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49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6)
“고통이 있다고요? 그런 얘긴 처음 들어요. 내가 먹어 본 게 아니라서…….”
정신질환에까지 듣는 포션은 그것 한 종류밖에 없었다. 에스페란사가 가져왔던 포션이 아직 몇 병 남아 있었지만, 이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잠깐만요.”
에스페란사는 연구실로 달려갔다. 다급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더는 불안한 얼굴로 문 뒤쪽을 흘끔거렸다. 뭔가 깨뜨리는 건 아니겠지?
“아, 하워드. 연구 내용은 자네도 모르지? 밀런도?”
“예. 아무도 모를 겁니다. 백작님 혼자 하시던 연구니까요. 지금으로서는 기억을 되찾으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시더는 기억을 찾는 일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지금도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그 자체로 흥미로웠고, 3년 동안 쌓인 연구 자료를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갔다. 게다가 이렇게 특정 시기의 기억만 깨끗하게 사라지는 경우도 굉장히 드물 것 아닌가? 지금의 이 희귀한 상태를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왕까지 오는 시연회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가는 것도 안 될 일이다.
군부 일을 안 하게 된 이유가 시공간 기계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괜히 왕실 눈 밖에 날 이유는 없었다. 수상까지 참석하는 자리인 것을 보면 상원에 결석한 부분까지 아울러 처리하려던 것 같기도 하고.
여왕에게든 수상에게든 주기적으로 그를 이용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포션은 보류하는 게 좋겠어요.”
연구실에서 나온 에스페란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뺨이 아까보다 조금 창백한 것 같았다.
“효과가 없다고 하던가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기절할 정도로 고통스럽대요.”
보고서를 받아든 시더가 종이를 몇 장 넘겨서 결과 부분을 훑었다. 실험체의 8할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기절했다. 남은 2할도 상당한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고 보고했다. 운이 좋아도 ‘상당한 고통’이고 운이 나쁘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이다.
하지만 죽는 것도,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것도 아니다. 3년의 기억에 기절할 정도의 고통이면 그럭저럭 등가교환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단호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내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던 게 아니었나요?”
“이런 방법으로는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진짜.”
생각 외로 강경한 거부 반응에 놀란 시더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한 듯, 에스페란사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고전적인 방법부터 써 보죠, 뭐.”
그래서 꺼내든 게 사진첩이었다.
“이걸로 되겠어요?”
“솔직히 안 될 것 같긴 한데 시도는 해 봐야 하잖아요.”
시더는 ‘안 될 것 같으면서 대체 왜?’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에스페란사는 무시했다.
첫 장부터 모르는 사진이다. 시더는 사진기를 만드는 사람이지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만큼 사진이 모인 것도 에스페란사 때문일 것이다.
“글라일리 하우스네요.”
시더는 연구실 발코니에 기대 있었고, 1층에서 그를 발견한 에스페란사가 찍은 사진이었다.
아주 낯선 얼굴이다. 그는 스스로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런 녹을 것 같은, 이미 반쯤 녹아 버린 것 같은 얼굴이라니. 에스페란사가 지금의 시더가 그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도 그럴 만했다.
다음 사진, 그다음 사진.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도 있었고, 시더 혼자 있는 사진은 대체로 에스페란사가 몰래 찍은 것이었다.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찍은 듯한 사진도 있었는데, 처음 몇 장은 피사체가 흔들려 있었다. 사진첩에 넣을 때 그 자신이 꽤나 크게 반발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잘 찍은 사진들은 에스페란사가 찍은 것임이 분명했다. 사진첩을 넘길 때 눈이 반짝였으니까.
“난 사진을 좀 잘 찍는 편이에요.”
“그런 것 같군요.”
사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그는 그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사진들에는 사진이란 것에 있을 리 없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 아주 달고 부드러운, 손에 묻어날 것 같이 선명한 감정이었다.
몇 장뿐이지만 결혼식 사진도 있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사진은 그중 한 장뿐이었다. 몇 장 더 넘기니 아는 사람들과 알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섞여 나왔다. 이 사람들이랑 왜 친해졌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시더는 잠시 지루해졌다.
“코델리아예요. 그러니까, 마벨우드 남작가의 코델리아요. 어쩌다 보니 친해졌는데. 기억 안 나겠죠?”
