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4
외전3. 선물 (2)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움직였다. 건물에 들어설 때까지도 에스페란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일부러 숨기는 것이 분명했기에 시더도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이제 여기가 어딘지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조명이 요란하고 음악 소리는 더더욱 요란한 공간이었다. 뭔지 모를 기계가 아주 많다는 점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사람들은 기계 하나씩을 붙잡고 뭔가 열심히 조작하고 있었다.
‘게임기?’
에스페란사의 주문으로 만들었던 게임기는 이것보다 훨씬 단순했었지만, 분명히 구조는 비슷했다. 인력이 보충되면 이런 것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락실이에요. 말 그대로 게임하고 노는 곳.”
“아하. 이런 걸 만들어 줄까요?”
“그냥 놀고 싶어서 온 거예요. 설욕도 할 겸.”
“아, 설욕.”
시더는 픽 웃어 버렸다. 그야말로 에스페란사가 할 법한 생각이었다.
“당신이 내 기록을 멋대로 다 깨 버렸잖아요. 설마 여기선 못 이기겠지.”
“져 줘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러기만 해 봐요!”
시더가 처음 만난 게임기는 다름 아닌 자동차 게임이었다.
“운전으로 날 이기겠다고요? 운전 못 하잖아요.”
“게임은 해요.”
잔말 말고 앉으라는 태도에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나쁠 것 없죠.”
실제 운전 경험이 거의 없는데도 장담한 이유가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이 게임을 꽤 잘했다. 게다가 오락실 게임기 특유의 불친절한 설명 때문에 시더는 컨트롤에 애를 먹었다. 게다가 의자가 덜컹거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몇 번 해 보니 이것도 할 만했다.
전적이 2:0에서 2:4로 기울자, 에스페란사는 질린 얼굴로 게임기에서 손을 뗐다. 시더는 폭죽이 터지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젖혔다.
“화면이 좋네요. 우리 화면은 굉장히 밋밋한데.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사진 기술 쪽으로 가면 있을지도요. 아니면 무대 효과나.”
“음, 찾아봐야겠네요.”
“당신 흥미 분야는 아니에요?”
“언제까지 내가 모든 걸 다 만들겠어요.”
지금까지 그래 왔으면서. 하지만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자, 어쨌든 당신이 졌어요. 다음 도전 종목은 뭐죠?”
“도전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발끈하며 시더의 손을 붙잡은 에스페란사는 농구 게임기 앞으로 향했다.
“이거 해 본 적 있어요?”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냥 이 공을…….”
시더는 게임기 아래쪽에 모인 공 하나를 들어 던지며 이어 말했다.
“저 안에 넣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점수가 올라가자 거 보란 듯이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가르칠 필요는 없어서 좋네요.”
비겁하긴 했다. 농구를 해 본 적도 없는 도련님을 데려다 농구 게임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비겁함과 냉정함은 다른 거라는 생각은, 지금은 하지 않기로 했다.
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게임에 두 사람 모두 진지했다. 에스페란사는 특별히 농구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원체 몸으로 하는 일은 다 잘했다. 시더는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었지만 무엇보다 배우는 것이 빨랐다. 옆 사람이 하는 걸 보고 자세와 요령을 순식간에 체득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했던 게임이었지만 시간이 끝나갈수록 두 사람 모두 손이 바빠졌다. 에스페란사는 아예 두 손으로 던지기 시작했는데, 자세가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들어가기는 했다.
“이겼다!”
2점 차이로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쨌든 승리였다. 시더는 점수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스페란사의 이마를 훔쳤다.
“다음엔 뭐 할래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마지막일 것 같은데.”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시더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그럼, 저걸로 할까요?”
눈이 휘둥그레진 에스페란사는 큰 보폭으로 시더가 가리킨 쪽으로 걸어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진심이에요?”
“그럼요.”
“사격에서 날 이기겠다고요?”
“그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저 정도라면, 운이 좋으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더는 스스로 제법 훌륭한 사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어떻게 해도 에스페란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이도를 극단적으로 낮춘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운만이 승패를 좌우하는 시합이라면? 승산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뭐, 좋아요.”
진짜처럼 묵직한 총이었다. 나란히 선 둘은 총을 잡고 화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점수가 빠르게 올라갔다.
성격도, 적성도 다른 두 사람에게 비슷한 점이 있다면,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무섭게 몰입한다는 점이었다. 눈앞의 과녁과 손에 감싸 쥔 총만이 전부가 되었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의식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요란하게 쿵짝거리는 오락실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지나가며 슬쩍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 것을 깨달은 것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아, 죄송합니다!”
구경하던 사람이 툭 치는 바람에 집중이 깨어진 시더가 몸을 바로 세웠다.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낮은 점수가 화면에 떠 있었다.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으니, 여기까지였다. 시더는 미련 없이 총을 내려두고 게임을 종료시켰다.
“당신이 이겼어요.”
“아, 벌써?”
총을 내려놓은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게임이 끝나자 사람들은 언제 모여들었냐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여전히 멀지 않은 자리에서 흘끔거리고 있었으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애초에 왜 그렇게 많이들 모인 거지? 잠시 고민하던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시더를 향했다. 괜한 고민이었다.
“왜 그래요?”
“……생각을 못 했어요.”
정장 차림의 젊은 금발 미남자가 오락실에서 사격 게임을 하고 있으면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한 번쯤 걸음을 멈출 만했다.
“모자라도 씌워야 하나?”
“모자는 안 쓴다면서요?”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뭐, 구경 좀 하라지. 닳는 것도 아닌데.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을 꼭 붙잡고 앞장섰다.
