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30
외전1. 위험한 기차 여행 (1)
어두운 통로 한가운데였다. 소리라고는 발밑을 울리는 진동뿐인 고요한 공간.
키가 큰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밝은 금발이 뺨 위에 음영을 드리웠다. 투명한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수려한 남자가 몸을 굽혔다. 입술이 의미 모를 호선을 그렸다. 에스페란사는 뻣뻣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점점 가까워지며 발끝이 모여들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펑.
먼발치에서 난 총성과 함께 남자의 어여쁜 머리가 터져나갔다. 피와 뇌수로 흥건해야 할 발밑이 깨끗했다. 그제야 에스페란사의 입술에 미소가 서렸다.
“체통을 지키시죠, 백작 부인.”
달아오른 총구를 내린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 * *
나인 호더 인근의 선착장. 커다란 배가 증기를 내뿜으며 멈춰 섰다.
살굿빛 모자를 쓴 숙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높은 배 위를 올려다보았다. 배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들뜬 얼굴로 배 입구만 바라보며 짐가방을 들고 내릴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차례의 대규모 철수.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마중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다. 기쁨의 포옹이 이어졌다.
“있습니까?”
이쪽만 빼고.
검은 실크햇을 쓴 신사는 재촉하듯 지팡이로 땅을 두 번 두드렸다. 성기게 묶은 밝은 금발과 모자 그늘 아래에서도 빛을 내는 무채색 눈동자. 젊고 부유한 미남 귀족이자 천재 마도 공학자.
‘인생 저렇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
그러나 속이 얼마나 배배 꼬이든, 그는 입 한 번 벙긋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큰 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사장이 그를 죽일 것이다.
“잠시만요.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님. 목록에는 있는 걸로 나옵니다만,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목록도 제대로 못 만들어서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기다려 줘야 한단 말이지요.”
시계를 확인한 그가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해 줬으면 좋겠군요.”
놀고먹는 게 일이면서, 바쁜 척은. 남자는 속으로 툴툴대며 배 안으로 돌아갔다.
일꾼들을 을러 가며 다시금 목록을 적재된 마정석과 대조해 본 그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건만,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다지 말을 걸고 싶지 않은 듯했다.
목록을 확인한 그는 몇 장의 종이에 직접 서명하고는 남자가 가져온 상자를 들었다.
“그, 무거우실 텐데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빙그레 웃는 얼굴에 귀찮음이 묻어났다. 괜한 걱정을 했다 본전도 못 찾은 남자가 뒤돌아 몰래 투덜거렸다.
에이번데일 백작은 마부에게 상자를 넘기고 마차에 탔다. 말 없는 마차가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옆 차선의 마부들이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지자 마부 테일러는 괜스레 어깨를 폈다.
저택에 도착하자 백작은 상자를 들고 저택으로 들어갔고, 테일러는 마차를 차고에 끌고 들어갔다. 짙은 녹색 마차를 닦고 있던 후임 마부와 눈을 마주친 그가 맥주잔을 드는 시늉을 해 보이고 씩 웃었다.
시더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팔꿈치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몸이 기울었다. 누구의 손길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고개를 들어 씩 웃었다.
“바다 냄새가 나는데. 항구에 다녀왔어요?”
“냄새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사실 럭스 부인한테 물어봤어요.”
아하.
손에 닿는 장식장 위에 대충 상자를 올려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뺨을 쥐고 입을 맞췄다. 짧지 않은 입맞춤 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준 그는 상자를 에스페란사의 품에 안겨 주었다.
“파오룬에서 구할 수 있는 건 그게 마지막이에요. 수출 제한 명령 때문에 밀매 쪽도 막혔다고 하더군요.”
“안 그래도 암시장 쪽도 허탕이에요. 희귀 마정석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대요. 헤이븐리 말이, 앞으로는 일반 마정석 수급도 어려워질 거라던데.”
“일반 마정석은 광산에서 나오는 게 있으니 괜찮지만……. 값이 오르겠군요. 귀찮아지겠어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장갑을 낀 시더가 에스페란사에게 안겨 주었던 상자를 열고 마정석을 꺼냈다. 시판되는 새까만 구 형태의 마정석과는 달리 자수정 같은 빛을 내는 데다가 내부에 독특한 형태의 결정이 보였다.
“그거 먼저 확인해 보고, 암시장에서 들은 얘기도 해 줄게요.”
“좋아요. 이건 실패일 것 같지만.”
