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4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1)
가벼운 총성과 함께 새들이 날아올랐다. 탄알이 과녁에 박혔다.
“와!”
총을 내린 코델리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오늘 처음으로 중앙에 명중한 것이었다. 칭찬을 기대하며 고개를 휙 돌렸지만, 에스페란사는 엄격하게 말했다.
“총 내리지 말고.”
“칭찬부터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주 잘했어요. 잘했지만, 총은 계속 들고 있어요. 마저 쏴야죠.”
툴툴거리며 총을 든 코델리아는 신중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아까처럼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다.
“역시 요행이었나 봐요.”
“처음은 원래 다 요행이에요.”
“당신도 그랬어요?”
“아마도?”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코델리아는 치사하다며 투덜거리다가 다시 총을 들었다. 묵직한 장총을 든 팔이 후들거렸다.
“오늘은 이만할까요?”
“이건 마저 다 쏘고요!”
체력과 근력은 없지만, 끈기와 자존심은 있다. 코델리아는 탄알을 전부 쓰고 나서야 총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팔을 펴는 것도 힘든지 얼굴을 찡그렸다.
“권총만으로도 괜찮았을 텐데.”
“장총이 멋있잖아요! 난 당신처럼 총을 늘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요.”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린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를 이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문을 열자 진한 버터 향이 훅 끼쳤다. 갓 구운 스콘과 살구 마멀레이드, 클로티드 크림. 얇게 썬 오이를 넣은 샌드위치.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홍차를 따라 주었다.
엄격한 사격 수업이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달콤한 간식을 앞에 두고 푹 풀어졌다. 총기를 다루는 일이기에 에스페란사는 수업 시간 동안 잡담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 편이었다. 할 말이 많은 코델리아는 이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늘은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에스페란사, 손목에 예쁜 걸 했네요. 팔찌인가요?”
“아, 이거요?”
에스페란사는 금빛 장신구를 두른 손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 시계네! 너무 예뻐요. 로드 에이번데일의 선물이겠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시계니까 누구나 짐작 가능한 부분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쑥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시계라고 하면 펜던트형 시계가 달린 팔찌에 가깝던 시대였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쓸 만하지만 전투 중에나 이동 중에는 영 불편했다.
그 얘기를 들은 시더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시계 제조회사와 결탁을 하더니 이렇게 수상한 시계를 안겨 주었다. 팔찌 형태라 일상에서는 장신구처럼 보였지만, 손목에 맞게 길이를 줄여 착용하거나 뚜껑을 열어서 고정해둘 수 있었다.
“진짜 시계 맞냐고 물었는데 진짜 시계라더라고요. 보다시피 멀쩡히 시간도 확인할 수 있고요.”
“그러네요! 어머, 벌써 세 시잖아?”
코델리아가 난감한 얼굴로 바깥을 흘끔거렸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코델리아가 그렇게 난감해할 방문객이면 종류는 하나뿐이었다.
“구혼자가 오는군요? 누구랬지?”
코델리아에겐 구혼자가 많았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숙녀가 으레 그렇듯 코델리아도 그들의 조건과 됨됨이를 까다롭게 쟀다. 아직까지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난 것 같지 않았다.
“퍼모이 남작 제임스 브룬델이에요. 어릴 때부터 사업에 뛰어들어서 거친 면이 있긴 하지만 부자고, 나이도 그만하면 젊고. 무엇보다 우린 서로 확실히 주고받을 게 있죠.”
“몇 살인데요?”
“스물일곱이요.”
코델리아는 스무 살이고. 그만하면 사교계에서는 큰 나이 차이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늘 나한테 청혼할 것 같아요.”
그 청혼을 받아 줄 생각이었다면 땀을 씻어내지도 않은 채로 차를 마시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벌써 열 명쯤 거절하지 않았어요?”
“오늘로 열 한 명이 되겠네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은 코델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은 내가 결혼 생각도 없으면서 신사들을 헤집어 놓는다고 말하죠. 하지만 난 정말로 모든 구혼자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어요. 조건이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마음이 동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시더가 그런 말을 하던데…….”
“로드 에이번데일의 의견은 별로 필요 없는데.”
“저번엔 도움이 됐잖아요?”
멀쩡해 보이던 놈이 사실 도박 중독이라 물밑으로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청혼은 거절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평판이었다. 평판이란 것은 물에 탄 물감과도 같아서, 그런 사람은 오래 엮이는 것만으로도 남의 평판에 나쁜 물을 들인다.
