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0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7)
발끝을 책장에 걸쳐놓고 책을 뽑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뒤로 젖혔다.
“왜 계속 쳐다봐요?”
“그게 느껴져요?”
“보통은요.”
“어디까지 알 수 있어요? 시야가 닿는 곳 밖에 있어도?”
“내 시야 밖에 있으면 그쪽도 내가 안 보이겠죠. 서로 보일 정도의 거리면 대충은 알 수 있어요. ……이상한 호기심 채우지 말아요. 기억만 돌아오면 자연히 알 수 있다니까.”
“열정적이군요.”
노트 두 권을 들고 바닥으로 뛰어내린 에스페란사가 대꾸했다.
“나한텐 아주 중요하니까요. 당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지만.”
그게 정말로 얄밉단 말이지. 눈을 흘기자,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걸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내 인생에 얼마나 있었을 것 같은가요?”
말문이 막혔다. 난데없이 3년간의 기억을 잃었는데, 괜찮기만 할 리가 없다.
“물론 난 이대로 기억을 찾지 못하더라도 문제없을 거예요. 하지만 아마 한참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기억하고 있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워야겠죠. 그게 달갑지는 않아요.”
감수할 만한 정도의 불편함이지만 기왕이면 기억이 돌아오는 편이 좋겠지.
“그러니 날 너무 미워하지 말고, 대신 당신이 한번 말해 봐요.”
“뭘요?”
“뭐든지. 원래 나는 어땠는지, 우린 평소에 뭘 했는지, 그런 것들. 사진보다는 그게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에스페란사는 기껏 꺼낸 노트를 탁자에 올려두고, 시더가 주로 앉던 1인용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이랑 별로 다를 것 없어요. 난 저기서 노닥거리고, 할 일 하고. 당신은 저 안에서 연구를 하다가 나와서 같이 차도 마시고. 내가 기껏 깨 둔 기록을 멋대로 경신해 버리고.”
“기록?”
“게임이요. 기억 잃은 당신한테까지 지면 기분 나쁠 것 같으니까 이건 당분간 금지예요.”
“아하…….”
잔뜩 불만스런 얼굴로 게임기를 쥐고 흔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 부루퉁해진 뺨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추는 모습도.
‘이건 확실히 상상은 아닌데.’
“지금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정말요?”
반색한 에스페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시더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가 그렇게 애매해요?”
풀썩 주저앉은 에스페란사가 투덜거렸다. 입을 뾰족하게 말고 있는 것이 그가 생각했던 얼굴과 똑같아서, 시더는 자기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계속해 봐요.”
“별거 없는데. 그러다가 때 되면 들어가서 자고. 난 왕실에 사격 수업하러 가고, 당신은 당신 일 하고. 그러다 같이 나가서 놀기도 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레이디 퍼스 주최의 사격 내기에서 이긴 후로 당신 친구가 날 쫓아다닌 얘기 같은 거요? 아니면 새벽에 둘이 증기 마차 타고 돌아다니다가 경관한테 쫓긴 얘기? 당신 기계가 오작동해서 갈리스턴을 넘어뜨린 얘기?”
“내 기계가 오작동을 했을 리가 없어요.”
“당신이 레버 당겨 놓은 거 봤어요.”
“거봐요.”
자랑스러울 부분이 아닐 텐데. 하지만 그게 시더다운 반응이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음, 글라일리 하우스에선 둘이 소풍도 가고, 당신은 그림 그리고 나는 그거 구경하고.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놀고. 당신 발명품 같이 작동시켜 보기도 하고.”
“좋았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스페란사는 곧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후회 없을 만큼.”
시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스페란사가 숨긴 부분들을 꿰뚫어 볼 듯했다.
“계속 말해 줘요.”
“생각이 좀 나는 것 같아요?”
“글쎄…….”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끝을 흐렸다. 기다려도 답을 줄 것 같지 않아서 에스페란사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우리 결혼하기 전에 당신이 나한테 잔뜩 화가 나서 혼자 말도 없이 던바틴으로 가 버린 적이 있는데.”
“내가 그런 짓을 했어요? 대체 왜?”
“그건 비밀이에요.”
