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
25화
“미, 미안해요. 이런 얘기 초면에 하면 안 되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속엣것을 조금 덜어 내려 하다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뚝뚝 흘러 주먹 위에 고였다.
에스페란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이 딱한 애를 보고 있자니 마벨우드 이야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애는 몬스터 사태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
그 불길한 사건들이 오스던 전국에서 터지고 나서는. 콧대 높은 던바틴이 사과를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당시의 던바틴 공작은 결혼을 했던가?
“코델리아. 던바틴 공작 부인이 되고 싶어요?”
“아뇨!”
코델리아가 버럭 소리 질렀다.
“하, 한때는 내 꿈이었어요. 내 미래였고요. 하지만 마벨우드를 모욕했잖아요. 다시 그런 가문과 인연 맺고 싶지 않아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뭔데요?”
“난…….”
망설이던 소녀가 속삭였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결혼은 아직 급하지 않고, 당분간은 지금처럼 있고 싶어요.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어요.”
“마벨우드의 명예 회복을 원해요?”
“되면 좋겠지만, 실종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잖아요. ……사실 명예 회복이 되지 않더라도 실종된 사람들이 돌아왔으면 하기는 해요.”
“그 사람들은 죽었을 거예요.”
“……그렇겠죠.”
두 사람 모두 쓰게 웃었다. 알고 있었지만 말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마벨우드에서만 벌어질 일도 아니고요.”
“그럼……?”
바람의 방향이 변했다. 등줄기를 따라 기이한 예감이 전기처럼 흘렀다.
이상한 남자의 소개를 통해 등장한 이상한 여자. 외모는 신이 공들여 빚은 것 같고, 무력은 문외한인 코델리아의 눈에도 심상치 않다. 파오룬에서 왔다고 하니 그들의 신비한 무술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왠지 피 냄새가 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 이상한 여자가 말했다. 밤의 달빛을 환히 받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모습으로.
“1년 안에 이 나인 호더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그때가 되면 아무도 마벨우드를 불길하다 매도하지 않을 거예요.”
불행의 신이 저주를 내리러 온 듯이. 코델리아는 치맛자락이 구겨지도록 쥐었다.
어느 날의 꿈에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너희들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런 못된 생각. 하지만 정말로 원한 건 아니었다. 이런 일은 다신 일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
“추측이 맞다면 말이에요. 로드 에이번데일과 함께 조사하고 있는 게 있어요. 어쩌면 마벨우드의 사건이 우리가 찾는 것과 맞닿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에스페란사, 당신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찾는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줄 건가요?”
“난 신이 아니에요.”
마치 코델리아의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답이었다. 헛숨을 들이킨 소녀가 홉뜬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돌아보았다. 에스페란사는 여전히 나른하게 앉아서 무도화 신은 발을 흔들고 있었다. 이 사람의 손에서는 코델리아의 삶을 뒤흔든 사건도 가볍고 쉬울 것 같았다.
“내가 전부 막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알고도 방관하진 않을게요.”
구겨진 치맛자락을 쥔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에스페란사는 턱을 괸 채 고개만 돌려 코델리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벨우드 사건을 조사하는 데 협조를 구해도 괜찮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도울게요.”
“고마워요, 코델리아.”
그 대답이 다정하게 들려서 코델리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까지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된 건가?’
에스페란사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코델리아를 흘끔거렸다. 밤은 차고, 우울한 열여덟 소녀는 대하기 어려웠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타격감이 있어야 하는데 손맛이 안 좋다는 이유로 마법을 기본 단계에서 포기한 에스페란사가 쓸 수 있는 기초 마법 한두 개. 위험에 빠진 코델리아를 구해 줬던 뜻하지 않은 행운. 아름다운 밤의 정원과 적당히 멀어진 파티장의 소음.
분위기가 도왔다.
약간의 신비함, 약간의 권위. 코델리아를 유혹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그만한 값은 치러 줄 생각이다.
던전에는 원인도 징조도 없으니 그 사고가 불길한 일이 아니라고 증명해 줄 수는 없지만, 마벨우드가 불길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곧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줄 수는 있다.
그게 과연 좋은 소식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이제 우리 일어나요.”
코델리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엉이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 정원을 가로질러 온실 문 앞에 섰다. 코델리아가 문을 열어젖혔다. 파티장의 소리가 작은 문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소음에 쓸려 나갈 것 같았다.
처음 들어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일이다. 온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고, 그 온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 음악 소리, 대화 소리,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얼이 빠질 것 같다. 잠깐 사이 급격히 피곤해졌다.
