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3
외전3. 선물 (1)
“지팡이를 안 쓴다고요? 그럼 우산은?”
“비가 오면 들겠죠. 그치만 그렇게 큰 우산은 잘 안 써요. 가방에 넣고 다닐 수 있는 3단 우산이 더 편하니까.”
시더는 불만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는가, 그들은 눈에 띄고 싶은 게 아니었다.
“코트는 그냥 입어도 될 것 같고, 구두도 상관없고. 아, 모자는 안 돼요.”
“그럼 실내복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없어요.”
“……그래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더는 모자를 내려놓았다.
“좋아요. 복장은 이걸로 됐고. 그럼 이제 하나 남았군요.”
에스페란사 역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공간 기계는 완성되었지만, 두 사람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오래 기다려 준 언니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
“언니랑 형부 선물은 됐고. 조카 것만 정하면 되는데…… 진짜 감이 안 와요. 걔가 지금 한 일곱 살쯤 됐나? 일곱 살짜리 남자애는 뭘 줘야 되지?”
세계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가치 있는 물건이 많지 않았던 탓에 언니 부부의 선물은 비교적 쉽게 고를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최고급 시계는 어디에서나 통할 것이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시더가 의외로 완강했다.
‘조금…… 아니 좀 많이 부담스럽긴 한데.’
하지만 의미는 이해했다. 아마 언니도 이해할 것이다.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다녀 줄 것 같진 않지만, 평상시에 하고 다닐 만한 건 나중에 선물해도 늦지 않는다.
“애들한텐 첫인상이 중요하대요. 잘 골라야 하는데, 요즘 남자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당신은 어릴 때 뭐 받았어요?”
“넥타이핀?”
“도움이 될 만한 걸 얘기해 봐요.”
“글쎄요. 지금까지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은, 아.”
“왜 그래요?”
시더가 묘한 얼굴로 말했다.
“곰인형을 받은 적은 있어요.”
“곰인형? 이런 말 좀 그런데 진짜 안 어울려요.”
“그때 아마 내가 네 살이었을 거예요. 네 살 때는 어울렸겠죠.”
“당신이 네 살인 게 안 어울려요.”
응징하듯 손가락이 뺨을 쿡쿡 찔렀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도 물러나지 않았다.
진실의 입과 징벌의 손가락이 벌인 한 차례의 결투는 애매한 무승부로 끝났다. 시더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아직도 키득거리는 에스페란사를 끌어안은 채 커다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 맞다. 그래서 그 곰인형은 어땠어요? 네 살이랑 일곱 살은 좀 다르겠지만.”
“어떻다고 할 것도 없어요. 음, 재밌는 이야기는 아닌데.”
“곰인형에 무슨 얘기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시더의 얼굴이 묘했던 게 떠올랐다. ‘네 살 때 곰인형을 받았다’는 평범한 얘기를 하면서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뭔데요?”
“그러니까, 내가 네 살 때. 아마 이맘때였을 거예요. 눈이 잔뜩 오는 겨울. 아버지의 손님이 선물로 곰인형을 주고 갔어요. 이름을 음, 테디라고 붙였죠.”
어렸을 때도 꼭 애늙은이 같은 얼굴로 얄미운 소리만 했을 것 같은데, 곰인형에 이름을 붙였다니.
“사실 곰 인형이라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아요? 그래도 박제가 아니라 인형으로 된 곰은 처음 봐서 꽤 좋아했던 것 같아요.”
곰인형은 비인기 장난감이었다. 이 세계에는 루즈벨트 대통령도 없었고, 그의 일화에서 영감을 받아 곰인형을 만든 사업가도 없었다. 인형 가게에서는 곰 같이 위험한 동물의 인형보다는 주로 강아지나 토끼, 양 인형을 많이 팔았다. 에스페란사가 옛날에 잭에게 토끼 인형을 사 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그렇게 드문 곰인형의 이름이 테디라니. 기막힌 우연이었다.
“당신이 곰인형을 좋아했다는 게 상상이 안 가는데.”
“숙녀분, 그런 얘기 한 번만 더 하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에요.”
“알았어요. 안 할 테니까 빨리 말해 봐요.”
에스페란사는 입을 꾹 누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시더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바라보다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곰인형은 보통 인형이 아니었어요.”
“귀신이라도 들었어요?”
“음, 비슷해요.”
시더가 키득거렸다. 진짜야? 에스페란사는 괜히 시더의 소매를 말아쥐며 경고했다.
“나 귀신 얘기 싫어해요.”
“귀신 얘기 아니에요. 귀신은 아니지만, 소리는 났죠. 배를 누르면 ‘사랑해!’ 하고 말하는 인형이었어요.”
마도구였단 소리다. 시더가 어릴 때면 20년 전이고, 마도 공학 초창기였다. 아마 백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손님이 대단히 무리해서 준비한 선물이었겠지. 기억을 더듬어 보던 시더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처음엔 신기했죠. 배를 마구마구 눌러 봤어요. 아마 한 백 번만 더 눌러 봤으면 마력이 다 됐을 텐데. 그렇게 누르다 보니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곰인형 입을 막고 다시 배를 눌러 봤는데 또 소리가 들렸죠.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요?”
