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7
27화
“내가 아니라 레이디 퍼스가 한 거죠.”
그는 습관처럼 부인했다. 하지만 상대는 쉽게 속아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일부러 레이디 퍼스한테 먼저 갔잖아요? 아무튼 왜 그런 거예요? 코델리아가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도 미지수였는데.”
“레이디 코델리아는 마벨우드의 후계자예요. 본인도 사건과 관련해 겪은 일이 있으니 당연히 잘 알겠죠.”
잠깐 춤이 빨라지면서 말이 끊겼다. 숨이 약간 가빠졌다. 흰 천에 감싸인 어깨가 들썩였다. 그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어요. 잘 봐요. 백발, 초록 드레스, 갈색 부채.”
그 말과 동시에,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에스페란사의 몸이 한 바퀴 돌았다. 댄스 플로어 바깥의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백발, 초록 드레스, 갈색 부채. 아주 잠깐이었다. 눈앞이 다시 시더의 크라바트와 단단한 어깨로 가로막혔다. 얼굴이 가려지자 에스페란사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라도 걸었다간 봉변당할 것 같은 얼굴이네요?”
“바로 그래서죠. 마벨우드 남작은 던바틴과 혼담이 깨진 이후로 줄곧 저런 얼굴로 나타나거든요.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요.”
납득 가는 이유였다. 던바틴 공작이 마벨우드에 던진 폭언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런데 거기에 마벨우드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나선다?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다.
“좋은 선택이었죠?”
칭찬을 종용하듯 묻는 말에, 잠깐 원하는 걸 내주기 싫어졌지만 이내 인정했다.
“좋은 선택이었어요. 훌륭해요.”
그들은 마주 서서 공범의 짧은 웃음을 공유했다. 춤이 끝났다. 요정의 나라 같은 온실에서의 파티도 끝이 났다. 에스페란사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파티는 좋은 끝을 맺었으므로 중간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은 잊기로 했다.
험프리 부인의 파티는 훌륭했다. 한 가지, 부인의 잔디깎이 오토마톤이 기절한 강간 미수범의 몸을 장애물로 인식하고 밤새 부딪히다 고장 나 버린 것을 제외하면.
* * *
에이번데일 백작 저택의 하녀, 애니는 탁자의 먼지를 닦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저택에 함께 살게 된 에스페란사 아가씨가 대강 자기 머리를 땋아 내리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제가 더 잘해 드릴 수 있는데…….”
“됐어, 별거라고. 어차피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머리를 틀어 올리는 건 예쁘긴 하지만 두피가 아프다. 하루 종일 틀어 올리고 있으면 다음 날 머리가 잔뜩 빠지는 것 같았다.
유독 촘촘하고 풍성한 머리칼이라 하루 이틀 고생한다고 갑자기 휑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에스페란사는 집 안에 있을 때는 머리를 풀어 헤치거나 성기게 땋아 내렸다. 풀어 헤치는 건 저택 안에서 뒹굴 때, 땋아 내리는 건 사격장에 갈 때 정도로 나뉘었다.
“땋아도 예쁘세요.”
애니가 발간 얼굴로 말했다. 에스페란사의 보랏빛 눈동자가 휘어지자 애니는 절세미인의 키스를 받은 것처럼 황홀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너.”
에스페란사가 질린 듯 내뱉었다. 애니가 키득거렸다. 방금 건 좀 과장하긴 했다.
“아가씨, 마이튼 홀에 가 보고 싶으시진 않으세요? 나인 호더까지 오셨는데.”
“마이튼 홀? 아…… 거기.”
13년 후에도 마이튼 홀은 있었고, 솔직히 13년 전에 비해 화려하면 화려했지 지금만 못할 것 같진 않았다.
“별로 관심 없는데?”
“아가씬 너무 검소하세요. 거긴 구경만 해도 그렇게 별세계라는데. 바닥 전체에 타일이 깔려 있고 천장은 유리로 돼 있대요. 그래서 해가 뜨면 타일이 오색 빛으로 빛난다던데.”
“으응.”
“세상에서 제일 예쁜 옷이나 리본들은 다 거기서 판다고 하더라고요. 아가씨, 리본 안 필요하세요? 저번에 쓴 하얀 모자에 분홍색 리본을 달면 정말 예쁠 텐데.”
예쁜 건 좋다. 귀찮긴 하지만 애니의 안목도 괜찮고, 답답한 것 같으니 잠깐 같이 외출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어차피 누가 가둬 두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정말 관심 없으세요? 아니면 진주 귀걸이나. 아가씨 진주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백작 부인의 보석들 중에 있거든요. 제가 몰래 가져와 볼, 꺅!”
거울을 흘끔거리며 떠들던 애니가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아, 아가씨, 어, 언제 오셨어요?”
그 짧은 순간, 에스페란사가 애니의 손목을 끌어당긴 채였다. 분명 저쪽 화장대에 앉아 계셨는데?
“다친 덴?”
“없어요!”
에스페란사는 애니의 상태를 대강 확인한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애니가 비명을 지르게 만든 문제의 물건을 손목 스냅으로 가볍게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주사위 형태의 마도구. 정보상 ‘선생’이 준 것이다. 애니가 놀란 것은 이 물건이 불빛만 뿜어내는 게 아니라…….
따르르르릉!
소리까지 났기 때문이다.
“삐삐?”
“네?”
“아무것도 아니야.”
