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55
외전3. 선물 (3)
에스페란사는 익숙한 캐롤을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서점엔 나 혼자 보내려던 것 아닌가요?”
“그냥 같이 갈래요.”
시더를 보내놓고 ‘황금 발톱’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좋은 날에 굳이 그런 소식을 들여다볼 이유도 없었다.
“상냥하기도 하지.”
시더는 팔을 내밀었다. 에스페란사가 그 위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그 체온에 불안감의 찌꺼기까지 전부 쓸려 나갔다.
기계를 발동시키기 바로 직전까지, 시더는 조금쯤 불안하고 초조했다. 약속한 것이었으니만큼 에스페란사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에스페란사의 터전이다. 스물일곱 해 살아온 터전.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뿌리박고 살아왔던 곳. 결국 그가 있는 세계를 택해 주기는 했지만, 그 결정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이곳으로 온 이상 에스페란사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곳에 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든 익숙함과 편안함에 젖어 뒤돌아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기계를 작동시키기 직전까지도 그 생각은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이 도시에 발을 딛자마자 싹 잊어버리고 지나치게 즐겨 버리긴 했지만. 이렇게 고도로 발달된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한탄하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바빴지만…….
어쨌든, 분명히 그런 생각이 있기는 했다.
“얼른 가요.”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팔을 끌어당겼다. 시더는 반대편 손으로 종이가방을 바꿔 들며 에스페란사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이 도시에 자주 드나들면 된다.
움직이는 계단을 타고 도착한 서점은 널찍하고 밝았다. 원목이 아니라 옅은 회색 합판 책장을 사용했고, 장난감이나 퍼즐 같은 것을 팔기도 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저쪽에 있겠네요.”
에스페란사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같이 갈 건가요?”
“아뇨. 알아서 골라요. 난 이쪽이나 둘러볼게요.”
시더는 두꺼운 책이 빽빽이 꽂힌 서가로 향했다. 기계공학과 관련된 책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천편일률적으로 요란한 체크무늬 셔츠를 바지에 구겨 넣은 남자들 몇 명을 지나친 시더는 한쪽 팔에 책을 쌓았다.
“헬로?”
아까 지나친 남자들 중 하나가 그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시더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죠?”
습관적으로 하대가 나올 뻔했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갖출 수 있었다. 깡마른 남자는 익숙한 모국어에 얼굴이 밝아졌다.
“저쪽에 카트가 있는데요.”
“친절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아, 네.”
남자가 머쓱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시더는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에서 시선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에스페란사에게로 향했다.
“이런 걸 좋아하는군요?”
등 뒤에서 불쑥 건넨 질문에 에스페란사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놀랐잖아요! ……그거 다 사게요?”
“일단은요. 다음번에 와서 더 사면 되니까.”
“그걸 어떻게 들고 가려고요.”
“이건 사람 시키면 되잖아요. 선물도 아니니까. 아니면 혹시, 여기선 오토마톤이 배달도 하나요?”
“배달은 사람이 할걸요. 그사이 바뀐 게 아니라면. 거기보단 빠르겠지만.”
“아쉽네요. 그래서, 그것도 살 거예요?”
망설이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품 안에 가득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만화책이었다.
“이런 건 거긴 없단 말이에요. 내가 읽던 건데 그사이 몇 권이 더 나왔더라고요.”
“재밌어요?”
“나는 좋아하는 편이에요.”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당신이 이런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요.”
그야, 거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려던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눈을 찡그렸다.
“자주 오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당신도 취향이 생길지도 모르고.”
“기대되는군요.”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에스페란사의 뺨에 입을 맞춘 시더는 모른 척 두어 걸음 앞서 걸어갔다. 헛웃음을 터뜨린 에스페란사가 재빨리 그를 따라 걸었다.
“뭐야, 난 아직 다 못 골랐다고요!”
“고르지 말고 전부 사면 되죠.”
앞서가던 시더는 골라 온 책을 한쪽에 올려놓고 어린이 서가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누르면 소리가 나는 알파벳 학습용 책이었다.
“나도 어릴 때 이런 거 썼는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에스페란사가 알파벳 부분을 눌러서 보여 주었다. 시더는 책을 몇 장 넘겨 보았다. 펜을 가져다 대면 읽어 주는 책도 있었다.
“이런 것도 만드는군요.”
“당신도 만들 수 있어요?”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요. 하지만 이런 건 기술보단 발상의 문제라서.”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 생각이 닿은 적도 없었다. 시더 클라이번의 발명품들은 훌륭했지만 그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나 그렇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수많은 시선이 필요했다. 단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평범한 연구자들이 필요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혼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시더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난 이 세계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그래 보였어요.”
에스페란사는 웃으며 만화책 더미 위로 시더가 보던 어린이용 책을 올렸다.
