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6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3)
서재와 벽 하나로 나뉘어진 연구실은 3년 동안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연구 보조용 오토마톤이 몇 개 늘었고, 한쪽 벽에는 정교한 모형 무기들이, 다른 쪽 벽에는 알 수 없는 생물의 이빨과 가죽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정말 3년 사이 분야를 바꾼 건 아니겠지?’
시더는 연구실을 조금 더 뒤적거렸다. 어쨌든 어제까지의 자신도 같은 사람이기는 했던 모양이라 시더는 기계의 쓰임새나 물건을 정리하는 방식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게 있겠다 싶은 곳에 그런 것이 있었고, 이렇게 쓰겠다 싶은 것은 그렇게 쓰는 물건이었다.
물론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 물건들도 있었다.
‘이건 아까 그 ‘백작 부인’이 가져온 병과 같은 건데.’
수상한 색의 약물이 담긴 병들 사이에서 아까 보았던 병을 꺼냈다.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그는 곧 손 닿는 곳에 있는 책장에서 마법 약학자의 보고서를 찾았다.
몇 가지 의심스런 표현들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이 물건이 약에 가깝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보고서가 조작되었을 경우와, ‘백작 부인’이 병을 건드렸을 가능성을 별론으로 하고 본다면.
그는 자신이 고작 3년 사이에 멍청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모든 걸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옆 칸에는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는 병이 있었다. 특별히 조심스럽게 보관된 그 병 안에 있는 액체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람 피인가?’
정말로 3년 동안 제대로 미쳐서 징그러운 생물학 실험 따위를 한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런 건 따라 할 수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까.
다행히 그는 이 피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있었다. 시더 자신의 자필 기록이었다. 불행한 부분은, 그 피가 정말 사람의 피였다는 것이다. 시더는 한숨과 함께 기록을 넘겼다.
기록은 시더가 일반적으로 쓰는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마치 가죽의 마력투과율을 계산하듯 마력량과 투과율이 기록되어 있었다.
눈을 두 번 비비고 볼 만큼 엄청난 수치였다. 고작 피 한 병에서 그만한 마력이 나온다면, 한 사람의 피에서 뽑을 수 있는 최대 마력량은 3천만 토트 정도. 말도 안 되는 양이었다.
고작 한 병으로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을지 눈앞에 벌써 수많은 가능성이 보이는 듯했다.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던 것들, 또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어야 했던 것들. 미래의 그는 대단한 행운을 거머쥔 것이 틀림없었다. 한 2년쯤 일찍 나타나 줬어도 좋았을 행운이다.
피에 대한 기록은 그게 끝이었다. 다음 장에는 채혈 시간과 통증을 줄이기 위한 주사기의 그림 따위가 있었다.
‘이런 걸 왜 하는 거지? 아프든 말든.’
원래 살에 바늘을 꽂으면 아프게 되어 있다. 억지로 꽂은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은가? 하긴, 이렇게 마력이 충만한 피를 가진 사람이라면, 편의를 보아주지 못할 것도 없다.
시더는 기록을 내려놓고, 옆 방으로 이어진 문으로 향했다. 이 문은 그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빈방을 터서 연구실을 하나 더 만든 것 같았다. 그는 별 기대 없이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아주 익숙한 기계가 나타났다. 방 안 가득히 얽히고설킨 진공관과 톱니바퀴. 오래전 그가 스스로 버렸던 발명품이었다.
“시공간 기계…….”
장난삼아 품었던 의문이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대체 지난 3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시더는 천천히 기계를 향해 다가갔다.
시공간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기계. 그는 이것을 아주 어린 나이에 완성했다. 요행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손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렸다.
놀란 감정을 가라앉히고 보니, 눈앞의 기계는 그때와 같은 부품을 쓴 같은 기계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새로운 부품으로 이 기계를 재창조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연구한 티가 물씬 났다. 마력 안정화를 위해 붙은 몇 가지 부수적인 기계들. 좌표 측정을 위한 복잡한 해석 기관.
