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억지 부리는 건 내 역할 아닌가요? 기막혀하는 쪽이 당신 역할이고.”
그 말에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술이 풀리자, 시더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건, 당신이 날 남자들한테 보내 버려서 그런 거잖아요? 배신자.”
이건 또 밑도 끝도 없는 공격이다. 에스페란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깜박이다가 대꾸했다.
“그러지 말라고 오기 전에 말을 했어야죠. 싫어하는 줄 몰랐죠.”
사실 그때 눈치챘지만,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시침을 뚝 떼고 그렇게 말하자, 시더가 하, 하고 탄식했다.
“말했으면, 배신 안 했겠어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건…….
“그건 모르죠. 아마도?”
“거참 믿음직스럽네요.”
대화가 그쯤에서 끊겼다. 한 숙녀가 조금 큰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두 사람, 참 친해 보이는군요.”
눈앞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숙녀가 대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주었다.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팔에 손을 얹은 채라 두 사람의 팔은 줄곧 겹쳐져 있었다. 굽이 있는 무도화를 신었지만 키 차이가 있어 턱을 치켜든 에스페란사의 콧등과 고개를 조금 숙인 시더의 턱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런 상태로, 그 사실을 인식도 못 한 채 자기들끼리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에스페란사 헌터. 백작이 피후견인이라고 주장하는 숙녀였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누군들 그 의심을 안 했겠는가 말이다.
“친하기는요.”
“에이번데일, 자네가 누군가의 후견인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
“피치 못할 사정이었지.”
“마이클 헌터 씨라고 했던가? 파오룬에 대리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맞아요. 사업체가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제 기술이나 발명품을 식민지 법에 맞춰서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헌터 씨는 파오룬에서 관련 일을 맡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에스페란사 헌터의 신분도 대강 짐작이 간다. 아마 부유한 젠트리 정도. 파오룬에서 에이번데일의 기술을 파는 일을 했다면 유산도 적지는 않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살피듯 멀찍이 있던 사람들이 조금 더 호의를 가지고 다가왔다.
“에스페란사…… 이국적인 이름이네요.”
“멋진 것 같아요! 왜 할아버님은 제 이름을 메리라고 하셨는지.”
그렇게 말한 ‘메리’는 메리 엘리자베스 탤벗으로, 쇼드니 공작의 조카딸이자 여왕의 먼 친척이었다. 촌스러운 이름이 붙은 것은 순전히 고리타분한 혈통 때문이었던 것이다.
“제 이름은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거예요. 살라망카 분이셨거든요.”
“어머나,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헌터 양은 외모도 이국적이네요.”
개뿔이다. 이 얼굴은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빚어내기 위한 커스텀의 산물이었으며, 이름은.
‘작명소에서 지었지.’
진짜다.
헌터 협회 건물 옆엔 허름한 작명소가 있는데, 목을 잘 잡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허접한 이름으로 게임에 접속한 신입 헌터들이 이 이름으로는 도무지 게임을 진행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즉 헌터증에 기막힌 필기체로 이름이 적혀 나올 때. 바로 그 눈앞에 허름해서 왠지 더 영험해 보이는 작명소가 보이는 것이다.
에스페란사도 바로 그런 희생양 중 하나였다. 그들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에스페란사의 원래 이름은 모바일 게임 과자런에서 쓰던 닉네임 그대로 ‘친절한 탕수육’이었다.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당장 작명소로 달려가서 이름을 바꿔 가지고 나왔다.
미스 친절한탕수육 헌터가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또 이상한 생각 중이죠?”
시더가 중얼거리듯 입술만 달싹여 물었다. 에스페란사가 대답했다.
“네.”
“……그걸 또 그렇다고 대답해요?”
“진짜 이상한 생각 중이었어요.”
예를 들면 시더 클라이번이 그 달큼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에스페란사’ 대신 ‘친절한탕수육’ 하고 부르는 생각이라든지.
“어머, 진짠가 보네요?”
“그렇다니까요.”
“세상에, 저 에이번데일이…….”
또 자기들끼리 노냐는 시선들이다. 시더는 어깨를 으쓱이고 몸을 조금 뒤로 뺐다. 조지 바이런이 에스페란사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고 갔을 때에야 그 시선들이 사라졌다.
“미스 헌터는 춤을 추러 가는데 자넨 왜 아무것도 안 하나?”
레이디 퍼스가 엄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해서 말입니다.”
“피곤은 무슨.”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시더는 열심히 버텼다. 레이디 퍼스는 그의 죽은 대모의 언니였는데, 그래서인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시더에게 묘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책임감이 그를 챙겨 주는 식으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귀찮은 사교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식으로 발현되는 게 문제였다. 이를테면 레이디 퍼스가 지목하는 대로 벽의 꽃을 구제하는 자선 사업가 노릇을 해야 한다든지.
“미스 헌터는 좋은 사람이던가?”
“같이 지내 본 바로는 나쁜 구석은 없었습니다.”
“같이 지내 봤다고 할 정도로는 부대끼고 살았나 보군?”
아, 능구렁이 같은 노부인은 이래서 싫다. 시더는 웃었다. 입 무거운 노부인 앞이니 필요한 경우에는 그와 에스페란사의 평판을 조금 희생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리며.
