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2
외전1. 위험한 기차 여행 (13)
그날은 다들 조금 일찍 잠들었다. 와인에 넣은 소량의 수면제가 제 역할을 해 준 듯했다.
에스페란사는 홈드레스를 벗고 블라우스와 가죽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발목 위로 올라오는 군화의 끈을 묶었다. 등 뒤에 달아둔 날개가 잘 움직이는지 확인해 본 뒤 갈무리해 넣었다.
발코니 너머, 시더의 증기 마차에서 불이 깜박였다. 작년에 새로 산 마차로, 마부석을 없애고 운전석이 마차 내부에 있는 형태였다. 상류층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던 탓에 별달리 주목받지는 않았다.
바로 발코니로 넘어가려던 에스페란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하녀인가?
의심 없이 문을 연 에스페란사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치고 뒤늦게 멈칫했다.
‘나 지금 옷이……!’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실비아 험프리는 닫히려는 문 사이로 다급히 팔을 끼워 넣었다.
“잠깐만요!”
“왜, 왜 왔어요?”
두 사람 모두 당황한 나머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상태였다. 심박수가 치솟았다. 그저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고리를 쥔 채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실비아였다.
“지금 가는 건가요?”
에스페란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장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됐다.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난 여전히 혼란스러워요. 아서 경이 이상한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누명을 씌우진 않을 거죠?”
“그런 짓을 왜 하겠어요. 그 사람한테 원한 없어요.”
“당신은 코델리아도 구해 줬으니까, 나도 당신을 믿어야겠죠.”
믿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말해 주려던 때였다.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실험실은 저택 지하에 있을 거예요. 입구가 따로 있는데, 저택 뒤쪽의 작은 기계실이에요.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말해 준 적은 없어요. 하지만 하는 말을 들어보면 거기밖에 없더라고요.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만. 아, 물론 잠금장치는 돼 있을 거예요.”
“그건 상관없어요.”
“그럼.”
“일찍 자요.”
아침이 오면 결말이 날 것이다. 돌아선 실비아 험프리를 향해 에스페란사는 지나가듯 물었다.
“실비아, 그 사람을 좋아했어요?”
“전혀요.”
그 대답을 끝으로 실비아는 걸음을 옮겼다.
에스페란사는 발코니를 뛰어넘었다. 곧이어 증기 마차가 어둠을 가르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가는 길은 알아요?”
“지도 보고 왔어요.”
“어디 있는데요?”
“집에 있죠.”
아. 탄식을 터뜨린 에스페란사가 자리에 몸을 묻었다. 알아서 하겠지.
“만약에 길이 중간에 끊기거나 하면 어떡해요?”
“숙녀분, 설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동트기 전에 파웰 저택으로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말아요.”
아직 자정이 되기 전이었다. 해가 뜨려면 못해도 다섯 시간은 더 지나야 한다. 에스페란사는 운전대를 쥔 시더의 손등을 툭 쳤다.
“겁주지 말고 제대로 가요.”
“겁나요?”
“계속 그러면 나…….”
말끝을 흐린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충분히 집중하고 있다고 판단되자 말을 이었다.
“자 버릴 거예요.”
“그건 안 되죠.”
시더가 냉큼 대꾸했다. 그는 곧 에스페란사의 손을 끌어당겨 변속기 레버 위에 얹었다. 잠시 후, 시더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어두운 길 위로 웃음소리가 희뿌연 증기와 함께 흩어졌다.
* * *
다행히 시더는 많이 헤매지 않았다. 한 번 길을 잘못 들 뻔하긴 했지만, 동이 트기 전에 무사히 파웰 준남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문이 닫혀 있네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럼 어떻게 들어가요?”
“문 위로 넘어서…?”
시더는 진심이냐는 듯이 에스페란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 윤곽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 정말로?”
“그거 말곤 방법이 없잖아요.”
담장은 높았지만, 문 정도면 넘을 만했다. 시더는 제법 모양을 낸 문을 툭툭 건드렸다.
“당신한테 철사가 좀 남았을 것 같은데.”
“맞다.”
어차피 그들의 짐작대로라면 내일쯤 이 문이 열려 있는 이유를 고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철사를 꺼냈다. 그리고 에이번데일 저택의 자물쇠를 열었듯이 대문의 잠금쇠를 열었다.
철컥. 고요한 저택에 잠금쇠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저택 안쪽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저택 내부에서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기계실로 향했다.