그리고 사람 한둘이 들어가면 꽉 찰 듯한 유리관. 이상한 것은 제어반이 기계를 등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불편한 설계를 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방에서 시간을 더 쓰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곧 문을 닫고 나왔다.
서재 공간으로 도달한 시더는 문득 생각했다.
시공간 기계. 피. 책상.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백작 부인.’ 지금까지 변수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가설을 확인해 보기 위해 연구실로 향했다. 아까 스치듯 보고 지나간 모형 총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전체적인 모양만 봐도 공산품은 결코 아니다. 어떤 특정한 버릇이나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맞추어진 물건이었다. 크기 역시 체격을 고려해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면, 그의 가설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온다.
시더는 모형 총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새로 들인 책상을 마주 보는 자리. 습관처럼 앉은 자리가 그가 어제까지 앉던 곳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3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백작 부인’과 공간을 공유할 정도의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 그 신뢰는 아까 본 피나 시공간 기계와도 관련되어 있을 테고.
여전히 시공간 기계를 다시 만들어야 했을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기억을 잃은 김에 다시 가져다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자신이 한 일이니 뭔가 생각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밖에는.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 ‘백작 부인’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시더는 그의 책상으로 향했다.
찾는 것이 어디쯤 있을지 고민하기도 전에 손이 습관처럼 뻗어졌다.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서랍 안쪽의 상자에서 뜯어진 편지 봉투 몇 장이 나왔다. 첫 한 줄을 읽는 순간 글을 쓴 사람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에스페란사.”
이 나라 사람이 아닌가? 그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묘하게 입에 익은 기분이 든다. 3년간, 이 이름을 아주 많이 불렀던 것 같았다.
* * *
밤이 될 때까지 시더는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럭스 부인이 발을 동동 굴리며 음식을 가져다주고 나왔다.
“부인, 그래도 부인께서 들어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날 기억 못 하잖아요. 지금은 럭스 부인이 갔다 오는 게 나아요.”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이 안 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상처 없이 멀쩡하다고 해도 기억이 날아가는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불편해서 안 나오는 거겠죠.”
“백작님이라면 그냥 잊어버리셨을, 앗. 죄송해요!”
“아냐, 애니.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하고 뭐고 의식할 만큼 존재감도 없는 것이다. 지금쯤 자기와 똑같은 머리를 가진 천재가 3년 동안 이루어놓은 업적을 감상하느라 정신없겠지.
바로 어제까지의 시더에게는 연구보다 에스페란사가 더 중요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닌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그렇다. 차라리 마음이 식었다면 욕이라도 하지, 기억이 날아가 버리다니.
‘아니지. 기억이 날아갔다고 욕을 못 할 건 없지.’
얄미운 인간 같으니라고. 누굴 보고 이 세계에 남았는데 자기는 3년 만에 기억을 싹 날려 버려? 다른 덴 다 멀쩡하면서 기억만?
……기억이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럭스 부인, 약은 먹는 것까지 보고 나왔죠?”
“그럼요.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도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고 했잖아요. 분명 주무시고 일어나면 기억이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치만, 그 사람은 안 자잖아요.”
“아…….”
“적당히 하고 자라고 말이나 해 줘요. 안 듣겠지만.”
“부인도 일찍 주무셔요. 테이트 양, 가자꾸나.”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 마시고 얼른 주무세요, 아가씨, 아니, 부인.”
“너는 도무지 그 호칭 실수를 고칠 생각을 않는구나.”
“입에 붙어서요.”
에스페란사는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피곤했던 걸까. 잠이 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대가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돌렸다. 허공을 더듬어 보니 셔츠 자락이 손에 잡혔다.
익숙한 체온을 양팔로 끌어안은 에스페란사가 품 안에 파고들었다. 정말 피곤한 날이었다. 던전 두 개를 연이어 해결한대도 오늘만큼 녹초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기억상실증이라니…….
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힘겹게 뜬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보이는 윤곽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늘 미소를 머금고 있던 뺨이 굳어 있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같았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부드럽게 에스페란사를 밀어냈다. 힘을 전혀 주지 않았지만 에스페란사는 쉽게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