“그럼 이제 살 만한 건 다 산 거죠?”
책은 전부 택배로 보냈다. 양팔이 홀가분해진 에스페란사는 기분 좋게 바깥으로 나왔다.
“으, 춥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깜깜해진 바깥에 노란 가로등이 켜졌고, 그사이 눈이 왔는지 인도에는 엷은 흰 융단이 깔려 있었다. 가게마다 틀어대는 노래가 뒤섞였다.
팔짱을 낀 채 인파를 가로지르던 중,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어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와서 좋긴 한데, 꼭 다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요?”
“가끔씩만 오는 게 좋겠어요. 일단 너무 춥고…….”
빨갛게 언 코에 입을 맞춘 시더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고개를 들었다.
“추위를 잘 타는 편은 아니잖아요?”
에스페란사의 몸은 온도 변화에 둔감했다. 온도를 인식은 하지만 영향을 덜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효율적인 몸으로도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원래 이렇게 추워하진 않았는데. 어, 붕어빵!”
변명을 덧붙이려던 에스페란사가 갑자기 어느 노점으로 달려갔다. 차양 하나를 드리웠을 뿐으로, 건물의 형태조차 갖추지 않았다. 느긋하게 다가간 시더는 상인이 솜씨 좋게 기계에 반죽을 넣고 붕어 모양 빵을 찍어 내는 것을 구경했다.
“한 봉지 주세요!”
“우리 말을 잘하시네요?”
그 말에 오묘한 얼굴을 한 에스페란사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봉투에 갓 구운 붕어빵 여섯 개를 넣은 상인이 돈을 셌다.
“오래 살았거든요. 여기가 좋아서요.”
“우리나라가 좋지! 옆에는 남자친구예요? 잘생겼네! 원래 한 봉지에 다섯 갠데 하나 더 넣었어요. 남자친구랑 둘이 싸우지 말라고.”
에스페란사는 언 뺨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며 웃었다.
“외국인 취급은 생각을 못 했네요.”
“아까부터 사람들이 쳐다보던 게 그것 때문인가요?”
“아니, 외국인은 많아요. 그건 그냥 당신이 눈에 띄어서 그런 거고.”
시더의 입에 붕어빵 하나를 물려 준 에스페란사가 봉지를 끌어안았다. 시더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때문에 눈에 띄는 건 그가 평생토록 겪어 왔던 일이었다. 거기에 드물게 깨끗하고 긴 금발이 더해진다고 하더라도 특별할 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한 손에 붕어빵 봉지를 들었고, 시더는 선물과 태블릿이 든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빈손은 서로를 단단히 붙들었다.
주택가로 접어들자 붐비던 인파도 차츰 줄어들었다.
녹색 보도블록과 잎이 떨어진 은행나무. 동그란 가로등. 빈 놀이터. 길을 빽빽하게 둘러싼 아파트들. 익숙한 것이 주는 감상이 목 아래에 단단히 뭉쳐 있었다.
아마도 에스페란사는 평생 이것들을 보며 묘한 그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떠나온 것은 의지가 아니었으나, 도달한 곳에 머물기로 한 것은 오직 에스페란사의 의지였다. 다시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이곳에 머물기 위함은 아니었다.
잠시 묵었다 떠나갈 고향.
“아, 저 아파트예요. 취직하기 전에는 자주 드나들었는데.”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듯 깨끗한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며 에스페란사가 문득 물었다.
“언니가 날 알아볼까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날 못마땅해할 가능성은 아주 크겠지만 말이죠.”
커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최고급 시계는 그러니까…… 뇌물이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는지 시더의 손을 꽉 붙잡았다.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 에스페란사의 심장은 쉴새 없이 쿵쿵 뛰었다. 긴장감에 뻣뻣해진 뺨을 시더가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려 풀어 주었다.
“괜찮을 거란 걸 알잖아요.”
“그래야 할 텐데.”
“선물을 주고받는 시기라면서요? 당신은 당신 자체로 가장 근사한 선물이니까.”
말이나 못 하면. 긴장이 조금 풀렸다. 에스페란사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당신한테도 그래요?”
“그 이상이죠.”
“나한테 당신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봤죠?”
말문이 막힌 시더가 낮게 신음했다. 에스페란사는 그의 손을 고쳐잡으며 말했다.
“날…… 도와줘야 돼요.”
“걱정 말아요.”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시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페란사는 떨리는 손끝으로 초인종을 꾹 눌렀다.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오는 집 안에서 문고리를 쥔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숨이 막힐 듯한 3초간이었다. 어색한 미소만 지은 채 서 있던 에스페란사가 입을 달싹인 순간, 여자가 에스페란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깨가 뜨끈한 물로 젖어 들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최고급 시계, 그 무엇보다도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외전 완결 @JV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