일주일 만에 세계를 일주하는 비행선이 있는 시대에서도, 숲과 가까이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밤의 맹수와 흉포한 정령 이야기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벌써부터 어떤 이상한 소문이 붙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를테면 ‘저주받은 영지’ 같은 것들.
“레이디 코델리아께 못 들으셨습니까?”
“코델리아와 저는 오늘 처음 만났는걸요.”
춤곡이 막바지로 다다랐다. 에스페란사는 대열 반대편 끝에 있는 코델리아가 파트너인 남자와 밀고 당기는 것을 보았다.
“그렇군요. 아무튼 좋은 대화거리는 아닙니다. 아마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겁니다.”
“로웰 씨도요?”
로웰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했다.
“저, 저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마벨우드의 이야기니 잘은 모릅니다.”
대강 들어 보니 이 작자에게선 켄드릭 이상의 정보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그러고 보니 켄드릭은 이 무도회에 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턴을 마쳤다.
“미스 헌터, 목이 마르진 않으십니까? 제가 샴페인을 가져오겠습니다.”
어떻게든 에스페란사를 붙잡아 놓을 생각인지, 제레미 로웰은 허겁지겁 샴페인을 가지러 갔다.
‘코델리아를 댄스 플로어에 붙잡아 놓으려면 뭔들 못하겠어.’
헌터의 뛰어난 청력은 듣고 싶지 않은 것까지 듣게 했다. 남자들은 각자 루신다와 글로리아를 맡아 데려가려고 계산했는데 에스페란사까지 붙어 있어 한 명이 더 붙은 것이다. 옆에서 대신 거절해 주는 사람이 없게. 이 남자는 에스페란사에게 사심이 있는 듯하지만, 없었어도 그때 누군가 오긴 했을 것이다.
온실 문틈으로 분홍색 드레스 자락이 사라진다. 에스페란사의 탁월한 시력은 고작 끄트머리만 보인 드레스 끝의 자수를 보았다. 보라색 실로 선명하게 수놓은 잔꽃 무늬.
“코델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