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1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8)
그는 드물게도 상대를 배려해 서재에 틀어박히는 길을 택했다. 기억에 없는 연구를 훑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틈틈이 에스페란사가 꺼내 놓은 그림 노트도 구경했다. 노트 두 개 분량의 종이에 한 사람만 가득했다.
종이를 넘기던 그가 한 페이지에 멈추었다.
귀퉁이에 풀물이 든 페이지. 꾹꾹 눌러 그린 작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를 그린 것 같은데. 그 밑으로 투닥거리며 한 줄씩 쓴 낙서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기억은 흐릿했지만 익숙하다는 듯 감정이 너울졌다.
이대로라면 3년 동안 잘 닦아둔 길을 따라 그 이상한 숙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니까.
사실 그는 지금 상태로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던 연구를 다시 복기해야 하는 귀찮음은 있겠지만 감수할 수 있을 정도다. 시연회 따위야 어떻게든 될 테고, 에스페란사를 제외하면 그가 잊은 사람 중에 중요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스페란사에겐 기억을 잃은 그가 필요 없는 듯하니…….
뭐, 좋다. ‘기억을 잃은 상태’ 따위보다는 에스페란사가 그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하니까.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낮게 울렸다. 시더는 침실로 향했다. 탁상용 램프를 켜 둔 채로 잠이 든 에스페란사의 뺨을 손마디로 천천히 쓸어 보았다. 엷은 눈꺼풀의 떨림으로 에스페란사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도 눈을 뜨지 않았다.
* * *
여왕까지 참석하는 시연회인 만큼 장소는 당연히 어거스텀 궁전이었다. 마차에 올라탄 에스페란사는 전에 없이 덜덜 떨고 있었다. 혀를 나직이 찬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손을 그의 소매 위에 올렸다.
“그 정도로 걱정돼요?”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내가 갈리스턴을 납치할게요. 그리고 시연회를 취소하라고 투서 하나만 날리면…….”
“범인이 당신인 걸 알겠죠. 그럼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것 아닌가요?”
주먹 쥔 손으로 소매를 꾹 쥐어짜던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여왕이 아는 건 상관없어요.”
“당신 친구들도 알게 되겠죠.”
“아, 시끄러워요.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냐고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도 날 알잖아요. 광대 노릇을 좋아하진 않지만, 난 그런 걸 꽤 잘해요.”
“아, 네에.”
대충 대꾸한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오늘 공개하는 발명품이 뭔지는 알아요? 찾았어요? 그 교수랑 연락은 해 봤어요?”
시더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로 답을 미루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궁전 정문에 도착했다. 마부와 궁전 경비가 무어라 말을 하더니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다. 에스페란사는 초조한 낯으로 가까워지는 궁전 건물을 흘끔거렸다.
“당신도 이 시연회를 기대했나요?”
“……그런 셈이죠.”
다시 마차가 멈췄을 때,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걱정 말아요. 망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마차에서 내린 그는 에스페란사가 무사히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 사라졌다.
“에스페란사! 일찍 왔군요? 로드 에이번데일은요?”
문 앞에 서 있던 코델리아가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갔어요.”
“아, 준비하러 갔어요? 그런데 정말로 무슨 기술이에요?”
“나도 아직 몰라요. 비밀이래요.”
정말 너무하다고 투덜거리는 코델리아를 따라 걸어가면서, 에스페란사는 문득 뭔가가 어제와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왜 그래요?”
“소매를…….”
소매를 잡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 * *
시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는 사람들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드물게도 이 작은 사교장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여왕의 시녀들과 전 시녀들, 수상과 몇몇 내각 장관들, 공장을 수백 개씩 가진 사업가들. 그리고 이 부류에 들지 않는 사람이 몇 있었는데.
“오랜만이네요, 로드 스털링.”
알라스테어가 에스페란사의 장갑 위로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고 담백하게 일어났다.
“아버지 대타로 왔습니다.”
“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아. 맞아요. 그럼 던바틴 공작께선, 마정석 광산 때문에?”
“명목은 광산이지만, 그보다는 이런 작은 사교장에 얼굴을 내밀 기회를 원하셨을 겁니다.”
알라스테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코델리아의 구혼자로서 몇 년간 나인 호더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그는 이 사교계가 생각보다 훨씬 폐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던바틴 공작조차도 혼맥이 아니면 쉬이 접근하지 못할 만큼.
“아, 뭔지 알 것 같네요.”