마이튼 홀이고 뭐고, 전부 취소다. 이 빌어먹을 물건을 해결하고, 정보상에게 다녀와야겠다.
“마이튼 홀엔 못 가겠다, 다음번에 가자.”
“네, 네.”
애니는 여전히 귓가에 그 무식한 기계음이 울리는 것 같다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에스페란사도 그랬다. 귀가 먹먹했다.
“그, 근데 이거 어떻게 멈추는 거예요?”
“몰라.”
두 기계치는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기계음을 멈출 방도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기 귀를 막았다.
“다행히 이 집엔 알 만한 사람이 있잖아? 가서 물어보지 뭐.”
컴맹 엄마가 막내아들을 찾듯 말한 에스페란사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따르릉따르릉 난리가 난 수신기를 인벤토리 안에 던져 넣었다.
시더의 서재는 늘 문이 닫혀 있다. 에스페란사는 두 번 노크를 했다.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연구실에 있다는 뜻이다. 그 안은 대체로 요란하니까. 그럼 에스페란사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이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서재까지는 자유롭게 드나들게 됐다.
하지만 연구실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서는 아니었다. 그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막 들어가겠는가? 잘못해서 뭐라도 밟았다간 어떤 사고가 날 줄 알 수 없으니 그냥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닫힌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밀런?”
“에스페란사예요.”
“아? 아, 잠깐 기다려요.”
갑자기 분주해진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우당탕탕. 그러나 잠시 후 열린 문 안쪽은 깨끗했다.
치운 건가? 안 보여 주려고?
왠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지금까진 잘 보여 줬으면서. 뭐길래 숨기는 거지?
“무슨 일이에요?”
시더는 멀쩡한 꼴이었다. 머리칼이 약간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리고……
“외알 안경?”
“안경은 아니고, 돋보기 같은 거죠. 작은 부품을 볼 때 써요. 써 볼래요?”
그가 금빛 체인이 달린 외알 안경을 벗어서 내밀었다. 에스페란사는 그것을 받아 자기 눈에 끼웠다.
“반대쪽 눈은 감아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내려 가리자, 시더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러나 그걸 타박할 정신도 없었다. 안경알에 비친 시야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에스페란사도 모노클 아이템이 몇 개 있다. 완전히 스팀펑크 느낌을 낸 물건이라 이렇게 가볍고 단순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시더의 모노클도 그런 것들처럼 공격 속도나 민첩도가 올랐다는 알람은 없었다. 다만 철저히 연구용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시야에 들어오는 기계의 내부가 투시됐다. 말도 못 하게 복잡한 구조에 눈이 다 어지러웠다.
“안 쓸래요.”
안경을 벗고 나니 눈앞이 빙빙 돌았다. 눈은 빙빙 돌고, 귀는 먹먹하고, 가지가지 한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요?”
새삼 마지막으로 이 연구실까지 들어온 게 일주일은 됐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인벤토리에서 수신기를 꺼냈다.
따르릉거리는 시끄러운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하필이면 사방이 막힌 연구실이라 더 정신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수신기를 내려놓고, 귀를 막았다.
“이거 어떻게 꺼요?”
“……이것 때문에 왔어요?”
“네.”
“이걸 못 꺼서?”
“……네.”
내가 한심한가? 나도 한심하다.
에스페란사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 수신기는 에스페란사가 처음 써 보는 형태였다. 그럼 모를 수도 있지.
구시렁대고 있자, 시더는 수신기를 돌려서 소리를 껐다. 매우 단순하게, 직관적으로.
“돌아가는 거였어요?”
“보시다시피.”
“별것도 아니었네?”
“그 별것도 아닌 걸 못 꺼서 여기까지 찾아온 게 당신이고요.”
“아, 대단하시구나…….”
“아뇨, 별것도 아니죠.”
드문 겸양이었고, 그래서 더 재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입을 오므리며 투덜거렸다. 생긴 것처럼만 겸손하면 얼마나 좋을까? 청초한 눈웃음과 나긋나긋한 입매, 부드러운 금발과 희고 곧은 손처럼 성격도 딱 그런 쪽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냔 말이다.
이런 업적을 만들어 놓고 그런 성격으로 살기도 참 어렵겠지만서도.
“속으로 내 욕하지 말고.”
“아, 네.”
시더는 혀를 찼다.
“도와줘도 욕부터 먹다니,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대화의 흐름이 좀 불리하게 흘러갈 것 같자, 에스페란사는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게 정보상이 보낸 연락이겠죠?”
“네, 좀 조잡하지만, 저게 최선이었겠죠.”
“내일 저걸 해결하러 다녀와야겠네요.”
“또 얼터 지구로 가려고요?”
그럼, 그쪽에서 에이번데일 저택으로 팩스라도 보내 줄 것 같은가? 그게 된다면 더 문제 아닌가.
“……다녀와요.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들키기야 하겠어요?”
그 말은 좀 신중했어야 했다.
* * *
“……미스 헌터? 왜 그런 꼴, 아니, 모습으로 이런 데에? 물론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얼빠진 목소리.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런 곳을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에이번데일 녀석, 연약한 숙녀를 혼자 이런 곳에 보내다니……!”
당장 저택으로 가서 따질 기세였다. 에스페란사는 가뜩이나 허름한 거리에서 혼자 번쩍거리는 꼴로 시선을 잔뜩 모으는 펄즈베리 자작, 켄드릭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