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0
외전1. 위험한 기차 여행 (11)
늦은 아침이었다. 여덟 시면 진작 일어나서 어디로든 달려가던 에스페란사의 바른 생활 습관은 시더 클라이번의 등장으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열 시 반이 되어서야 눈을 뜬 에스페란사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몇 번인지 모를 탄식을 내뱉었다.
“이래서 누구랑 사는지가 중요한 거야.”
그런데 시더는 또 에스페란사의 습관이 옮았는지 일찍 일어난 모양이다.
아니지.
‘밤을 샜네.’
이제 와서 전투의 후유증 때문일 리는 없고. 서재에 있는 건가? 굳이 찾아가 볼 생각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비비며 1층으로 내려왔다.
“좋은 아침…… 어?”
“좋은 아침입니다, 레이디 에이번데일.”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맞긴 한데.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인 에스페란사는 우유를 탄 차를 받아들며 지정석에 앉았다.
“로드 서덜랜드.”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프레드릭입니다.”
그는 보란 듯이 날렵하게 절을 해 보였다.
“언제 왔어요?”
“밤에요. 다들 자고 있어서 저도 에이번데일에게만 인사하고 들어가 잤습니다.”
“아하…….”
설명은 그게 끝인가?
“고든은 원래 종종 드나들었어요. 최근 몇 년간은 사관학교에 갇혀 있었지만.”
응접실 안쪽에서 걸어 나온 시더가 덧붙였다. 에스페란사의 양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볕이 잘 드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손에 들린 펜과 노트를 보아하니 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것 같았다.
“그다음에 파병도 다녀왔다고. 아무튼, 어제는 잘 곳이 없어서요.”
멋쩍게 웃은 프레드릭 고든이 불쑥 물었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사격 연습은 안 하십니까?”
“안 해요.”
뭘 기대했는지 프레드릭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에스페란사는 차를 마저 비웠다.
찻잔 바닥이 드러날 즈음 험프리 모녀가 내려왔다.
“우리가 마지막인가요? 어머, 로드 서덜랜드.”
“좋은 아침입니다, 험프리 부인. 험프리 양.”
실비아도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그러나 춤추는 듯한 움직임과는 달리 실비아의 눈은 안쓰럽게 부어 있었다.
어제 같은 일을 겪고도 의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코델리아처럼 심지 굳게 이겨낼 수는 없었다. 험프리 부인 역시 아무 일도 없는 듯 웃고 있지만,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둘 다 얼른 와서 앉으세요. 마가렛, 두 사람 몫의 차를 가져다줘.”
상냥한 인상의 하녀가 두 사람의 기호를 묻고, 차를 준비했다.
“잠자리는 괜찮았어요?”
이제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럼요. 두 분 덕분에 정말 편히 쉬었어요. 그 난리 통에 괜찮은 숙소를 잡을 수 있었을지…….”
“에이번데일엔 머물 만한 곳이 많지 않죠.”
아마 그 기차에 타고 있던 귀하신 손님들 대부분은 호텔 잡기에 실패하고 지인의 집을 찾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험프리 모녀도 마차로 두 시간 걸리는 거리의 약혼자를 찾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에이번데일 백작이 이토록 사교계와 담쌓고 사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글라일리 하우스도 병원만큼이나 붐비고 있었겠지만…. 지금 글라일리 하우스에 머무는 손님은 셋뿐이었다. 레이디 퍼스의 조카로서 백작과 나름대로 막역한 데다 밤중에 나타나 방을 내놓으라고 할 배짱도 있는 서덜랜드 자작 프레드릭 고든. 그리고 에스페란사가 호의 반 고의 반으로 초대한 험프리 모녀.
‘그렇지. 확인할 게 있었지.’
의도가 없었더라도 둘을 초대하긴 했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의도가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실비아의 퉁퉁 부은 눈을 곁눈질했다. 저 눈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나쁜 소식을 전해 줄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실비아는 따뜻한 잔을 받아들고 차향을 들이마셨다.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 풀렸다.
“사실 로드 에이번데일의 저택이니까 모든 게 다 기계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 손으로 하는 게 더 많네요.”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저희 아버지보다도 더 기계를 덜 쓰는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 역시 그렇게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서덜랜드 자작의 아버지인 런포드 후작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레이디 퍼스가 싫어하는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꼬장꼬장한 인물일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편지를 갖고 오는 것 같은 일은 다들 오토마톤을 시킨다고요.”
“잔디를 깎는 일도 그렇고요.”
험프리 부인이 첨언했다. 에스페란사는 험프리 저택에서 봤던 잔디깎이 오토마톤을 떠올렸다. 토끼 모양이었지.
