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32
외전1. 위험한 기차 여행 (3)
“좀 더 정중하게 굴 수는 없어요?”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힘이 빠져 있었다. 시더는 낮게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내 경험과 기억에 의거하면, 당신은 정중한 걸 안 좋아해요.”
“완전히 모함이에요. 남의 취향을 그런 식으로 호도하면 못 써요.”
“취향의 문제란 말이죠?”
말려들었다. 그리고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흘겼다.
시더는 익숙한 듯 귓바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둥근 귀를 지나 진주 귀고리를 단 귓불로 내려가자, 그새 마른 입술이 윗니에 꾹 짓눌렸다.
“이거,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예뻐요. 하고 다니기도 편하고. 흔하지도 않고.”
“당신이랑 닮았어요.”
그런가? 에스페란사는 손을 귓가로 가져가 진주알을 손끝으로 굴려 보았다. 딴생각으로 흘러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렸다.
“빨리 짐 싸야 되는데.”
“모든 게 계획대로 될 수는 없는 거죠.”
“왜 당신 계획은 다 맞고 내 계획만 망하는 거예요?”
“그거야, 당신도 내 계획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닐까요?”
에스페란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계획을 봐야 알 것 같아요.”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진주 귀고리가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 * *
“정말이지, 하루 만에 몇 달 치 짐을 다 싸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투덜거리던 애니가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리타, 옷이 구겨지잖니! 세상에, 레이스를 이렇게 구겨 넣으면 어떡해? 어머, 보석함 다룰 때는 조심하라고 말을 했어 안 했어? 세상에, 이 귀고리 좀 봐. 예쁜 진주에 흠집이 났잖아!”
어린 하녀가 혼나는 모습을 곁눈으로 지켜보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돌렸다. 애니가 상급자로서 아랫사람을 나무라는데 괜히 말을 얹어 위엄을 손상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엉뚱한 일로 혼나게 둘 순 없었다.
“그건 내 실수야. 그냥 둬.”
“아가씨, 아니, 부인께서요?”
“막 하고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지, 뭐.”
“하고 다니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죠!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니까요.”
바로 말을 바꾼 애니는 조심스레 귀고리를 보석함 안에 내려놓았다. 쭈뼛거리는 어린 하녀를 달래서 다른 일을 시키고, 에스페란사의 짐가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쪽에도 옷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 시즌에 산 드레스가 예뻤는데 전부 가져가지 못해서 아쉽네요.”
“이만하면 충분하지, 뭐. 늘 가져가도 반도 못 입잖아.”
에이번데일에서 에스페란사와 시더는 주로 시더의 연구소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예쁜 옷이 필요한 환경은 아니었다. 가끔은 저택 앞의 호숫가에 앉아 노닥거리기도 하고, 크지 않은 상점가를 둘러보거나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 보기도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어요?”
“허전하기야 하겠지만 거기에도 시중들 하녀들은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애니와 밀런은 이틀 후에 저택으로 오기로 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려면 두 사람만 바로 광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편했다.
급하게 표를 구하려다 보니 하필 구해진 표도 다른 때와는 달랐다.
그리하여 이번에 타는 건 오스던 남부의 대도시 벨링엄에서 출발해 나인 호더, 에이번데일을 거쳐 탈마인으로 향하는, 오스던의 거대한 영토를 종단하는 열차.
“정말 살인사건만 일어나면 딱이겠는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 * *
몇 년 사이 나인 호더 중앙역은 몰라보게 변했다. 에스페란사는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황동빛 오토마톤이 내미는 신문을 거절하며 생각했다.
주근깨 콕콕 박힌 어린 구두닦이들과 신문팔이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오토마톤이 대신 메웠다.
짐 들어 주는 일을 하던 사람들도 전부 증기를 뿜는 자동 카트로 바뀌었다. 승강장 번호를 입력하기만 하면 짐을 안전하게 가져다주는 데다가 도둑맞을 염려도 없어서 많이들 사용하는 것 같았다.
오토마톤은 사람보다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았으므로, 꼬질꼬질한 꼬마들을 발로 차던 신사들도 오토마톤이 내미는 신문을 곱게 받고 동전을 넣어 주었다.
그런 모습에 괜히 마음이 저미어서, 에스페란사는 굳이 길을 돌아서 신문팔이 소년에게서 신문을 샀다. 그러던 사이에 소년이 에스페란사의 지갑에 손을 대는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모른 척했다.
‘어차피 몇 푼 들어 있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시더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관대하신 숙녀분, 말은 해 주고 가야 할 것 아닌가요?”
“아, 미안해요. 찾았어요?”
“아뇨, 예상했어요.”