“아무튼, 무슨 말을 했냐면요. 당신이 앞으로 열세 명쯤 더 거절하더라도 아무 문제도 없을 거래요.”
“그야 그렇겠죠. 신의 방패를 세워 두고 있으니.”
스털링 사건 이후,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처음 사교계에 등장했을 때. 그는 일약 최고의 신랑감으로 떠올랐다. 스털링에서 일어난 재난을 보고도 사람들은 스털링 백작에게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코델리아에게 청혼했을 때, 결혼 시장에서 코델리아의 가치는 그야말로 ‘상한가’에 도달했다.
고작 그런 것에 휘둘리는 가치란 얼마나 얄팍하고 덧없는 것인가? 그러나 아직 코델리아는 그것이 필요했다. 알라스테어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알라스테어는 2년 동안 여전히 코델리아의 구혼자였고, 그런 ‘신의 방패’가 있는 이상, 누구도 코델리아가 다른 구혼자들을 거절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뒤에서 욕은 좀 하더라도.
“당분간은 방패를 더 세워 둘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할머님은 벌써부터 이럴 거면 던바틴 놈이랑이라도 결혼하라고 성화시지만…… 난 정말 모르겠단 말이에요.”
마음이 굳어 버린 걸까? 코델리아는 가슴께를 조심스레 눌렀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확신했어요? 이 사람이다, 하는 거.”
뜻밖의 질문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언젠가부터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을 뿐이다.
“난 그냥 정신 차려 보니까……”
예상대로 원망스런 눈초리가 꽂혀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매만졌다.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서로 돕고, 고민하고, 좀 싸우기도 하고? 같이 넘긴 위기도 많고요. 그런 게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그럴 지도요.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나는 당신이 지금까지 거절한 구혼자들도 전부 아직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만 봐도 싫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에스페란사가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라고 첫눈에 반한 건 아니거든요.”
코델리아는 조심히 다시 소파에 앉았다. 생각이 많아진 듯, 입을 다문 채 붉은 찻물에 비친 자기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코델리아의 속에 어떤 풍랑이 몰아치든, 응접실은 어쨌거나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아가씨!”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이게 무슨 일이니!”
바로 ‘아가씨’ 얼굴로 돌아간 코델리아가 하녀를 훈계했다. 하녀는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칼이 흘러내리도록 고개를 저었다.
“백작 부인, 댁에서 급하게 온 소식이에요. 에이번데일 백작님께서 쓰러지셨대요!”
“뭐?”
에스페란사가 멍하니 되물었다. 머리가 커다란 종이 된 것 같았다. 한번 두드리면 한참 동안 진동이 멎지 않는 종. 어지러웠다.
“방금 댁에서 하인이 왔는데, 백작님께서 쓰러지셨다고……. 하인은 지금 지쳐서 쉬고 있어요.”
“왜, 무슨 일로?”
듣고만 있던 코델리아가 냉큼 물었다. 하녀가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그것까지는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는데…….”
“그것까지 듣고 왔어야지! 아니지, 당장 그 하인에게, 에스페란사?”
하녀가 입을 떡 벌렸다. 코델리아가 몸을 돌렸을 때, 에스페란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응접실 창문을 타고 넘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가씨, 방금 백작 부인이!”
“쉿. 방금 넌 아무것도 못 본 거야. 하인은 적당히 쉬면 돌려보내도록 해. 알았지?”
코델리아가 그렇게 입단속을 하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날듯이 나인 호더를 가로질렀다.
어퍼 레인 한 가운데에 있는 마벨우드 저택은 에이번데일 저택과 그리 가깝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에이번데일 저택이 구석에 박혀 있는 탓이었는데, 에스페란사는 그 사실이 오늘처럼 통탄스러운 적이 없었다.
건물을 뛰어넘고 달리는지 나는지 모를 정도로 허공을 짚어 저택에 도착했다. 도저히 뛰어서 갈 거리가 아니었으나, 머릿속에서 ‘백작님이 쓰러지셨대요!’ 하는 하녀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돌아가고 있는데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 마차도 없이 어떻게…….”
“방에 있어?”
앞뒤 다 자르고 묻는 말에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페란사는 하인을 지나쳐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계단을 달려 올라가면서 뒤늦게 창문으로 들어가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반 박자 늦게 돌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침실 문 앞에 선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