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2
외전2. 기억에는 마음이 있다 (9)
시더는 여왕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어깨만 으쓱였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오늘 보실 것은 하나의 마정석을 두 개로 나눈 뒤 단면의 회복성을 이용하는 기술입니다. 이쪽 브랜던 가일 교수의 연구실은 정교하게 나뉜 마정석 사이에서 인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가일 교수에게 갈채가 쏟아졌다. 에스페란사는 그 교수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벌써 1년도 더 된 일인데, 그가 이번 시연회를 같이 준비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추가 연구 결과, 저희는 그 인력을 이용하여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연결되는 두 개의 마도구를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게 자세한 원리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훌륭한 선택이었다. 몇 명은 여기서 두 문장만 더 길어졌어도 졸기 시작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신호를 보내는 것부터 통신, 위치 추적까지도 가능합니다. 이 기능은 반영구적이고, 연결은 완전합니다. 원격 조종도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이 어거스텀 궁전에서 듀랑 대통령 관저의 축음기를 껐다 켤 수도 있겠지요. 듀랑 대통령은 머리가 좀 아프겠지만, 가능은 합니다. 연결만 되어 있다면요.”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장군들의 등이 수직으로 뻣뻣하게 섰다. 수상이 무어라 타박을 하는 게 보였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습니다. 연결은 오직 1대 1로만 가능합니다. 가일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마정석을 3분의 1, 4분의 1로 나누는 실험도 진행한 바 있으나, 오직 2분의 1로 나누었을 때만 충분한 인력이 발생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서 추가적인 실험을 계획하시는 분이 있다면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아예 무대 위로 튀어 나갈 듯하던 사업가들이 헛기침을 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간단한 기술 시연을 해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나눠 가진 통신기와 비슷하지만, 거리의 제약이 없다는 점에서 좀 더 완전했다. 에스페란사의 통신기는 원거리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가일 교수가 마정석학 연구자인 것도 에스페란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설마하니 이런 자리에 나올 교수를 어제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기술이 시더가 오늘 시연회에서 발표하려던 기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서재를 뒤지다가 시연회에서 쓸 기술을 찾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손끝을 천천히 매만졌다. 기술은 다른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손에 소매를 쥐여 주던 그 버릇만은 기억을 잃은 시더가 알 방법이 없었다.
얄미운 인간 같으니라고.
‘기억을 찾았으면 찾았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대체 언제부터 기억이 돌아온 걸까. 처음에는 에스페란사를 경계하던 그가 어느 시점인가부터 살가워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때부터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서재에서 사진첩을 뒤지던 때에 기억이 돌아온 것이라면…… 그건 정말 괘씸한데. 물론 기억을 찾은 건 잘된 일이고, 다친 데가 없어 보이니 더더욱 다행이지만. 에스페란사는 불만스레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가져온 통신기를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는 시간도 있었는데, 첫 타자는 여왕이 맡았다. 커다란 홀의 반대편에 선 갈리스턴 공작이 여왕과 통신을 했다.
“장거리 통신은 여기서 보기가 어렵겠군. 아쉬운 대로 다른 기능을 보여 주게.”
가일 교수가 나서서 이런저런 기능을 선보였다.
모두가 교수의 손에 집중한 사이 시더는 슬쩍 뒤로 빠졌다. 통신기에는 관심도 없던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붙잡았다.
“당신 기억…!”
“쉿.”
에스페란사의 입술을 손끝으로 누른 시더가 어깨를 감싸고 복도로 나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왔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었고.”
“그건, 나도, 보면 알아요.”
이를 앙다문 에스페란사의 말에 시더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어 말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죠. 마셨어요.”
“포션?”
에스페란사가 속삭이듯 외쳤다.
“아프다고 했잖아요, 그거. 기절할 만큼 아프다고. 내가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생각보다는 할 만했어요.”
“……내가 먹어도 될 만큼?”
“그건 아니죠.”
완전히 거짓말투성이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아프진 않아요?”
“아픈 건 잠깐이었어요. 지금은 멀쩡하고 기억도 멀쩡해요. 자, 오래 나와 있을 수 없으니까…….”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시더를 꽉 끌어안았다. 잠깐은 괜찮겠지.
문을 열고 나오려던 갈리스턴 공작이 멈칫했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문을 닫았다.
“이제 들어가요.”
