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7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4)
시더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불그스레한 빛이 침실을 밝혔다. 침대에 앉은 에스페란사의 흰 잠옷 위에도 빛이 고였다. 그 빛을 보며 에스페란사는 정말로 시더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제까지의 그였다면 정말 급한 일이 아닌 이상 잠든 에스페란사를 깨우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시더와 에스페란사의 관계는 결코 첫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경험과 교감이 켜켜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둘 사이에 그것이 없다면……?
“에스페란사.”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에스페란사는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시더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근본적으로 당신이 누군지부터 알아야겠어요.”
하지만 에스페란사만 쏙 잊어버린 얄미운 시더 클라이번에게 모든 걸 다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다행히 이럴 때 쓸 만한 설정도 있었다.
“그러니까 난 당신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였던 마이클 헌터 씨의 딸인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안 통하는구나. 하긴, 본인이 만든 설정이니까.
“그거 말곤 할 말 없어요. 어차피 기억이 돌아오면 알게 될 텐데 좀 참지 그래요?”
시더는 눈을 찡그렸다.
귀족도 아니고, 이 나라 사람도 아니고, 아마 식민지 출신도 아닐 거고. 높은 확률로 연고도 없다. 당연히 식민지 사업 파트너 운운은 싹 거짓말일 테고. 시더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난 대체 어디서 당신을 만난 거죠?”
그게, 내가 이 집이 폐가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에스페란사는 눈을 굴렸다.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설명을 못 할 일인가요?”
“좀 복잡해요.”
그걸 설명하느니 그냥 시더의 자연 치유력을 믿어 보는 게 나았다.
“좋아요.”
뜻밖에도 선뜻 그렇게 말한 시더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실험실의 피는 당신 건가요?”
“맞긴 한데, 지금 그게 궁금해요?”
자기 3년간 기억이 싹 날아간 이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2년 동안 결혼 생활 중이었다는데도?
“중요하니까요.”
“그게 중요하구나…….”
슬슬 섭섭함도 답답함도 가라앉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시더도 아까처럼 경계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벌써 3년이나 됐지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이런 식이었다. 막무가내에 살짝 상식도 없어 보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시공간 기계 연구도 당신과 관련돼 있고?”
“말하자면 그렇죠?”
“총도?”
“무슨 총? 아. 이거요?”
에스페란사는 보란 듯이 허공에서 총을 꺼냈다. 개머리판부터 금빛 총구까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거꾸로 꺼낸 장총을 본 시더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보여 줘요.”
첫 만남과 같은 상황이다. 그 첫 만남은 시더가 기억하는 날로부터 고작 이틀 후였다. 그러니까 아마 이걸 내밀면……. 흥미롭다는 듯이 총을 매만지던 시더가 돌연 총구를 에스페란사의 턱 아래에 겨누었다.
‘이렇게 되겠지.’
“안 무서운가 보죠?”
“내 총이니까요. 그러는 당신은 내가 안 무서운가 봐요.”
“당신이 날 다치게 할 것 같진 않군요.”
“그건 또 어떻게 믿는데요?”
포션은 못 마시면서. 웅얼거리는 소리에 시더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서재를 봤어요. 연구실도.”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시더는 턱 끝에서 총구를 조금 내리며 물었다.
“마도구 없이 마력 발산도 가능한가요?”
손으로 총구를 밀어낸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빈손으로 희끄무레한 빛을 몇 개 띄워 보였다.
“이런 것밖에 못 하지만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다양한 마법을 배웠겠지만, 에스페란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몸으로 해결하는 쪽을 선호했으니 별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시더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으니까. 불확실한 신분이고 수상한 행적이고 다 상관없어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시더는 만족했다는 듯이 총을 내려두었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다시 허공에 던져 넣고는 픽 웃어 버렸다.
“정말 똑같네요.”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그때도 그랬어요. 처음 만났을 때. 내 총을 보여 달래서 줬더니 이렇게 나한테 들이댔다니까요. 배은망덕하게.”
에스페란사는 그때 무장한 주거침입범이었지만……. 시더만 모르면 된다.
“그땐 사과도 못 들었는데.”
