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8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5)
“대단한 조준력이군요.”
“빗나간 거라고는 생각 안 하나 봐요!”
흥분이 남은 목소리가 말꼬리를 물었다. 시더는 태연히 되물었다.
“빗맞힐 실력인가요?”
“그럴 리가요.”
총을 허공에 던져 넣은 에스페란사가 오토마톤을 끄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나로 묶은 머리칼이 허리에서 흔들거렸다. 이마와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을 보자, 시더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런 습관이 있었군.’
에스페란사 역시 익숙하단 듯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가 멈칫했다.
“그냥 써요.”
“이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 것치곤 익숙해 보이는데.”
“나한테 손수건을 주는 건 친절이 아니죠. 친절은, 다른 사람들한테 베푸는 거고. 그것도 어제, 아니 그제까지의 일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적당히 훔쳤다. 그러는 동안 시더는 안으로 들어가 오토마톤을 구경했다. 기억이 없어도 이 많은 오토마톤들을 그가 직접 제작했으리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고장 났군요.”
하나하나 훑어보던 중, 움직이지 않는 오토마톤을 발견했다.
“아침에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야죠. 누가 만든 건데.”
“기억도 없으면서.”
“기억이 없어도 내가 만든 건 알아봐요.”
에스페란사는 못 알아봤으면서, 오토마톤은 알아본다고? 속이 뒤틀렸다.
“고쳐 줄까요?”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면서 묻는 말에 에스페란사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남편이 오면 고쳐 달라고 하면 돼요.”
시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억을 잃었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요?”
“나한테는 그래요. 그 기억이 없으면.”
그건 두 사람이 쌓아 온 기억이다. 시더는 이 세계에서 에스페란사가 누구인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이름을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건 절대 변할 수 없다.
기억을 잃었다고 애정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지만, 그 기억을 가진 시더와 나눴던 것을 지금도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미운가요?”
“미운 건 아니고…… 얄밉긴 하죠. 뭔 되도 않는 사이비 같은 학회에 얼굴 비췄다가 뭐에 얻어맞고 내 기억만 싹 잊어버렸는데 안 얄밉게 생겼어요?”
“사이비 같은 학회? 내가 그런 데를 갔단 말이에요?”
“아,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죠. 내가 기억을 잃은 원인인데.”
시공간 기계와 관련한 연구 발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척 봐도 수상한 학회에 참석했다가 발표자 하나에게 시비가 걸려서 습격을 당했다……는 게 밀런의 설명이었다. 그날 발표한 이상한 기계로 공격을 했는데, 다친 곳이 없어서 방심했다고.
에스페란사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학회 쪽에 연락을 넣어서 기계 구조도라도 내놓으라고 윽박을 질렀지만, 편지로 하는 협박이 얼마나 먹힐지는 두고 봐야 했다. 협박이 먹히더라도 시더가 기계를 분석해서 결과를 내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시공간 기계 연구 얘기는 자세히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에스페란사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렇대요. 나도 들은 거예요.”
“나한테 불리한 걸 숨기고 있죠? 당신은 얼굴에 드러난다고 했잖아요.”
“왜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기억하는 건데요?”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얄미웠다. 에스페란사는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한 대만…… 한 대만 때리면 안 될까? 잘 때리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기억은 없지만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게, 내가 당신과 3년을 같이 지내기는 했나 봐요.”
에스페란사의 주먹을 손등으로 덮어 시야에서 가려 버린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여하튼, 나는 뭔지 모를 사이비 학회에서 습격을 받아서 지난 3년의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당신은 기억을 잃은 나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비슷하잖아요?”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내가 저 오토마톤을 고치도록 허락해 줄래요?”
어젯밤엔 목에 총을 들이대던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호의적으로 나온다. 솔직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지…….’
애써 이해하려 들 필요 없었다. 대신 에스페란사는 다른 부분을 물었다.
“만든 기억도 없으면서, 3년 후의 자기가 만든 걸 고칠 수 있어요?”
그때까지 여유롭던 시더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건 굉장히 모욕적이군요.”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남편이 나만 홀랑 까먹어 버린 것보단 덜 모욕적일걸요.”
“……저런, 유감이네요.”