“한집에 사니까 별수 없지요.”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속는 얼간이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여도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과 부대끼고 살 성정이 아닌 건 안다, 에이번데일.”
레이디 퍼스는 시더가 답하려는 것을 막고는 이어 말했다.
“어떤 계기로든 네가 사람에게 마음 붙이는 것, 나는 환영이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시더는 지금도 에스페란사에게 보이는 호의의 이유를 줄줄 읊을 수 있었다. 그중 무엇도 레이디 퍼스에겐 말할 수 없지만, 결단코 마음을 붙이느니, 부대끼고 사느니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단코 아닌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아닌 것 정도로.’
아무튼 아니었다. 시더는 조지 바이런의 손을 붙잡고 빙글빙글 도는 에스페란사를 불만스레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에스페란사는 바이런 따위와 춤을 추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기분이 나빠 보이네요.”
잠시 후 조지 바이런의 에스코트를 받아 돌아온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에이번데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춤췄으면 이제 가게.”
바이런은 에스페란사에게 미련을 두는 듯하더니, 의외로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바이런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 자신도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뻔뻔하게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의외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여요.”
“아? 그래 보여요?”
그럼 춤을 추지 말았어야지, 하는 촌스러운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모름지기 무도회란 춤을 추는 장소였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 낭비, 특히 관심 없는 사람과의 교류를 극히 꺼리는 시더조차 무도회에선 춤을 추었다. 남들이 보기엔 안 춘 것에 가깝지만, 아무튼 추긴 했다.
“여자 얘기밖에 안 하더라고요.”
“아하.”
에스페란사로서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긴 했다. 켄드릭처럼 구는 것보단 그냥 여자라면 다 들이대 보는 한량인 편이 떨쳐 내기 편했으니까. 켄드릭은…… 이 파티에 안 와서 정말 다행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집에 가나요?”
목적은 예상보다 넘치게 달성했다. 사교계에 눈도장도 찍었고, 이런저런 신사 숙녀들도 소개받았고, 예의도 차릴 만큼 차렸다. 이젠 충분히 돌아가도 되는 시간이었다.
“아뇨.”
“그럼요?”
“마지막 춤곡이 남아 있잖아요.”
조지 바이런과의 춤이 열 곡 중 여덟 번째였고, 지금 아홉 번째 춤이 시작됐으니 딱 하나가 남긴 했다.
“……춤추는 거 싫어하지 않아요?”
“싫어해요.”
“그런데 왜…….”
“구색은 맞추는 편이 좋기도 하고, 레이디 퍼스의 명령이기도 하고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레이디 퍼스는 시더에게 백만 년 만에 무도회에 왔으니 한 곡은 더 추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사실상 마지막 곡까지 꽉꽉 채우라는 뜻이다.
그 말에 누구와 추라는 말은 없었지만, 선택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야.”
“당신은 좋아하나 보죠, 춤추는 것?”
“싫어하진 않아요. 굳이 따지자면 춤이라기보다는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사격, 승마, 전투.”
“이상한 게 끼어 있는데.”
“승마는 좀 다르긴 하죠.”
백작과 헌터의 시선은 이렇게 차이가 크다. 그리고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집에만 있지 않나? 시더는 싱겁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승마도 할 줄 알아요?”
“몸 쓰는 건 뭐든 잘해요.”
“하긴. 그래 보이긴 했어요. 하지만 증기 마차가 있는데 굳이 말을 탈 필요는 없죠.”
증기 마차의 시대에 굳이 마구간을 마련해 놓은 백작이 말했다.
때마침 곡이 끝나고, 댄스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이 인사하고 내려온다.
“이것만 끝나면 돌아가는 거죠?”
“피곤해요?”
“그것도 있고.”
에스페란사는 말끝을 흐렸다. 체력적으로는 괜찮았다.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 뿐이었다. 시더도 그렇지만, 에스페란사도 사람이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보다는 차라리 몬스터가 많은 데가 낫지.’
전지적 헌터 시점이다.
마지막 곡이 시작될 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댄스 플로어 근처에 있었다. 춤을 추려는 사람도, 구경만 하려는 사람도.
“다들 쳐다보는 것 같아요.”
“우릴 보는 건 아닐걸요.”
일부러 그렇게 말했지만,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워낙에 나타나는 일이 없는 유명 인사 에이번데일 백작과 그가 데려온 연고 없는 피후견인은 호사가들에게 씹고 뜯을 거리를 하나 던져 준 셈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인 호더 최고의 가십거리도 댄스 플로어에 나와 있었다.
“코델리아를 보는 거였구나.”
시더처럼 춤을 안 춰 버릇하는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코델리아를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소녀의 손을 잡은 남자가 마벨우드 남작도 곧 인정할 만큼 괜찮은 신랑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혹시 그가 던바틴 대신 코델리아의 새 신랑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내지는 불안감.
숙녀가 먼저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신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하자 음악이 시작됐다. 대열에 맞춰 빙글빙글 도는 춤은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곡답게 약간 느린데도 경쾌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빙글 돌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뭔데요?”
스텝에 맞춰 뒤로 빠졌던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들어 당겼다. 피부를 살짝 누르는 손길이 능숙했다. 춤을 즐기지 않는 사람답지 않게.
“왜 날 코델리아에게 접근시켰어요? 마벨우드 남작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