“그치만 난 하루 종일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단 말이에요. 집은 좀 사람 냄새가 나는 편이 좋아요.”
“그 정도인가요?”
물은 건 실비아도 험프리 부인도, 심지어 프레드릭도 아니었다. 펜을 쥔 채로 고개만 든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한 에스페란사가 찻잔을 고쳐 쥐었다.
“좀 시끄럽긴 하죠.”
당신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딱히 지겨운 것도 아니었지만.
“배려가 없었군요. 연구실 소파에서도 잘 자길래 몰랐죠. 안 그래도 방음재를 좀 더 늘려볼까 했어요.”
방음재 문제는 아닐 텐데. 에스페란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하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젯밤에 잠들어 버려서 시더에게 실비아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눈치껏 맞춰 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이것도 눈치껏 맞춘 건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건가?
하지만 일단 놓칠 순 없었다.
“실비아, 약혼자인 아서 파웰 경의 저택도 실험동물 때문에 시끄럽다면서요. 방음벽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실비아는 손사래를 쳤다.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아직 약혼일 뿐인걸요.”
“그래도, 아서 경도 손님맞이를 하면서 매일 밤 동물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건 도리가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에스페란사가 남의 일에 이렇게 강하게 간섭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시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펜촉이 노트를 가볍게 두드렸다. 끼어드는 게 좋을까, 아니면 내버려 두는 게 좋을까.
그 때, 눈이 마주쳤다. 아주 찰나.
시더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택에 실험동물이 있다니, 그거 참 신기한 이야기군요. 약혼자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아, 말씀을 안 드렸어요. 아서 파웰 준남작이에요. 여기 리튼 인근에 살고 있는데…….”
“만난 적은 없어요.”
시더가 딱 잘라 말하자 실비아와 험프리 부인의 눈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에이번데일 백작도 파웰 준남작도 사교에 힘을 쓰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면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논문은 읽어본 것 같네요.”
“로드 에이번데일의 기억에 남을 정도였나요? 좋은 의미로 기억에 남은 거겠죠?”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겠죠.”
“마법 약학 논문도 읽으시는군요?”
파웰 준남작의 전공 분야가 약학이란 사실은 전혀 몰랐던 시더가 재빨리 미소를 꾸며 냈다. 프레드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마도 공학도 다양한 분야와 접목이 되니까요.”
“그렇겠네요!”
“파웰 준남작이 리튼에 사는 줄은 몰랐군요. 두 분을 글라일리 하우스에 초대…….”
에스페란사의 손이 빠르게 손등을 스쳐 가는 감각에 시더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초대는 당분간 어려울 듯싶고.”
“방음벽 공사를 할 거라서요. 하지만 준남작께서 초대해 주신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가 아직 그리 친근하지는 않지만, 한번 말씀을 드려 볼게요. 아마 아서 경도 에이번데일 백작 부부라고 하면 흔쾌히 승낙하실 거예요.”
말마따나 실비아는 아서 파웰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할 말은 하는 성격인 코델리아나 붙임성 좋은 루신다라면 모를까, 실비아는 개중에서도 신중하고 얌전한 편이었다.
‘험프리 부인이 있는 앞에서 약혼자의 험담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시더가 눈치 좋게 험프리 부인과 프레드릭 고든을 데리고 당구대로 향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된 듯싶다. 적어도 에스페란사가 아서 파웰을 파 보려는 생각이라는 것 정도까지는.
“전엔 당구 같은 건 취급 안 한다면서?”
“취급하는 분이 생겨서.”
프레드릭이 에스페란사를 휙 돌아보았다.
“레이디 에이번데일도 당구를 치시나?”
“실력은 상당하지. 사격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네랑은 안 해.”
“내가 뭐가 어때서? 내 관심은 아주 순수해.”
알고 있다. 아니었다면 프레드릭 고든은 이 저택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투덜거린 프레드릭은 당구대를 보고 금방 화색을 띠었다.
“그런데 에이번데일, 자네는 할 줄 아나? 험프리 부인, 제가 부대에서 당구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두 분이 한 팀으로 하시죠.”
따분한 티를 애써 감춘 시더가 눈짓을 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아이스크림이나 가지러 갈래요? 원랜 후식으로만 먹는 건데, 오늘은 손님도 있으니까.”
“에스페란사, 한 컵만 먹도록 해요.”
“네, 네.”
문이 닫히자, 에스페란사가 씩 웃었다.
“난 두 컵 먹을 거예요.”
실비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응접실에 내려왔을 때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입 다물어 줄 테니 나도 두 컵 줘요.”
좋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