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37
외전1. 위험한 기차 여행 (8)
에스페란사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의 목에 매달렸다. 버려진 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더의 목을 꽉 끌어안은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그래요?”
“객실에 가만히 있었어야지! 진짜, 가뜩이나 통신기도 없는데 무섭게! 혹시 다치거나, 잘못됐을까 봐…….”
“아직 덜 풀렸으니까 조금 더 해 봐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쟤가 당신 닮은 꼴로 나온 게 잘못이지.”
“그래서, 구분을 못 했다?”
“그건 아니고.”
사실 조금 홀리기는 했다.
게임에서는 편의상 인큐버스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저 몬스터는 몽마가 아니다.
‘몽마 같은 게 던전에서 나와 봐야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고.’
굳이 따지자면 미인계로 홀려놓고 정신이 나갔을 때 잡아먹는 몬스터인데, 출몰 확률이 아주 낮아서 에스페란사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다만 처음 봤을 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조금 휩쓸렸을 뿐이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으로 시더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어 보았다. 보고 베낀 듯이 똑같은 빛깔이었지.
“몰랐던 건 아닌데, 공격 타이밍 맞추기가 쉽지 않단 말이에요. 정신계 공격 침투도 막아야 됐고. 그래서 그냥 편법 썼어요.”
직접 상대한 적은 없어도 공략법을 모르진 않았다. 행동을 똑같이, 거울상으로 따라 하기. 어떤 인간이 몬스터 상대로 이런 짓을 실험해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완전히 홀리지는 않았다.
“그래요?”
화가 덜 풀린 건가? 물론 에스페란사도 시더가 그런 꼴로 있었다면 죽일 듯이 들볶긴 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그렇지. 이해는 간다.
에스페란사는 손을 들어 달래듯 시더의 뒷목을 쓸어내렸다.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자, 시더의 입술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 역시 몸을 조금 굽혔다. 아까 그 괴물이 그랬듯이.
다른 점은, 그의 키스는 에스페란사가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발끝이 툭 닿았다. 신사 구두 너머로 오므라든 발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에스페란사의 몸을 완전히 덮고도 길게 늘어졌다. 다른 때라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며 이 기분을 즐겼겠지만, 재난 상황이니 그럴 수는 없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뗐다.
“남은 빚은 나가서 갚도록 하시고, 백작 부인. 우린 할 일이 있어요.”
“그야 그렇죠.”
아직 던전을 완전히 공략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더가 꺼낸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객차에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 문제가 안 돼요. 하지만 기관차 쪽이라면 어떨까요?”
아, 잠깐만.
시더는 허리를 굽혀 에스페란사의 총을 주워 주며 덧붙였다.
“지금 이 기차엔 기관사가 없어요.”
* * *
에스페란사가 실비아 험프리의 약혼자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시더는 암살자의 팔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브라이트닝 필드?”
“……그것 말곤 몰라.”
양팔에 총알이 박힌 채로 숨을 헐떡이던 암살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헤집어진 상처에서 나온 핏물이 카펫을 적셨다. 치료를 받더라도 팔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니, 치료를 받을 수나 있을까? 암살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더는 총구로 바닥에 눕혀둔 암살자의 어깨를 꾹 눌렀다.
브라이트닝 필드. 입 안으로 되뇐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근본 없는 금융기업은 이게 문제다. 자기들이 내놓은 계약 조건이 나빴던 게 이쪽 탓도 아니고, 고작 마정석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들면 쓰나.
“의뢰인은 사장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
“모른다고!”
“무례하기는.”
탕. 짧은 총격에 암살자의 몸이 펄떡 뛰었다. 겨드랑이와 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마력탄에 살이 쓸려 후끈했다. 영락없이 심장을 겨눈 줄로만 알았던 암살자는 벌벌 떨었다.
조금이라도 빗나갔다면 바로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으나, 묶인 다리를 질질 끌며 카펫을 쥐어뜯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백작이 구둣발로 옷자락을 즈려밟자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암살자는 흔들리는 눈으로 타깃을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에이번데일 백작 부부의 암살을 의뢰한 의뢰인은 백작의 사격 실력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작 부인이 왕자의 사격 선생 노릇을 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만 했을 뿐. 그래서 그도 앉아서 펜대나 굴렸을 백작 쪽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그 책상물림의 총구 아래 깔려, 제발 놈의 사격 실력이 훌륭하기를 빌어야 한다니!