“전혀요. 당신을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기억이 레이디 코델리아를 보고 돌아올 리가 없죠.”
“마벨우드라고 해도 전혀 생각나는 게 없어요?”
“애석하게도.”
에스페란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린 거기서 친구가 됐어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같이 뭘 좀 찾기도 하고. 당신 기계를 완성하기도 하고.”
“친구가 됐다고요?”
왠지 썩 믿음직하지 않은 말이었다.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못마땅했다.
“그랬죠. 음, 이때 로드 스털링도 만났고요.”
던전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에스페란사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일단 넘어가자.
다음 사진은 벨링엄이었다. 던전 때문이었지만 두 사람은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녔다.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사진을 보고도 시더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진으로는 안 되나? 그럼 이건 혹시 기억나요?”
팔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끌러 내밀었다. 시더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뚜껑을 열었다. 조금 묵직했지만, 눈에 띄는 다른 기능은 없었다.
“내가 준 건가요?”
“일주일 전에요.”
늦은 아침,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시답잖은 농담을 하던 중이었다. ‘손목은 언제 봐 줄 거예요?’ 하고 툭 던진 한마디. 그 말에 내려다본 손목에는 언제 채워 둔 것인지,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계가 있었다.
“웬 선물이에요?”
생일은 지났고, 결혼기념일은 멀었고. 잊고 지나간 기념일이라도 있었나 셈을 해 보았으나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날짜 따져서 주는 선물 재미없어요.”
시더는 그렇게만 말했다. 하긴, 시더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예상치 못한 선물을 불쑥 내미는 편이었다. 에스페란사도 이편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정말 그냥 시계예요?”
“그냥 시계예요.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시더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의심스러워졌지만, 끝까지 숨기기야 하겠나 싶어 더 묻지 않았다. 어쨌거나 시계는 아주 예뻤고, 에스페란사는 그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랬던 것인데…….
“그냥 시계 맞아요?”
시더가 물었다.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당신 말론 그냥 시계래요.”
“퍽이나.”
“그럼 뭔데요?”
“지금으로선 모르겠네요. 분해해 볼 수도 없잖아요. 기억 안 나요.”
에스페란사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시계를 다시 손목에 찼다.
그다음으로는 결혼 선물로 받은 목걸이, 시더에게 직접 채워 줬던 마정석 핀, 여름 나들이 모자까지 나왔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거로도 안 돌아오면 답 없어요.”
모자를 푹 눌러쓴 에스페란사가 소파에 늘어졌다. 넓은 모자 차양이 목덜미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딘가 익숙하다. 시더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은 안개에 덮인 듯 윤곽만 흐릿할 뿐이었다.
“일단 연구 자료나 좀 뒤져 보고 있어요. 보다 보면 갑자기 이거다 싶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봐서 나쁠 것도 없겠죠.”
시더는 기꺼이 예전 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훑어보기 시작했다. 뒤늦게 책상에서 보는 게 편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자리가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한참 누워 있던 에스페란사는 조심히 모자를 벗어 옷걸이에 올려두고 책장으로 향했다. 시더의 다 쓴 노트가 어디에 있을 것 같은데.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연구 자료 몇 개를 밀어 둔 시더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에스페란사의 발끝은 허공에 떠 있었다.
정말로.
흰 치맛자락이 발목을 휘감았다. 시더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천장이 높은 1층 서재 책장의 가장 위 칸에 팔을 기댄 에스페란사는 발끝을 달랑거리며 책을 찾고 있었다. 땅에 발 딛고 선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이젠 별로 놀랍지 않았다. 맨발을 내놓고 다니는 백작 부인도, 아무런 기억도 없으면서 그 모습이 불쾌하지 않은 그 자신도. 아마 기억을 잃기 전에는 의식도 못 할 정도로 익숙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의미로 의식했을지도 모르고.
허리에서 흔들리는 머리칼과 치마 안쪽으로 숨었다 드러나길 반복하는 발끝. 작게 흥얼거리는 낯선 노랫소리. 날카로운 시선과 오차 없이 정확한 저격. 걸음걸이부터 생각까지. 이 마법사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이고, 그는 그런 부분이 싫지 않았다. 닦아 놓은 듯한 감정의 길로 이끌려 가는 기분도 오히려 기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