시연회는 성공적이었다. 여왕과 대공은 마정석을 사용한 장식품을 선물 받고 기분이 좋아 보였고, 사업가들은 번뜩이는 눈으로 혹시 기술을 팔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수상 역시 흡족해 보였다. 이 귀찮은 행사에서 광대 노릇을 해서 얻을 만한 것은 모두 얻었다고 봐야 했다.
어둑한 도로 위에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는 시각. 에이번데일 백작가의 증기 마차도 어거스텀 궁전에서 나왔다.
침실 문을 열면서 시더는 익숙하게 오토마톤을 켰다.
‘아, 기억이 돌아왔었지.’
오토마톤 앞에서 젖은 머리칼을 말린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돌아보았다. 들고 있는 책이 무색하게 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리 와요.”
내밀어진 손을 붙잡자, 침대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다시피 했다. 에스페란사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이잖아요.”
“오랜만인 게 누구 탓인데.”
“내 탓이죠.”
한바탕 웃음이 터진 후에야 실감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에 적잖이 안심하고 있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안고 느리게 쓸었다. 얇은 잠옷 자락에 주름이 졌다. 한참 익숙한 감각을 만끽하던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애정이 가득한 눈동자. 이것 역시 익숙한 것이다.
“난 말이죠. 당신이 아픈 게 싫어요.”
“그래요. 미안해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아니지, 그냥 내가 갈리스턴을 납치했으면…….”
“어림도 없죠.”
“아, 그래. 어림도 없지. 아무튼!”
짐짓 눈을 치켜뜬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흘겼다. 시더는 몰래 사탕을 집어 먹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차라리 당신이 처음 가져왔을 때 얌전히 먹을 걸 그랬죠? 그랬으면 금방 끝났을 텐데.”
“당신은 갑자기 쓰러지고, 난 당신이 죽는 줄 알았겠죠. 그게 뭐 좋은 생각이라고.”
혹시 그 포션을 먹으면 기억은 돌아오는데 머리가 나빠지나?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더는 얄미운 소리나 해댔다.
“그렇죠. 당신은 딴 남자랑 키스하는 기분도 못 내 봤을 거고.”
“아, 시끄러워요.”
손등을 꾹 꼬집었는데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에스페란사보다도 더.
“기억이 없어도 괜찮다더니.”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기억을 잊고 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죠. 안 그래요?”
기억이 없어도 문제없다고 생각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하나둘, 지독한 고통과 함께 잊었던 기억이 돌아올 때, 그는 그 생각이 그저 무지의 소산일 뿐이었음을 겸허하게 인정했다. 이 기억 없이 그는 평생 반쪽짜리였을 것이다.
“다시 그런 이상한 데 드나들기만 해 봐요.”
에스페란사의 목소리도 한풀 꺾여 누그러졌다. 시더는 그 머리칼 위로 입을 맞추다가, 문득 탄성을 터뜨렸다.
“왜요?”
눈만 굴려 올려다보며 묻는 말에, 그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에스페란사의 손목시계를 쥐었다.
“내가, 그냥 시계가 아닐 거라고 했잖아요.”
“본인이 만든 게 아닌 것처럼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시계는 시계 회사에서 만들었고, 내가 만든 건…… 이거예요.”
시계 양옆의 장식 부분이었다. 양쪽이 모두 열리게 되어 있었는데, 안에는 아주 작은 기계장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시더는 서랍에서 마정석을 꺼내 장치 중간의 홈에 넣었다. 그리고 스위치를 켜자, 장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더에게 머리를 기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스페란사는 마정석이 일반적인 구형이 아니라 반구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그거네요. 시연회에서 보여 준 거!”
지금 생각하면 여왕과 대공에게 ‘신호를 보내는’ 기능 따위는 별로 필요가 없었을 텐데, 다른 기능보다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가 있었다. 그건 에스페란사와 시더에게 더 필요한 기능이었다.
“던전에서도 쓸 수 있어요. 다시는 기차에서처럼 연락이 안 돼서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닌 척해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차 던전 말고도 연락이 안 돼서 문제가 된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에스페란사는 시연회에서 시더가 한 말을 떠올렸다.
완전한 연결.
“이번 같은 일만 없다면 말이지…….”
“숙녀분, 3년간의 기억을 잃었는데도 사흘도 안 돼서 다시 당신을 사랑하게 됐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해요?”
“그건 고민해 볼게요.”
익숙한 품 안으로 파고들며, 에스페란사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말하지 않은 속내를 알아들은 듯 시더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