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이 안은 마법으로 따뜻해진 상태인 데다 대낮처럼 환하다. 하지만 바깥은 벌써 깜깜할 시간이다. 정 답답하면 잠깐 나갈 수도 있지만, 코델리아는 처신을 잘하는 소녀였다.
이 시간에 자신처럼 나인 호더 신사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는 어린 소녀가 혼자 나갔다가 당할 수 있는 일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개중에 코델리아에게 손을 대면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자들이 없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분명 코델리아는 나갔다. 루신다와 실비아는 저쪽에 있었고, 에스페란사가 아까 인사한 귀부인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어, 미스 헌터? 저기, 혹시 미스 헌터 못 보셨습니까? 머리색이 짙고 보라색 눈을 가진…….”
샴페인을 가지고 온 로웰이 주변의 귀부인을 붙잡고 물었다.
“로웰 씨, 우리가 아가씨 눈 색까지 어떻게 알아요?”
“그, 그렇군요.”
로웰이 멍청한 대화를 하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거대한 험프리 저택 주변을 둘러보며 코델리아를 찾았다. 괜히 소리를 냈다가 정말 누군가 코델리아를 위협하고 있으면 범인을 자극하게 될 테니,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어둠 속에서 흰 드레스를 입은 몸이 희끄무레한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긴 드레스 자락이 꼬리처럼 늘어졌다.
정원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토끼 오토마톤을 제외하면,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마부들이 피우는 싸구려 궐련 냄새가 멀리서 풍긴다. 에스페란사는 모든 감각을 활짝 열었다. 헌터의 발달된 청각이 바스락거리는 발소리를 잡았다. 구둣발. 여자와 남자.
“싫어요, 이거 놔요!”
“저번엔 내가 좋다고 했잖습니까? 레이디가 한 입으로 두말해서야 쓰겠습니까? 으응?”
“내가 언제 그랬어요! 당신이 멋대로 따라왔잖아요! 악, 저리 가!”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역겨운 웃음을 지으며 코델리아의 몸을 압박했다. 아까 코델리아와 춤을 추던 남자는 아니었다. 차림새를 보면 파티에 초대된 사람인데 나이는 마흔이 넘어 보이고, 주제 모르고 치근덕대는 꼴이 추했다.
“코델리아?”
에스페란사가 인기척을 내자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인기척의 주인이 코델리아보다 기껏해야 조금 더 큰, 드레스를 입은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자 느물거리는 웃음이 더 짙어졌다.
“나와 레이디 코델리아는 긴히 할 일이 있으니 저리 가시오. 아니면…….”
남자가 자켓 안쪽으로 넣었던 손을 치켜들었다. 손에 총이 들려 있었다. 손바닥에 반쯤 가리긴 했지만 새까만 마정석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에스페란사는 눈도 깜짝 않는데 붙잡힌 코델리아가 덜덜 떨었다.
“사람을 불러와도 소용없소. 나와 레이디 코델리아의 관계를 보증해 줄 증인만 더 생기겠지, 하하!”
“에, 에스페란사!”
어차피 구해 줄 것이다. 이런 꼴을 보고 그냥 갈 순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코델리아가 눈물 범벅된 얼굴로 소리쳤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요!”
“들으셨겠지? 바쁜 연인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잖소!”
의기양양한 남자가 총을 장전하는 체하며 콧대를 세운 순간, 손에 강렬한 충격과 함께 총이 휭 날아갔다.
잔디깎이 오토마톤이 총에 부딪혀 철거덕 소리를 냈다.
[장애물이 있습니다. 치워 주세요.]발랄한 아이 음성으로 녹음된 목소리가 긴장된 분위기를 일시에 깨뜨렸다.
“이이익! 대체 어떻게……!”
남자는 에스페란사가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코델리아를 인질 삼으려 들었다. 그러나 두툼한 손이 코델리아의 목에 감기려는 순간 남자의 몸이 정원 저편으로 날아갔다.