방금 전까지 에스페란사의 손을 잡고 있던 코델리아는 저쪽에서 웬 귀부인의 부름을 받고 날듯이 달려갔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는 에스페란사는 문 앞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섰다.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니, 이 파티에 대한 마지막 관심마저 사그라들었다. 좋은 파티였지만, 에스페란사는 애초에 파티 체질도 아니었고, 그들의 사회에 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과 부대끼는 것보다는 던전 공략이 더 좋았다.
그래서 혼자 서 있는 것도 상관없었다. 조금 눈에 띌 수는 있겠지만, 원래 시선은 익숙하다. 게임 내에선 늘 시선을 달고 다녔고, 그건 심지어 왕성에서 열린 파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지?”
알지도 못한 약점을 거침없이 찔러 비트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저 아가씨 알아요?”
“아니. 처음 보는데.”
“아까부터 저렇게 서 있네.”
악의는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궁금증, 아니면 약간의 걱정을 담은 선의. 그런데 이 거대한 파티장,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에스페란사는 문득 홀로된 지금의 순간이 자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돌아갈 사람이 있는 사람은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에스페란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늘 그래 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이 안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던가?
내가 누구인지, 하다못해 ‘에스페란사’가 누구인지라도. 지금 당장 이 파티장을 뛰쳐나간다고 해도, 그런 사람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가?
갑자기 몰려든 부유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표류하듯 멍하니 서서 불청객처럼 바닥의 타일 무늬만 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더 클라이번!’
그래. 그 남자가 있었다. 갑자기 우울한 감정에 휩쓸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에스페란사’가 누구인지 아는 자였다.
그런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평소에는 하루 반나절을 보던 얼굴이 찾으려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외모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는, 다른 남자들보다 머리 반 개 이상 큰 키도, 화사한 금빛 머리칼도 묻혀서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날 두고 가 버리진 않았겠지. 사교계를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피곤하고 귀찮다고 그냥 나가 버린 건 아니겠지. 그는 제멋대로이긴 해도 예의는 확실히 챙긴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사람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럼 당장 나타나야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에스페란사는 파티장을 가로질러 걸으며 바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았다 떨어진다. 이 안에선 ‘유명한 헌터’ 에스페란사를 아는 자도 없다. 파티에 참석한 이름 모를 숙녀일 뿐이다. 몇몇 시선은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것을 볼 때 으레 그렇듯 곧 떨어져 나갔다.
“에스페란사.”
그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휙 고개를 돌리자, 에스페란사가 찾던 얼굴이 보였다. 착각할 수 없는 외모였다.
“어디 갔었어요?”
“취객이 있어서 저택에 데려다주러요.”
“로드 에이번데일, 그런 거 돕는 성격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너무 단정하는 것 아닌가요?”
“맞잖아요?”
그는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성공했어요.”
마벨우드.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자 시더가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몇 번은 더 오가야 할 줄 알았는데.”
사실 스무 살 미만의 소녀들에겐 제법 인기가 좋았으니까. 헌터로서든, 개인으로서든. 운도 따라 줬다.
하지만 차마 코델리아에게 있었던 일을 두고 ‘운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에스페란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잘됐네요.”
“이제 돌아가나요?”
그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댄스카드에 아직 약속이 남아 있잖아요.”
아. 그랬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지 바이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여덟 번째 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너만 아니면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에이번데일, 이제야 왔나?”
“누가 춤 약속이 있다고 도망간 덕에.”
“하하…… 웰베어 경은 잘 데려다드렸고?”
“지금쯤 누가 업어 가도 모를걸.”
지나가던 신사가 시더와 아는 사이인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에스페란사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 신사의 시선이 닿자 인사를 건넸다. 시더가 그를 소개해 주었고, 그들 역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선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기분 나쁜 부유감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었다. 그런 기분, 난생처음 느껴 보았지. 세상과 완전히 유리되어 혼자 남겨지는 기분.
신사가 동문들이며 그들의 댄스 파트너들을 불러들이는 바람에 주변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에스페란사는 손 아래에 잡히는 시더의 코트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에스페란사?”
“네.”
“당신, 지금 내 소매를 잡아 뜯고 있어요.”
그제야 깨달았다. 에스페란사는 그가 가지 못하게 정장 소매를 꽉 쥐고 있었다. 거의 쥐어짜듯이. 그의 눈을 보며, 천천히,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시더의 미간이 구겨진 소맷자락을 따라 찡그러지는 것을 보며 약간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뭐가요?”
갑자기 매도당한 당사자가 물었다.
“……난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당신이 날 버리고 갔잖아요.”
밑도 끝도 없는 화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