검지로 입술을 꾹 누르며 장난스레 웃은 에스페란사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음, 내가 코델리아랑, 애니랑 같이 스털링으로 갔어요. 당신 찾으러 간 건 맞는데 딱 거기 있을 줄은 몰랐죠. 탈마인에 있다가 급하게 새 의뢰를 받아서 그걸 해결하느라 스털링으로 옮겼더라고요.”
던전을 다 빼고, 화를 냈던 이유도 빼고 이야기하자니 시더가 좀 치졸해 보이는 것 같았지만 별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당신은 무슨 군 장교네 집에 틀어박혀서 무슨 기계를 수리해 주고 있었고, 난 스털링에서 할 일이 있어서 그걸 좀 알아보고 있었어요.”
“못 만났군요?”
“얼굴도 못 봤어요.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편지만 주고받다가, 내가 편지 옆에 끄적여 놓은 낙서를 보고 당신이 그림을 그려서 보내 줬어요.”
그 그림은 아직도 에스페란사의 서랍 안에 있었다. 편지지 위에 슥슥 그린 것이었지만, 에스페란사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던 에스페란사의 뺨에 차가운 손끝이 스쳤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던 손길이 우뚝 멎었다. 그러나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어느덧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왜요?”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으면서, 바로 얼마 전까지 의심했으면서 왜?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걸로 기억이 돌아올까요? 당신 생각엔 어때요?”
“당신 지금 순진한 여자 꼬시는 사기꾼 같아요.”
“내가 사기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치고, 당신은 순진하지 않잖아요.”
어느새 모여든 발끝이 카펫을 짓누르고 있었다. 황급히 치맛자락 안으로 발을 숨겼다.
물론 에스페란사는 순진하지 않다.
“기억을 찾으려고 이러는 거예요?”
“설마요. 그 정도로 기억이 절박한 건 아니라서.”
“……이걸로도 기억이 안 돌아오면 내가 뭐가 돼요?”
“그럼 좋은 추억으로 남겨 두면 되죠.”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누가 그래…….”
입술을 둥글게 모으며 투덜거리던 에스페란사가 결연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가볍게 부딪치자, 시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분명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알기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숨죽여 탐색하는 듯한 입맞춤이 순식간에 깊어졌다.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지 않았다. 에스페란사의 몸은 어느덧 팔걸이를 넘어와 시더의 무릎 위에 있었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휘감아 당겼다. 대화도 웃음도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입 안을 헤집는 체온은 작은 버릇 하나 다른 것 없이 그대로였다. 기억을 잃은 그 역시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듯이. 에스페란사는 긴장으로 굳은 몸에서 힘을 뺐다.
떨리는 손끝이 셔츠 위를 긁어내렸다. 그러는 동안 입술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짓눌린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끝까지 눈은 감지 않았다. 서로의 눈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다. 헐떡이는 숨이 느리게 제 속도를 찾았다.
“무슨 생각 해요?”
“딴 남자랑 바람피운 기분이에요.”
시더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슬쩍 되물었다.
“기억은…… 돌아왔어요?”
“아뇨.”
역시 그렇구나. 예상했으면서도 실망스러웠다.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무슨 말이에요?”
“글쎄요……. 일단 당장은 시연회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해야겠네요.”
손끝으로 입술을 닦아 준 그가 몸을 일으키자, 에스페란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갈리스턴을 납치하면 취소시키겠지.”
“정성은 감사하지만, 숙녀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내 남편이 이따위 일로 창피라도 당하게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시더는 고개를 기울였다. 에스페란사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덧붙였다.
“당신은 몰라요.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그건…… 부럽네요.”
알고 싶어졌다.
이윽고 미소를 지은 시더가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날 한번 믿어 볼 생각은 없어요?”
“뭐 하려고 그러는데요? 갈리스턴 납치보다는 나은 답이어야 할 거예요.”
“그건 당신이 보고 평가해 봐요.”
그는 끝까지 무슨 일을 할 예정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대신 연구실 안에 있는 이상한 동물 뼈의 정체를 캐물어 에스페란사를 매우 당황스럽게 했다.
* * *
다음 날, 에스페란사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시더를 걱정스레 흘끔거리기는 했지만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길에서 갑자기 쓰러진 에이번데일 백작의 소문에 대해 얼버무릴 필요도 있다면서.
어쩌면 그냥 그가 불편한 것일 수도 있고. 키스는 하지 말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