나인 호더 중앙역은 오스던을 통틀어 하루 통행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떠났다. 막일꾼부터 선박왕까지, 소매치기부터 공작까지.
서류 가방을 들고 거들먹거리며 걸어가는 변호사와 뺨에 살 오른 어린 소녀, 피곤한 얼굴로 날듯이 뛰어 기차에 올라타는 젊은 여자. 회중시계를 멀찍이 들고 얼굴을 찌푸린 노신사와 도시가 처음인 듯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거대한 시계탑을 올려다보는 청년.
게임 속의 나인 호더보다 평화로웠다. 재난이 감기처럼 닥쳐오던 그곳과는 달리, 이곳의 사람들은 당장 10분 뒤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괴물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자기 선택으로 모든 것이 다 좋아졌을 것이라고 낙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래도 좋아진 것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미색 전광판 위로 7번 승강장에 기차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불빛이 반짝였다.
“가요.”
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에스페란사는 기차역을 벗어났다.
짙은 녹색 몸체 위에 금색 띠를 두른 열차는 크고 호화로웠다. 제복 입은 오토마톤이 기차 앞에 서 있었다. 표를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 주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기계가 들어왔는데 왜 더 불편해진 것 같죠?”
“기계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사람이 멍청한 게 문제지.”
기차표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은 시더가 대꾸했다. 상당히 동정적인 어투였다.
“아, 기계에 감정이입 하지 말고요.”
“알았어요. 기계가 덜 똑똑해서 그래요.”
이건 이것대로 김빠진다. 하지만 귀족 저택 내부처럼 호사스러운 객차를 가로지르며, 에스페란사는 의외로 둘 다 꽤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나 싶었다.
침대칸까지 있는 큰 열차였다. 두 사람은 금세 객실에 도착했다. 내부가 보이진 않지만 척 봐도 아주 커 보였다. 벨링엄에서 탈마인까지라면 이삼일은 걸릴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그들의 목적지인 에이번데일은 여기에서 길어도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잠깐만요.”
“왜요?”
열린 문을 붙잡고 있던 시더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빈 객실을 바라보았다. 객실이 아주 깨끗했다.
…좀 지나치게.
“아예 사람이 탄 적이 없는 객실인 것 같은데.”
“그렇겠죠. 표를 그렇게 샀으니까.”
그러니까, 첫 역부터 종착역까지 노선 전체를 샀다고? 차라리 열차 전체를 다 빌렸다고 하는 게 덜 놀라울 것 같았다. 대체 그런 쓸데없는 지출은 왜 하는 거지?
“남이 타던 객실에 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게 뭐가 어때서…….”
“자, 숙녀분. 길 막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태연스레 에스페란사를 객실 안으로 밀어 넣은 시더가 문을 닫았다. 벨벳을 깔아 부드러운 광택이 도는 소파에 앉은 에스페란사는 테이블과 2인용 침대, 심지어는 작은 욕실까지 딸려 있는 객실을 보고 혀를 찼다.
“누가 보면 놀러라도 가는 줄 알겠어요.”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닌데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죠.”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모자 매듭을 풀어 모자걸이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시금 객차를 둘러보았다. 소파 위의 쿠션조차 하나하나 정성껏 준비된 것이 나쁘지 않았다.
‘오래 타는 건 피곤하고 싫으니까…….’
에스페란사는 창문이 잘 보이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발을 벗었다.
“저희 열차는 탈마인, 탈마인 행 열차입니다! 5분 뒤에 출발합니다!”
승무원이 벨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래도 열차 안에선 사람을 쓰는군.
증기 뿜는 소리가 트럼펫처럼 요란했다. 창밖의 광경이 덜컹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걷듯이, 뛰듯이. 이윽고 약한 부유감이 찾아왔다. 창문 너머로도 기름 태우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도시가 빠르게 멀어졌다.
턱을 괴고 작아지는 도시, 커지는 숲을 바라보던 시더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광산 일에 대해 들은 건 그게 전부였나요? 배후는 모른단 말이죠?”
“배후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몇몇 관리자들의 일탈일 수도 있고.”
갱도에 일꾼들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채굴 자체는 전부 오토마톤으로 하게 되어 있었다. 채굴량이 기록되는 만큼 일용직 일꾼들이 채굴된 마정석을 빼돌리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관리자급에서 장부를 조작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희귀 마정석은 사 주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연구가 충분치 않기도 하거니와, 연구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채굴량이 워낙 적은 만큼 평범한 사람이 쓰기는 어려웠다. 가끔 희귀병 환자들이 찾는 경우가 있다고 했고, 대체로는 연구자나 수집가들이 사들였다. 다시 말해 그들 말고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추적당하기 딱 좋은데. 나라면 일반 마정석을 빼돌리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