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5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2)
나무로 만든 무거운 문이 쾅, 하고 벽에 부딪혔다. 부르르 떨리는 문을 뒤로하고 에스페란사는 큰 보폭으로 걸어 시더가 있는 침대맡에 섰다.
다행히 보기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가벼운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금방 오셨네요! 잘 오셨어요. 백작님은 무사하시대요.”
“부인, 정말 천운이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시답니다.”
럭스 부인과 하워드 집사가 에스페란사를 달래듯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쓰러졌다면서요?”
“네. 어쩐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금방 일어나셨습니다. 방금 진찰도 마쳤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실례지만, 어디의 숙녀분이신지?”
하워드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잘못 들었나?
모두가 똑같은 얼굴이었다. 놀랍게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 말을 한 장본인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이어서 물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배, 백작 부인, 제가 얼른 진찰을 다시 하겠습니다! 정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분명히 기계가…… 백작님, 피를 좀 뽑겠습니다.”
거대한 주사기로 피를 잔뜩 뽑은 의사가 왕진용 가방에서 기계를 꺼냈다. 스위치를 누르고 피를 붓자 기계의 머리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기계가 진단 결과를 토해 내는 사이, 의사는 처음부터 다시 진단을 시작했다.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의사의 판단이 정확했다.
지금의 시더 클라이번은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에스페란사는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마치 외부인처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손 안이 축축했다. 피를 뽑는 동안에도, 우악스런 진찰 기계가 다친 머리를 훑는 동안에도 시더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냉랭한 경계를 세운 채 에스페란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아직 너의 정체를 추궁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거기엔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역행성 기억상실증입니다.”
한참 후에, 의사가 선언하듯 말했다. 물론 모두 짐작했던 결론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어렴풋이 ‘역행성 기억상실증은 이런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쓰러지시기 전에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에 물리적인 충격을 받아 기억 일부가 손상된 것 같은데, 아마도 일시적인 현상일 겁니다.”
물론 의사는 정신과 전문의도 아니었고, 이 시기의 의학 수준으로는 기억상실증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었다.
‘기억의 일부가 손상된 것 같다…….’
“백작님, 오늘이 며칠인지 아십니까? 연도까지 정확히요.”
시더는 별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저택은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시더 클라이번의 기억은 1837년에 멈춰 있었다. 하필이면 에스페란사가 이 세계에 도착하기 이틀 전. 자그마치 3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그, 금방 기억을 되찾으실 겁니다!”
의사는 자기에게 불똥이 튈세라 열심히 변명했다. 에스페란사는 의사가 휘두르는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려 서재로 달려갔다. 서재에서 가져온 것은 대단히 불길한 보라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이거, 발라서 해결될 것 같진 않고, 먹어야 될 것 같아요.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시더는 의사에게 시달리느라 조금 피로해진 낯으로 미소 지었다.
“당신의 뭘 믿고?”
다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냉랭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럭스 부인과 하워드 집사가 의사를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제때 피신하지 못한 밀런이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에스페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못 믿겠지. 못 믿는 게 당연하겠지.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귀신같이 나만 잊어버렸다고?’
엄연히 말하면 3년을 통째로 잊은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에스페란사가 이곳에 오기 딱 이틀 전에 기억이 멈춰 있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 게다가 다른 부분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도. 이 시기의 의학 기술로 발견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에스페란사가 보기에도 시더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이렇게 멀쩡한데 콕 집어서 나만 잊어버렸단 말이지.’
다치길 바라는 건 결코 아니지만, 다치기라도 했으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텐데.
“그래서, 어디의 백작 부인이시라고 했죠?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한 듯, 시더가 다시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에이번데일 백작 부인이에요.”
‘아, 그렇군요.’ 하는 순순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좀 놀라 보라고 던진 말이니까. 되돌아온 답도 만만치는 않았다.
“죽은 아버지가 도둑 결혼이라도 한 건 아닐 테고.”
“상상력 한번 끝내 주네요.”
원래 이런 인간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어제까지도 그는 이런 인간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고 성격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에스페란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시더는 밀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3년이 지났고 심지어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당연히 외부인의 주장은 믿을 수 없었다.
“밀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만.”
당장 도망치고 싶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한 밀런이 슬그머니 방문을 향해 발을 끌었다. 다행히 시더는 그 모습을 지적하는 대신 에스페란사에게로 눈을 돌렸다.
혼란스러운 빛이 조금 가라앉고 경계심만이 들어선 눈빛. 시더가 그런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본 것도 벌써 까마득히 오래된 일이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알면서도 새삼스레 섭섭해질 만큼이나.
“걸음걸이만 봐도 당신이 숙녀가 아니란 건 알겠어요. 그럼 나는 당신의 뭘 믿고 결혼을 했을까요?”
진짜 듣자 듣자 하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결혼하자고 한 건 당신인데. 죽은 뇌세포한테 물어보든가.”
“결혼 계약서가 있겠죠. 그걸 보면 금방…….”
“없어요, 그런 거.”
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에도 태연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없다고요? 내가 그런 밑지는 결혼을 했다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지, 그는 몰래 빠져나가는 것에 거의 성공한 밀런을 향해 물었다.
“밀런, 내가 3년 동안 미쳐 있다가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아니겠지?”
“제 눈에는 똑같아 보이셨습니다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좀 덜 멀쩡한 모습이셨죠.”
“내가 그렇게 멀쩡했다면, 다 생각이 있었겠지. 그럼 결혼 얘기는 됐고.”
시더는 밀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말 없는 질책을 건네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정말 다친 곳이라곤 없는 듯한 모습으로 에스페란사와 밀런을 지나쳐 문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요?”
“서재에요. 설마 따라올 생각은 아니죠?”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자는 곧 아무 말 없이 등을 휙 돌렸다.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시더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불안감인지 확정 짓기에 그는 아직 지금의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그는 밀런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하고는 곧 서재로 향했다.
익숙한 문을 열어젖힌 순간, 걸음이 우뚝 멎었다. 익숙한 문 뒤의 익숙한 공간은 그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서재가 왜 이런 꼴이 된 거지?”
“미쳐 있던 백작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만.”
백작 부부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아도 된다면 아무래도 좋은 밀런이 아까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저 책상은…….”
“백작 부인이 쓰시던 거죠.”
정말로 무슨 생각이었지? 시더는 갈수록 잃어버린 기억 속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그는 스물다섯 살 시더 클라이번의 기억으로 3년 후의 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미래라.”
3년 후의 세계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빠른 걸음으로 책장 앞에 선 그는 익숙한 위치에서 연도별로 정리된 학술지를 발견했다. 마법 전반에 대한 연구가 실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그리고 마도 공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술지 두어 개. 월별로 3년 치를 다 읽어볼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책장에 기대서서 초록만 훑어보았다.
비어 있던 책장에 다 읽은 학술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햇빛이 드러났다. 잊은 게 없냐고 재촉하듯이 종이를 찔러대는 햇살에 검은 잉크가 하얗게 빛났다. 눈을 찡그리며 책을 덮은 시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동안 변한 게 없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뒤졌건만 혁신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본인의 연구 자료로 향했다. 외부에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그가 3년 동안 연구를 쉰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방대한 자료 중 몇몇 개를 뽑아 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시더 클라이번 하나는 멀쩡히 연구한 모양이다.
시더는 망설임 없이 옆방으로 넘어갔다. 빈 서재에 홀로 남은 밀런은 마구잡이로 뽑아 놓은 학술지를 정리하기 위해 사서 오토마톤을 작동시키고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