“악, 악! 잘, 잘못했소! 잘못했다고, 그만해!”
코델리아는 멍하니 서서 목을 손으로 감았다. 자신에게 너무 위협적이었던 남자는 잔디 위에서 공처럼 구르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잔상이 움직일 때마다 남자의 두툼한 몸뚱이가 담장 위까지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졌다. 퍽, 퍽, 둔탁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 생각에, 넌 팔다리 네 개를 다 달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에스페란사의 손에 남자의 총이 들려 있었다. 저 멀리 날아간 줄 알았는데 언제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어, 남자는 눈만 껌벅거렸다. 과연 에이번데일의 피후견인답게 마법 무기를 능숙하게 장전한 숙녀가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웃었다.
“골라. 어느 쪽을 포기할래?”
“뭐, 뭐요. 뭘 포기하라…… 서, 설마 내 팔다리를!”
“뒤탈이 있으려나?”
마치 파오란을 피우듯 길게 숨을 내쉰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그럼 헌터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강간 미수범을 척결하도록 할까.”
헌터의 전통적인 강간범 척결 방법, 이른바 ‘강간범 계란 깨기.’
후.
거기엔 긴 역사가 있다.
우월한 신체적 능력과 절대적으로 보호받는 지위, 거기에 던전 공략으로 얻은 무기를 가진 헌터들은 나인 호더 안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초기에 몇몇 여자 유저들이 ‘강간범 계란 깨기’라는 사모임을 만들어 일종의 자경단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처참하게 당한 강간범 모습을 게시판에 전시하는 것이 전체 유저의 유행으로 번졌다.
끊이지 않는 던전만큼 강간범도 끊이지 않았다. 7년 차 유저 에스페란사가 깨뜨린 계란을 쌓아 올리면 산타 줄리아나 성당의 첨탑까지 닿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13년 전이고, 헌터의 행동을 비호해 줄 헌터 협회도 없으니 적당히 해야겠지. 에스페란사는 무도화를 신은 발을 치켜들었다.
“으아, 컥!”
“시끄러워, 진짜.”
파티가 열리는 온실에서 꽤 멀리 왔지만, 귀 좋은 누군가가 듣고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스페란사는 남자를 기절시킨 다음 적당한 곳에 던져 두었다. 계란…… 깨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증거도 없다. 술 냄새가 짙게 나는 만큼 자기 혼자 나와서 헤매다 고꾸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숙녀를 억지로 끌고 가려다 얻어맞고 기절했다는 소리를 본인 입으로는 절대 못 할 것이다. 거기다 숙녀에게 얻어맞아서 거기가 아프다고? 그 말을 하느니 죽겠지.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돌렸을 때, 코델리아는 여전히 목에 손을 감고 있었다.
‘아, 저쪽을 먼저 신경 썼어야 했어.’
스물도 안 된 소녀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강간 미수범을 때려 주는 것도 좋지만, 먼저 코델리아를 달랬어야 했는데.
“저, 에스페란사.”
코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한 대만 때려도 될까요?”
“아…… 그러세요.”
눈가에 애처롭게 매달린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 내듯 닦은 코델리아가 무도화 코로 남자의 옆구리를 쳤다. 그리고 혹시나 깨어날까 봐 흠칫 물러났다. 기절한 남자는 거칠게 꿈틀댔을 뿐 깨지는 않았다.
코델리아는 조금 웃었다. 두려운 것이 우스운 것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그래도요.”
두 사람은 강간 미수범을 던져 놓은 곳에서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드물게 비도 오지 않는 날. 코델리아는 아직 온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오고 싶지 않았어요. 험프리가의 파티니까 실비아를 생각해서 온 거지. 파티는 너무 지쳐요. 날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코델리아가 흐느끼듯 속삭였다. 어떤 소녀에게는 온 세상 남자들의 구애가 쏠리는 상황이 우쭐하고 즐거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험해 온 바에 따르면 그 상황을 즐겁게만 받아들이는 소녀는 거의 없었다. 코델리아 또한 그랬다.