시더는 불리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대신 말을 돌렸다.
“어쨌든, 저걸 고치려면 당신 말대로 구조도를 확인할 필요는 있겠어요.”
고치게 해 주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
그러나 시더는 앞장서겠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갔다. 청소용 오토마톤을 켠 에스페란사가 그 뒤를 따라갔다. 이번에는 ‘설마 따라올 생각은 아니죠?’ 같은 말은 없었다.
서재에 도착하자 시더는 바로 연구 자료를 헤집었다.
“이쯤에 있을 것 같더라니.”
불규칙하게 정리된 자료들 사이에서 용케 원하는 것을 찾아낸 그가 소파에 앉았다. 에스페란사는 그 모습을 맞은편의 자기 전용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실내화를 벗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뭐 하는 거죠?”
기록을 넘기던 시더가 멈칫하고 물었다.
“뭐가요?”
“지금, 맨발이잖아요. 게다가 소파에 발을 올리고 있고요.”
“그럼 내가 당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자세도 바꿔야 돼요?”
“원래 그런 자세로 소파에 앉는다고요?”
“그런 지 3년 됐어요. 처음에도 그런 반응이긴 했는데 금방 익숙해지더라고요.”
“그것참, 위로가 되는군요.”
시더는 혀를 차고는 다시 기록으로 시선을 내렸다. 에스페란사는 몇 달 전에 사귄 새 친구의 편지를 뜯어서 읽기 시작했다.
서재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하워드가 멈칫했다. 마주 보는 소파에 앉은 두 사람. 각자의 일에 열중해 있었다. 어제의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간혹 읽던 것에서 눈을 떼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없다는 것만 빼면.
“백작님,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신 게 맞습니까?”
“아직은.”
“그러면…… 백작 부인, 시연회는 어떻게 되는지요?”
에스페란사의 손에서 편지가 팔랑 떨어졌다.
“그러네. 시연회가 있었네……?”
이거 아주 큰 일이다.
“설명이 필요한데.”
“그러니까, 당신 내일모레 여왕이랑 갈리스턴 앞에서 무슨 교수랑 같이 기술 시연회를 해요.”
“굳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게 된 이유라도 있나요?”
“군부 일을 3년 동안 거절하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충성심을 보여 주는 쇼라고 할 수 있겠죠.”
어차피 여왕도 갈리스턴도 그에게 충성심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그런 쇼가 필요한 법이다.
“물론 둘만 오는 건 아니고 여왕의 시녀들이랑, 템프턴 수상이랑, 이런저런 높으신 분들. 뭐, 아무튼 그래요. 작은 규모는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그 기술이 뭐죠?”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도 몰라요.”
시더는 그 기술의 정체를 에스페란사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끝까지 비밀을 고수하기에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몰래 뒤져 보기라도 했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정체도 모른단 말인가요?”
“네, 전혀. 무슨 교수랑 하는 시연회인지도 몰라요.”
“짐작 가는 것도 없어요?”
“난 원래 그쪽은 전혀 몰라서요. 저쪽에 요즘 당신이 건드리던 연구 기록들이 있긴 한데, 그 연구는 이미 끝난 거라고 했거든요.”
“시연회를 하려면 그렇겠죠.”
“그럼 아마 연구 자료도 이미 정리해서 넣었겠네요.”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시연회를 3일 앞두고 그 사이비 학회에 혼자 들락거린 시더 클라이번 잘못이다.
“그럼 기억을 찾는 것밖에 방법이 없군요?”
그리고 기억을 찾으려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을 공격한 그 기계를 분석해서 역으로 해결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구조도가 내일 도착한다고 해도…….”
“밤을 새우더라도 이틀 만에 남의 기계를 분석하고 그 기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밝혀내는 건 어렵겠죠.”
그 기계가 정말 무슨 짓을 하기는 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냥 뒤통수를 얻어맞은 시더 클라이번이 알아서 기억을 깜빡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러니까 결국은 포션을 먹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당신의 뭘 믿고?’ 따위의 대꾸를 했던 어제와 달리 시더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거, 어제 기록을 읽어 보니 섭취 시에는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고 되어 있던데 제대로 된 약은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