“잘 놀았으니까, 이제 선물 사러 가요.”
* * *
연말의 쇼핑센터는 화려했다. 높은 천장에 닿도록 커다란 트리와 장식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판매하는 특별한 패키지의 상품들, 그 앞에서 떠나질 못하고 서성거리는 어린아이들. 사랑스러운 것투성이였다.
게다가 그들이 향한 곳은 장난감 코너였다. 온 세상의 행복을 가득 모아 붉은색과 녹색 포장지로 감싸 놓은 곳. 잠깐 돌아본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카트가 인형, 블럭, 히어로 피규어와 팽이 장난감으로 가득 찼다.
“공룡은 졸업했을 것 같고, 역시 로봇이 좋겠죠?”
“괜찮을 것 같은데. 조립하면 움직이는 건가요?”
장난감을 사 달라고 바닥에 드러누워 울던 꼬마 아이를 지나 로봇 코너에 온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가장 큰 장난감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 사고, 너무 많으면 사람 시켜서 집으로 가져오라고 해요.”
“안 돼요. 그럼 재미없잖아요. 직접 줘야지.”
“흐음, 그럼 이것들은 보내고, 직접 가져갈 건…… 저게 좋겠어요.”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이끌고 커다란 모형 자동차들이 가득한 코너로 향했다. 아까 본 장난감 로봇과 비교하면 가격에 0이 하나씩 더 붙는 것들이었다. 진짜 자동차처럼 정교한 데다 무선 조종기까지 달려 있었다. 샘플을 사용해 볼 수 있는 커다란 경기장에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당신이 좋은 거겠지.”
그러나 의외로 시더는 장난감 자체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계속 그를 흘끔거렸지만, 그는 냉정하게 7세 남아에게 적당한 선물을 골라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일곱 살이면 이 정도는 할 만할걸요.”
“당신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라고요. 여기 12세라고 적혀 있잖아요.”
“이런 건 원래 보수적으로 적게 돼 있어요.”
“발목 양말도 못 보는 주제에 보수 운운하지 말고.”
약간의 의견 대립은 있었지만, 두 사람은 크고 정교한 모형 자동차와 모형 비행기를 하나씩 사기로 결정했다.
“손님, 어느 걸로 드릴까요?”
“제일 비싼 걸로 주세요.”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깜짝 놀란 에스페란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등 뒤에서 시더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아, 웃지 말아 봐요. 이런 말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고요.”
“거기서 자주 하지 그랬어요. 기회가 많았을 텐데.”
“거기랑 여기는 다르죠. 여기서 하고 싶었던 거예요.”
시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를 흘끔거리던 점원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계산을 마쳤다.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실 거예요.”
“그 전에 서점부터 들르고 싶은데.”
“그건 날 카페에 두고 당신 혼자 다녀올 거예요.”
“나랑 서점에 가면 재미없다는 거죠?”
바로 그 뜻이다. 분명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책들만 잔뜩 사 올 테니까.
둘은 백화점 근처의 적당한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새로운 경험은 오늘 충분할 만큼 했으니 식사는 적당히 입맛에 맞을 만한 것으로 정했다.
“무슨 생각 해요?”
“당신을 어떤 카페로 데려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요.”
“당신 좋은 곳으로 가요.”
“내가 좋은 데는 싫어할 텐데.”
“그 정도로 까탈스럽지는 않아요.”
“싫어할걸요? 그래도 괜찮다면야.”
에스페란사는 지하철역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시더를 끌고 갔다. 낮은 테이블과 어수선한 분위기,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요란한 캐롤. 시더는 눈을 찡그렸으나, 불평은 하지 않았다.
“안 놀라네요?”
“고작 이 정도로 놀라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어수선하긴 하죠?”
“꽃시장만큼이나 어수선하죠.”
“원래 그런 거예요. 그래도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거 하나 정돈 있어요.”
창가 자리에 시더를 앉혀 두고 음료 두 개를 주문해 온 에스페란사가 진동벨을 내밀었다.
“이건 어때요?”
사용법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 시더는 진동벨을 해체해 버릴 듯한 눈으로 뒤집어 보더니 금방 내려놓았다.
“이 정도는 우리 기술력으로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확실히 내가 만들 만한 물건은 아니네요. 손님이 직접 음식을 가지러 가야 하는 식당은…….”
“안 좋아하니까.”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 곳에 아예 안 가 본 것은 아니었다. 기차역 안에 있는 음식점들은 다 그런 모양이었고, 그들도 아무 기차나 잡아타고 움직여야 할 때는 그런 곳에서 식사를 했다. 하지만 역시, 굳이 선호할 이유는 없었다.
음료에 대해서는 평가를 삼갔다. 아마 굳이 물었다면 혹평이 나왔을 것이다. 일회용 잔에 나왔다는 부분에서부터. 그래도 그는 음료를 전부 다 마셨다.
오히려 에스페란사가 반 정도를 남겼다. 욕심껏 크림을 잔뜩 올리고 초코 시럽을 뿌린 음료를 시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취향은 아니었다.
“차는 당신이 잘 끓이는데.”
“숙녀분 마음에 들었다니 영광이군요.”
“럭스 부인의 직업을 빼앗을까 봐 걱정이죠.”
“이런, 날 가정부로 취직시키려고요?”
“그럴 지도요. 럭스 부인의 잔소리 솜씨는 당신이 이길 수가 없지만.”
“샌드위치도.”
“아, 물론 그것도.”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는 커다랗게 울리는 캐롤에 묻혔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 걸린 미소만은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