두 사람은 서재 안쪽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 한쪽 벽에는 마정석 테스트기가 있었다. 지난 2년간 수도 없이 많은 희귀 마정석이 거쳐 간 테스트기에 마정석이 빨려 들어갔다.
1차, 통과.
2차, 통과.
5차에 걸친 확인 작업 중 벌써 두 개를 통과했다. 에스페란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누르며 마정석이 파이프를 타고 다음 장치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약이 떨어지고, 마력량이니 파동이니 하는 복잡한 수치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리고 몇 가지 수식들이 지나갔다.
3차, 통과.
“아, 못 보겠어요.”
연구실에서 도망쳐 나온 에스페란사가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4차와 5차 테스트는 시간이 걸렸다. 계속 연구실로 향하는 시선을 돌릴 겸, 책상 밑에서 게임기를 꺼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에스페란사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기 위해 시더가 만든 게임기는 단순했다. 지뢰 찾기 같은 간단한 게임만 돌아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황금 발톱을 시작하기 전에는 평생 그런 게임만 해 왔던 에스페란사는 그 단순한 구성에 만족했다. 게다가 점수가 있으니까. 가시적인 성과가 있으면 승부욕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임 화면을 넘겨 가며 이전 기록을 확인하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찡그렸다.
“또 내 기록 깼어요?”
연구실 안쪽에서 시더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이 기록 세우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당신은 게임을 잘 못해요.”
“시끄러워요.”
“열심히 하긴 하죠.”
“일이나 해요.”
얄미워서라도 이걸 깨 버려야지. 에스페란사는 이를 악물고 게임기를 들었다.
색깔도 없는 미색 화면. 도트에 가까운 그래픽.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에스페란사가 원하는 게임을 구현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결연한 얼굴로 게임기를 고쳐 쥐고 버튼을 눌렀다.
“다 끝났어요. ……이런.”
진이 빠진 채 소파에 누워 버린 에스페란사를 발견한 시더가 혀를 찼다. 게임기는 탁자에 대충 던져진 상태다. 웃음기 어린 시선을 모른 척하며 쿠션을 끌어안은 에스페란사는 입을 삐죽였다.
“피곤해서 그래요. 암시장도 암시장이지만, 어린애들 둘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요.”
에스페란사는 올해부터 루이 왕자와 멜리사 공주의 사격 교사로 초청된 바 있었다. 두 자녀의 안전에 극도로 예민한 여왕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그래서, 계속 누워 있을 건가요? 결과가 안 궁금해요?”
“허탕이겠죠, 뭐.”
제대로 된 걸 찾았으면 진작 말했겠지.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말한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희고 반듯한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요.”
“암시장 쪽 얘기가 길어져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어거스텀으로 갔어요.”
날짜 개념이 다소 뭉개진 그와는 달리 에스페란사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앞선 일이 늦게 끝났더라도 수업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급하게 뛰어가는 수밖에.
“고생했군요. 그래서, 폐하께서는 아직도 당신만 보면 자리를 피하시던가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사실 피하긴 했다. 자녀들의 사격 교사로 초청할 만큼 에스페란사를 가까이 두려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두렵다는 듯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에스페란사가 해치지 않을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결혼 초, 출신으로 업신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갈리스턴 공작의 추천으로 들어갔던 시녀 자리에서 3개월 만에 나오게 된 것도 그 탓이었다. 여왕이 시녀를 무서워해서 간단한 일도 시키지 못하니 별수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여왕이 무서워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래도 양심이 있다는 증거니까. 보복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주는 걸 안 받을 이유도 없다.
시더는 그 생각을 읽은 듯 빙그레 웃었다.
“과연.”
“뭐가요?”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사격 교사는. 레이디 코델리아와 마벨우드네 꼬마에게도 가르쳐 주고 있고.”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으면 좋잖아요. 그리고 잭은 그거 학교에서 시험 본다고 했다고요.”
“남들 놀아 주느라 내 시간을 빼앗기는 게 싫은 거예요.”
“그게 왜 당신 시간이람, 내 시간이지. 됐어요. 검사 끝났으면 마정석 가져와요.”
시더가 기계에서 꺼내 세척한 마정석을 내밀었다. 보석처럼 예쁜 마정석은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 안에서 굴러다니게 될 것이다.
기대했던 테스트도 실패로 끝나자 조금 힘이 빠지기는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인 걸 알고 있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에스페란사는 그렇게 되뇌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할 일 다 끝났으면 저번에 했던 카드 게임 다시 가르쳐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