“남자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그러더니 슬쩍 에스페란사의 눈치를 보았다.
“저도.”
“히, 다행이에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그러거든요. 남들은 춤 신청 못 받아서 안달인데 거만하게 군다고요.”
“좀 거만해도 괜찮은 상황 아닌가요?”
“그래도 누군가는 정말로 그게 필요하니까요. 괜히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코델리아는 조금 덜 섬세해질 필요가 있었다. 탐욕을 거침없이 내보이며 다가오는 남자들을 거절하는 것도 미안해하는 소녀에게, 이 사회가 그리 녹록지는 않으니까.
그건 열여덟 소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일도 늘 있는 건 아니고 견딜 만해요. 오늘은 좀 위험했지만.”
그러니까 처음은 아니라는 뜻이다.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 못 된 놈들이 참 많다. 던전은 뭐 하나, 저런 놈 머리 위에 안 열리고.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의 조용한 태도에서 용기를 얻어 나인 호더의 다른 사교계 사람들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아까 본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에스페란사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사실 더 힘든 건 따로 있어요. 알고 계신가요? 저, 파혼했거든요. 나인 호더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예요.”
켄드릭은 혼담이 지지부진해지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만 했다. 그건 완곡한 표현이었다. 실질적으로는 파혼에 가까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저희 영지에서 이상한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상대 가문이, 미신을 좀 믿어요. 신비로운 현상, 마녀와 요정. 영지가 북부 고원 쪽인 데다…… 이런 설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던바틴 공작가예요.”
알 만했다.
오스던 최북단에 위치한 던바틴, 스털링, 보더의 영주 렌프루 가문. 으스스한 이야기들과 유독 강력하고 기이한 몬스터들의 땅. 빼빼 마른 나무 사이로 휘파람 같은 바람이 부는 곳. 춥고 메마른, 힘줄 같은 산맥이 하늘 끝까지 솟아 있는 곳. 자연이 강한 곳에선 미신과 설화가 발달하기 마련이다.
“좋은 가문이죠. 훌륭한 영주이시고, 타의 모범이 되시죠. 하지만 ‘불길한 땅의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던바틴에서 보내온 마지막 말이었어요.”
마벨우드 남작가는 분노했다. 그러나 던바틴은 오래된 가문이다. 그런 자들이 전통을 꺾는 법은 없다. 부유하고 수도에 입지도 좋은 마벨우드도 굳이 이 혼담을 유지하려 애원할 만큼 절박하지 않았다. 혼담은 깨졌고 코델리아의 마음에는 흉터가 남았다.
그러나 깨진 혼담은 더 싫은 것들을 이끌고 왔다.
“파혼하자마자 제 친구에게 구애하던 신사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더군요. 속이 뻔하죠. 그 친구와는 아직도 데면데면하게 지내요.”
신의도 예의도 없었다. 그런 자들은 심지어 자존심도 쓸데없이 높아서 구애하는 처지에 기어이 우위에 놓이려는 습성까지 있었다. 코델리아는 무릎 위에 둔 주먹을 푸르르 떨었다.
“우스운 건, 그런 자들이 저와 몇 번만 대화를 나누고 나면 던바틴 얘기를 꺼낸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선 사정은 잘 모르지만 마벨우드가 불길한 땅이긴 하다고 말하죠. 그렇게 불길하면 제게 구애하지 않으면 되는데요! 저와 마벨우드를 깎아내리려고 믿지도 않는 미신 얘길 꺼내다니요.”
귀찮게 달라붙는 남자들 얘기를 할 때는 멀쩡하던 코델리아는 마벨우드를 입에 담은 후부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내 땅은 불길한 곳이 아니란 말이야. 그건 사고였는데. 우리 잘못이 아닌데, 피해 가족들에겐 보상도 다 해 주고 장례도 치러 줬는데!”
훌쩍거리던 코델리아는 결국 소리 내어 울었다.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