작은 오두막 정도 크기의 기계실 굴뚝에서는 증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으나, 내부는 깨끗했다. 에스페란사는 어렵지 않게 통로를 찾아냈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지하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았다. 새 철사를 꺼낸 에스페란사가 문을 열었다.
“쉿.”
그들은 낮은 걸음으로 연구실에 진입했다. 에스페란사가 희미한 빛의 구를 띄웠고, 시더는 지팡이 손잡이를 돌렸다. 흰 빛줄기가 바닥을 향했다.
실험실은 넓고 컸다. 맹수의 낮은 울음소리, 어린 짐승의 신음 소리. 가시지 않은 피 냄새. 아니, 그보다는……. 에스페란사는 눈을 찡그렸다.
“불을 저쪽으로 비춰 봐요.”
시더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우리에 갇힌 커다란 개가 으르릉, 짧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눈이 마주쳤음에도 크게 짖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내심 안심했지만, 다음 순간 짧게 숨을 들이켰다.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불빛만으로는 그 적나라한 상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힘겹게 눈을 돌렸다. 개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눈물이 가득 번진 눈이 안쓰러웠다.
일단 여기는 동물들뿐이다. 끔찍하지만, 좀 더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야 했다. 둘은 흩어져 연구실을 수색했다.
시더는 아서 파웰의 책상을 뒤졌다.
파웰은 단순한 놈이었다. 마지막 서랍에서 정직한 실험일지가 나왔다. 시더는 눈으로 내용을 훑으며 책상 한편에 놓인 타자기를 분해했다. 바닥에서 작은 열쇠가 나왔다.
서랍과 서랍 사이의 합판을 꺼내자 보석함 같은 것이 나왔다. 이 안에 뭐가 있을지는 뻔했다. 마정석이겠지.
‘단순해.’
너무 단순해서 지루할 정도였다. 여기까지 제대로 찾아오는 게 제일 어려웠다.
마정석 보관함 안에서 희귀한 마정석이 서로 다른 빛깔로 반짝였다. 각각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에 대해 연구해 놓은 게 있을까 싶어 일지를 마지막까지 훑어보았지만 그런 건 없어 보였다.
하긴, 이따위 연구를 하는 놈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시더는 조잡한 연구 내용을 보며 혀를 찼다. 지도해 줄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이것보다는 나았겠으나, 동물의 몸에 괴물 팔을 기워 붙이는 연구 따위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서랍을 마저 뒤진 시더는 광산 관리자가 보낸 편지도 몇 장 발견했다. 이만하면 필요한 건 다 봤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쪽으로 와 봐요.”
그 때, 에스페란사가 뛰듯이 다가와 팔을 끌어당겼다.
“왜 그래요?”
시더는 따라 걸음을 옮기며 물었으나,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시더를 연구실 안쪽으로 데려갔다.
“사람은 없었어요.”
“다행이군요.”
“다행이 아니에요. 있었는데 죽은 거니까.”
그 말대로였다. 지독한 약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술대 위에 죽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오래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시더는 눈을 돌렸다. 약물이 든 유리병이 벽 한 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병 안에 둥둥 떠다니는 팔다리를 확인한 그는 다시 시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 시체가 첫 실험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찾아봤는데,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으니 아마 신원 정도는 찾을 수 있겠죠?”
운이 좋으면요. 시더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럴 거예요.”
에스페란사는 남자의 눈을 감겨 주고, 시더의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체의 얼굴을 덮었다. 착잡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거칠게 저어 감정을 털어낸 에스페란사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찾을 만한 건 다 찾았나? 마정석은요?”
“여기.”
마정석이 가득 찬 상자를 열어본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휙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게 다 우리한테서 훔친 거예요?”
“쉿.”
목소리가 커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꽉 찬 상자에 구슬처럼 굴러다니는 마정석들. 검정색 하나 없었다. 제련을 못 한 건지 아직은 원석 상태였지만, 일반적으로 동력에 쓰이는 마정석은 없었다.
“내가 갖고 있을게요.”
상자가 인벤토리 안으로 쑥 들어갔다. 광산 관리인의 편지도 이어서 들어갔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 광산에서 희귀 마정석이 이렇게 많이 나왔다고? 근데 이걸 다 자기들끼리 빼돌렸다고?
“어지간히 해 먹었네…….”
“해 먹지 말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적당히 했으면 티도 안 났을 텐데.”
“적당히도 싫어요. 다 내 건데.”
“돌아가면 새 관리인을 찾아봐야겠어요.”
그것도 나름대로 일이다. 시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제 뭘 해야 할지 고민해 볼 시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