무장한 주거침입범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이상한 일이죠. 난 당신을 전혀 모르는데, 기억에 없는데, 당신 그 얼굴을 보니 나한테 불리한 걸 숨기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기억은 홀라당 까먹어 놓고 눈치는 멀쩡한 건 좀 반칙이다. 에스페란사는 짐짓 눈을 치떴다.
“그래서 사과를 안 한다고요?”
“대단히 유감스럽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숙녀분. 물론, 용서하시겠지만.”
그는 보란 듯이 허리를 숙여 절을 하며 말했다. 눈높이를 맞춘 채 빙그레 웃는 얼굴이 아주 익숙해서,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시더의 뺨을 쥐었다.
그러나 들여다본 눈동자에는 의문뿐이었다. 괜한 기대였다. 한숨을 흘린 에스페란사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질문 끝났으면 잠이나 자요. 럭스 부인 말마따나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더는 말없이 불을 꺼 줬다.
커다란 침대에는 한 사람이 더 누울 자리가 남아 있었으나, 시더는 몸을 돌려 나갔다. 숙녀와 한 침대를 쓸 생각은 없었다. 미래의 그는 선뜻 그랬던 모양이지만.
돌연변이 마법사를 위한 부부 놀이였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서재로 돌아간 시더는 서랍을 조금 더 뒤져 보았다. 그러다 연구 노트 사이에서 쓰다 만 편지를 발견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 기억에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 지면에 장난스레 수놓은 말들은 가감 없는 진심이었다.
“정말 곤란하게 됐어.”
편지 가장 윗줄, 이름을 대신해 적은 애칭을 손바닥으로 가려 버린 시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마법사’. 미래의 시더 클라이번은 무슨 심정으로 이 말을 썼을까?
* * *
아침 8시.
시더 클라이번이 일어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다.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두 번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아 밀런에게 다시 물어보았지만 정말로 아침 8시였다. 8시에 자러 간 적은 있지만 일어난 적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엔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명료했다. 3년간의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만 빼면.
새벽까지 읽었던 연구 자료들을 대충 집어넣어 둔 그는 1층으로 향했다. 럭스 부인이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백작님,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군요? 기억은 좀 어떠세요? 아프신 곳은 없고요?”
“아픈 곳은 없고, 기억은 아직도.”
“그렇군요…….”
잠시 울상을 지었던 럭스 부인은 그에게 아침을 권했다. 하지만 거절해도 그러려니 하는 걸 보아 3년 후에도 아침 식사를 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스페란사는?”
“어머, 기억은 그대로라고 하셨으면서? 백작 부인께선 사격장에 계세요.”
하긴, 그런 총을 가지고 있다면 사격도 잘하겠지.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총을 떠올려 보았다. 서재의 모형 총과 같은 모양이었다. 내부 기관까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보나 마나 그가 직접 만든 물건이겠지. 그것보다 나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궁금해졌다. 마법사의 전투는 어떨까?
호기심을 억누를 필요는 없었다. 시더는 곧장 사격장으로 향했다.
마력탄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오는 곳.
문을 연 그는 멈칫했다. 그가 기억하는 사격장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벽면의 레일을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과녁. 입에서 사진을 줄줄 뱉어내는 사진기. 점수판의 숫자가 멈출 새 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장애물을 뛰어넘어 금빛 총신을 날렵하게 겨누는 여자. 탄알이 과녁에 박혔음에도 멈추지 않는다. 속도, 정확도, 파괴력.
혀끝이 말랐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억에 없는 시간에 그가 왜 에스페란사에게 반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걸 보면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면 시력보다 지능을 의심해 봐야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짝 더 내디딘 순간, 총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빛 머리칼 한 가닥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이라도 움직였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 갑작스런 공격에 익숙했다.
물론, 그는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었지만, 3년 동안 총알 밭에서 구르지 않은 이상 그사이 그런 능력을 터득했을 리 없고. 이건 단순히 에스페란사가 능숙히 빗맞힌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걸 ‘알고 있었다.’ 위험으로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장난이 자주 있었다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유쾌하기 짝이 없다. 걸음걸음마다 새롭고 놀라운 일들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