알음알음 초대하는 작은 자리들이 진짜였다. 오직 소개로만 자리를 내주고, 사교계의 잔뼈 굵은 귀부인들이 까다롭게 심사하는 자리들.
던바틴 공작의 아들도 어렵사리 드나드는 그 자리가 출신이 모호한 ‘에이번데일 백작 부인’에게 쉽게 열린 것은 8할이 여왕의 뒷배 때문이었다.
“고생 좀 하겠어요.”
“‘그 날’에 비하면 이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만합니다. 그보다 오늘은 혼자 계시겠군요.”
“코델리아가 아까까지 같이 있었는데……. 둘이 싸웠어요?”
그 말에 알라스테어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공식적으로 불편한 사이입니다.”
“아, 그거.”
“그런 의미에서 저번 같은 자리가 있으면, 되도록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스페란사는 글라일리 하우스에 두 사람을 비롯한 친구들 몇몇을 초대했던 일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렵지 않죠. 당신은 체스 연습을 좀 더 해야겠지만.”
알라스테어의 얼굴이 머리칼만큼 붉어졌다. 그는 남자들끼리 한 체스 시합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에스페란사. 이쪽으로 오게. 자네가 앞자리에 앉아야지.”
여왕의 시녀인 쇼드니 공작 부인이 딱딱한 목소리로 에스페란사를 불렀다.
“그럼, 잘해 봐요.”
알라스테어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 준 에스페란사는 쇼드니 공작 부인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폐하는요?”
“엘리자베스가 모시고 있네. 그런데 자네 손목의 그건 뭔가?”
“아, 시계예요.”
뚜껑을 열어 보여 주자, 쇼드니 공작 부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시계 같지 않게 생겼군.”
팔찌 같은 이 시대 손목시계를 생각하면 그렇게 볼 만도 했다.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높지 않은 무대를 바라보는 눈에 염려가 묻어나서, 쇼드니 공작 부인은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여왕과 대공, 갈리스턴 공작과 셔버리 공작 부인이 도착했다. 셔버리 공작 부인은 에스페란사를 보고 반색했지만, 갈리스턴 공작이 눈치를 주자 이쪽으로 오지는 못하고 쫓겨난 강아지처럼 힐끔거렸다.
“며칠 전에, 셔버리 공작 부인이 폐하께 공작 부인 대신 공주로 불리고 싶다고 청을 넣었다 거절당했네.”
“폐하께 직접요?”
“흔치 않은 일이지. 갈리스턴 공작 전하께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지만 폐하께선 강경하셨어.”
여왕은 셔버리 공작 부인을 싫어하니까. 여왕에 비하면 갈리스턴 공작이 셔버리 공작 부인에게 보이는 태도는 보호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러니 여왕이 공작 부인 좋은 일을 해 줄 리가 없다.
“본래 공주였으니 그렇게 불려도 상관없지 않나요? 어차피 셔버리 공작 전하도 돌아가셨고, 자식도 없고.”
“안 될 것은 없지만……. 폐하께서 예외를 두지 않으시겠다면 그런 것이지.”
쇼드니 공작 부인이 생각하기에도 ‘안 될 것은 없다’ 싶을 정도면 말 다 한 것이다.
“아하.”
“아무쪼록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시니 셔버리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 주는 말이네.”
아무리 심기가 불편하더라도 에스페란사에게 티를 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속내까지 알 리 없는 쇼드니 공작 부인은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여왕이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회가 시작됐다.
에스페란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름 모를 교수와 시더가 커다란 오토마톤을 가지고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이 보여 준 것은 두 개의 마정석과 그에 연결된 통신기계였다.
‘발표한 적은 없지만, 내 통신기 같은 것 아닌가?’
정말 저게 원래 오늘 발표하기로 한 기술이 맞나? 시더는 그 불안감을 알아챈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가장 신실하신 여왕 폐하와 대공 전하, 그리고 귀빈 여러분. 반갑습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에스페란사는 따라 느리게 박수를 치며 시더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제가 거대한 세계 정복 시나리오라도 들고 오길 바란 분들이 있을 테지만, 여러분의 생각보다 그런 기술은 재미가 없답니다.”
군부 관계자와 함께 앉아 있던 수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군인으로 보이는 옆자리 남자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늘 보게 되실 것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획기적이고, 평화로운 기술입니다. 하지만 세계 정복에 쓰자면 못 쓸 것도 없죠.”
“…에이번데일. 오스던은 평화를 원하네.”
지켜보던 여왕이 그렇게 말했다가 황급히 에스페란사를 돌아보았다. 무대를 향해 고정된 눈은 여왕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