“더 할 말이 없단 말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조각 같은 얼굴을 찡그린 백작이 총구로 암살자의 심장 위를 두드렸다. 너덜너덜한 손목을 들어 총구를 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작의 손은 초를 세듯 방아쇠를 달깍거렸다. 암살자의 귀에는 그 소리가 그에게 남은 시간을 세는 초침 소리 같았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총구가 심장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쩌면, 하고 희망을 가진 순간이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덮개를 열어 내부를 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럴 때에.”
객실 바깥으로 나온 그는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암살자의 옷자락을 쥐어 끌고 나왔다. 묶인 발이 질질 끌렸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에스페란사는 지금 식당칸에 있고, 그는 객실에 있다. 빠르게 합류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여긴 기차 안이다.
시더는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몬스터는 던전 내부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곳은 어디일까?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기관차.’
기관차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래서 기차가 탈선하기라도 하면 아무리 던전 공략에 성공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에스페란사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바로 기관차로 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 시더는 몬스터의 다리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그중 몇 발은 정확히 급소에 맞았다.
괴물이 주춤한 사이, 다음 마력탄이 암살자의 발 사이에 명중했다. 단단히 묶여 있던 발이 풀리자, 암살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자기 목숨 정도는 알아서 챙길 수 있겠지.”
그는 자신을 죽이려 찾아온 놈의 목숨까지 구제해 줄 정도로 관대하진 못했다. 운이 좋다면 살아남겠지.
시더는 가방에서 총까지 한 자루 꺼내 주었다. 손에 쥐여 주진 않았다. 그랬다가 놈이 이쪽을 쏠 수도 있으니까. 적당한 거리에 총을 내려놓은 그는 망설임 없이, 아직 죽지도 않은 괴물과 암살자를 남겨두고 기관차를 향해 떠났다.
기관차까지 가는 동안 두 번의 전투를 겪었지만, 다행히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가지 마세요! 지금 가시면 우린 다 죽을지도 몰라요!”
“글쎄요, 제가 지금 가지 않으면 확실히 죽겠지요.”
울면서 붙잡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뒤돌아선 순간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도착한 기관차. 문을 연 순간이었다.
쓰러진 기관사. 벽에 달라붙은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케인 건을 들어 올린 시더는 괴물의 눈을 향해 총을 쏘았다. 좁은 기관차 안. 발버둥 치던 괴물의 발이 복잡한 제어반을 마구 짓눌렀다. 발에 걸린 레버가 툭, 아래로 내려갔다.
빌어먹을. 시더는 마정석을 갈아 끼우고 출력을 최대치로 높였다. 제어반이 고장 나든 말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몸을 낮춘 채로 조준경 너머를 바라보았다. 터지면 위험할 게 분명한 파이프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한쪽 눈에 피가 흐르는 도마뱀 형태의 몬스터가 사나운 얼굴로 긴 혀를 뽐냈다. 마치 그의 망설임을 아는 듯이 죽 찢어진 입이 불쾌했다.
모험을 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그 혼자만의 목숨이라면 모를까, 이 열차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에스페란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을 배우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능력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입술이 마르는 만큼 눈이 맑아지는 듯했다. 날쌘 괴물이 조롱하듯 파이프를 넘나들었다. 시더는 여전히 같은 점을 조준하고 있었다. 잇새로 나오는 듯한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괴물이 피 묻은 혀를 낼름거렸다.
그리고 괴물의 몸뚱이가 조준점을 훌쩍 넘어 몸을 날린 순간.
탕!
직선으로 휙 들어 올려진 총구에서 마력탄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 급소였다. 뛰어올랐던 괴물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시더는 괴물의 머리와 몸통 사이를 조준하고, 다시 한번 더 총을 쏘았다.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사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발밑이 누런 진액으로 물들었다. 시더는 바닥에 구두 밑창을 대충 문질러 닦고, 기관사에게 다가갔다.
기관사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비록 장기가 헤집어지기는 했어도. 일단 응급처치를 하려면 식당칸으로 돌아가서 붕대라도 받아와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시더는 직선으로 쭉 뻗은 선로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계기판을 차례로 확인하고 아까 괴물이 내려놓은 레버를 다시 올렸다.
“그렇게 된 거죠.”
기관차로 통하는 문을 열며 그가 말했다. 에스페란사가 있으니 붕대를 가져올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