짐작이 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든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글쎄요? 얘는 입이 아니라 배로 말을 하는구나?”
“그렇게 귀여운 생각이면 좋았겠지만, 난 곰이 테디를 먹었다고 생각했어요.”
어, 어어어. 왠지 뒷얘기가 짐작이 가는데. 시더가 빙긋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불길한 예감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그래서 울면서 곰인형 배를 갈랐죠. 안에 까만 기계가 있더라고요. 배에 고정된 부분에 동그란 버튼이 달려 있었고.”
손가락을 들어 에스페란사의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누르면 ‘사랑해!’ 하고 말했죠.”
에스페란사가 읍, 읍, 입 막힌 소리를 내자 시더는 입술 위에 댄 손가락을 지그시 비벼 눌렀다 뗐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 아, 이 안에 테디가 갇혀 있구나. 넝마 짝이 된 곰인형은 무시하고 그걸 분해하기 시작했어요.”
이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나사가 하나 잘못 박혀 있었군. 에스페란사가 속으로 혀를 찼다. 시더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겠다는 듯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분해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했어요. 소리를 내는 부품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던 건데, 그때는 놀라서 나 때문에 테디가 죽은 줄 알고, 그걸 끌어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 보여 주면서 테디를 살려 달라고 했어요. 다들 어찌나 웃던지.”
생각해 보면 정말 기괴한 광경인데, 웃음이 나왔다. 천사 같이 생긴 어린아이가 울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모습이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린 시더 클라이번이라. 상상이 안 간다고 말은 했지만, 정말 못 말리게 사랑스럽고 깜찍한 꼬마였겠지.
“그래서 어른들이 고쳐 줬어요?”
“그 집에 네 살인 나보다 그런 걸 잘 만지는 사람은 없었을걸요. 그냥 넝마 짝이 된 테디 가죽과 줄줄 새어 나온 솜과 고장 난 기계를 가지게 된 거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에스페란사는 안락의자 팔걸이에 등을 기대고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눈가에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시더는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항의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릴 때 뭘 받았는데요?”
이번엔 에스페란사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물론 시더처럼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다.
“장난감 총이나 칼 같은 거? 블럭이나…… 아, 마술사 세트를 받은 적도 있어요. 몇 번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리긴 했어도.”
“마술사 세트라면 여기서도 구할 수 있겠지만, 취향을 너무 탈 것 같은데요.”
장난감 칼이나 총은 무난하지만 반대로 너무 무난했다.
“그럼 어쩌지?”
“어차피 어린애 선물이라면, 가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수긍이 가는 말이다. 에스페란사는 타닥, 타닥, 타오르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조금 일찍 가야겠네요. 당신도 좀 둘러보고 싶을 테고.”
“그럴까요?”
“갖고 싶은 게 많을걸요.”
“그거참, 기대되는군요.”
에스페란사는 자신만만했다. 이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눈이 돌아갈 것이다.
* * *
“……빨리 좀 와요.”
“잠깐만요.”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에스페란사는 꼬마 조카를 위해 장난감 매장을 털 계획을 세우고 늦은 아침부터 번화가로 향했다. 여기서 적당히 식사도 하고, 카페도 갔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서 집으로 가면 된다.
언니와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고. 혹시 잘 곳이 없을까 봐 숙소도 잡아 뒀다. 며칠 더 있어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시더가 이렇게까지 방해가 될 줄은 몰랐다.
8차선 도로가 가로지르는 도심. 하늘을 찌르는 잿빛 마천루. 네 면이 유리로 된 건물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직장인들. 그들의 손에 들린 네모난 기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와 그에 닿을 듯 높은, 마왕성처럼 거대한 백 층짜리 탑. 시더 클라이번에겐 그 모든 것이 희열 그 자체였다.
좋아할 줄은 알았다.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 걸어가게는 해 줘야 할 것 아니야!
길을 잃지 않도록 꼭 잡은 손이 덜컹, 걸음을 멈춰 세웠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 돌아보니, 시더는 최신형 전자기기를 광고하는 거대한 광고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
“안 되겠어요. 당신한테는 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요. 저거 사러 가요.”
“……돌아가면 쓸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그냥 고물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뚫어져라 보질 말았어야지.
“이럴 때 쓰려고 돈을 그렇게 잔뜩 가져온 거잖아요.”
가져온 것은 돈이 아니라 금이었다. 며칠 머무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잠시 후, 가게에서 나온 시더의 손에는 최신형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어차피 통화 기능은 필요 없으니까. 화면도 제일 큰 것으로 골랐다. 점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오는 기분이 아주 묘했다.
“이제 선물을 사러 갈 건가요?”
“지금은 아니고…… 짐 생기기 전에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에스페란사는 그렇게만 말하고 시더의 손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