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3
3화
그는 낫을 분해해 볼 생각에 들뜬 것 같았다. 대화에 관심을 잃은 듯 낫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낫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 같으니, 돌려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야겠다.
“아무튼. 저는 제 무기를 연구용으로 드리고, 로드… 알번즈데일?”
“에이번데일.”
‘로드 에이번데일’이 혀를 찼다. 이름이 더럽게 어려운 게 어떻게 에스페란사 탓이겠냐마는, 두 번씩 실수하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외웠다.
“에이번데일, 에이번데일. 로드 에이번데일은 저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거죠?”
“그런 셈이죠. 좋은 거래군요.”
이름을 실수한 것에 대한 불만은 여전해 보였지만, 거래에 대해서는 서로 만족했다. 그거면 된 거지.
“이제 계약서라도 써야 하나요? 아니면 악수라도?”
계약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다. 로드 에이번데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숙녀와 악수해 본 적은 없지만, 나쁠 것 없죠.”
“엄연히 말하면 제가 숙녀는 아니니까요.”
“내 손님이 된 이상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할걸요.”
‘그런 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가르쳐 주지 않은 채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장신이었다. 결코 작지 않은 에스페란사의 키에 비해서도 머리 하나 반이 큰 남자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박인, 펜과 공구를 만지는 사람의 손이다.
쭈뼛거리며 마주 일어나 손을 내밀려는데, 의례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백작님, 차를 가지고 왔…….”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밀런이 본 광경은 무방비 상태의 여성과 날이 시퍼런 낫을 든 주인이 마주 서서 대치하는 광경이었다.
“……혹시 제가 숙녀분의 안전을 위해서 백작님께 스티뮬러를 겨눠야 하는 상황입니까?”
젊은 하인의 손이 꾸물거리며 앞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면서도 눈을 굴리며 어떻게든 이 상황의 답을 찾으려는 것이 꽤 우스꽝스러웠다.
갑작스러운 밀런의 등장으로 조용해졌던 방은 이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침묵에 둘러싸였다. 로드 에이번데일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는 의미이기보다는 ‘내가 앓느니 죽지’에 가까워 보이는 태도였다.
에스페란사는 견디지 못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시계의 초침 소리와 섞였다.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엄청 노려보고 있다.
고개를 살짝 들자, 눈을 흘기던 로드 에이번데일이 갑자기 눈을 접으며 마주 웃었다. 그제야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아직도 웃음기를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겨우 일직선으로 만든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왠지 보복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밀런? 럭스 부인에게 숙녀분께서 급하게 오시느라 옷을 못 가져오셨으니, 어머니의 옷장을 내어드리라고 전해.”
나쁜 얘기가 전혀 아닌데?
“어머니의 옷을 관리하던 하녀를 옷 시중으로 붙여 주라고도. ‘비용은 얼마가 들든 좋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말고.”
“어, 정말입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밀런이 눈치를 살피는 대상은 백작이 아니라 에스페란사 쪽이었다. 좋은 얘기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이 말을 취소하게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로드 에이번데일은 불길할 정도로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요, 에스페란사. 그런 옷을 입고 외출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양쪽의 눈치를 보던 밀런이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헌터의 복장은 기본적으로 스팀펑크 느낌을 내고 있어 아주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복장은 아니었다. 이벤트 복장 중에는 귀가 달려 있다든가 하는 것들이 더러 있지만, 에스페란사가 입고 있는 것은 평범했다.
이 시대의 NPC 기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겠지만.
딱 달라붙는 검은 바지, 녹색 블라우스와 멜빵, 허리띠에 매달린 작은 가방, 무릎도 덮지 못하는 길이의 망토를 여미는 체인. 팔을 따라 장식된 톱니바퀴. 그리고 외투와 같은 색의 챙 있는 모자와 바지와 같은 색의 군화.
어느 모로 봐도 이 시대의 여성이라면 절대 입지 않을 복장이다. 물론 남성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도 안 돼요. 내가 허락해도 고용인들이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예, 뭐. 어차피 이건 전투복이고요.”
공짜로 주는 옷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 로드 에이번데일이 거듭 말하는 것은 그저 보수적인 나인 호더 귀족으로서 느끼는 거부감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렇게 멀쩡하게 상식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부르셨어요, 백작님? 숙녀분이 있다고…… 어머나.”
그때 럭스 부인임에 분명한, 그러나 아직 스스로를 소개하지는 않은 중년 부인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더니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일 줄이야.”
그러고는 마치 다 큰 아들이 집에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을 본 어머니마냥 은근한 눈으로 백작을 흘끔거리는 것이다.
백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럭스 부인, 내 대신 손님 접대를 부탁하네.”
럭스 부인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저는 가정부답게, 그리고 백작님께서는 주인답게, 각자의 자리에서 숙녀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랍니다.”
그제서야 럭스 부인을 정식으로 소개받을 수 있었다.
소개받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축에 속하므로, 에스페란사는 럭스 부인이 소개할 때까지 없는 사람인 양 입을 다문 채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방을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동안 응접실을 쓰면 되겠군요. 치수를 재고 마님의 옷을 조금 수선하면 될 것 같아요.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아, 아뇨.”
“어머, 고용인에게도 존대라니, 상냥하셔라.”
‘로드 에이번데일’은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 낫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예의상의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였다. 에스페란사는 럭스 부인이 대체 어떻게 저 거대한 낫보다 자신의 존재를 먼저 알아챈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낫을 못 본 건 아니겠지.
끝까지 럭스 부인은 낫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에스페란사는 부인이 낫을 정말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모른 척한 것인지 물어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로드 에이번데일의 서재에서 나와 응접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해가 질 때까지 거의 정신을 잃은 채였으니까.
“하얗게 불태웠다…….”
퍼프 소매의 푸른색 드레스는 우아하고 예뻤다. 확실히 이 시대의 유행에서 10년 가까이 비껴가 있었지만, 에스페란사의 눈에는 옛날 옷이라는 점에서 그게 그거였다. 로드 에이번데일의 옷차림도 에스페란사가 게임을 하던 시점에서는 고대 유물이니까.
그러나 이 옷을 고르기까지, 백 벌 가까이 되는 옷을 하나하나 다 입어 보고, 체형에 맞춰 수선하는 데 들었던 시간과 체력을 생각하면 그저 예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중간에 식사라도 하지 못했으면 지금쯤 정말 뻗어 버렸을 것이다.
“그 인간 일부러 이랬어.”
천은 고운 공단이고, 치마 밑단은 길고 장식적이다. 팔에는 레이스가 촘촘했다. 백작 부인 정도 되는 인물이 아니고서는 입을 일이 없을 듯한 복장이다. 입고 있자니 뒤늦게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옷의 현재 주인이자 원주인의 아들을 떠올리자, 그의 못된 의도마저 똑똑히 새겨졌다.
비웃었다고 골탕 먹인 거다. 호의가 한 톨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골탕 먹인 거다. 그를 다시 보면 고맙다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지. 이건 확실히 고맙다고 해야지.’
마치 그의 검은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마냥. 조금 힘들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마냥 말이다.
원래 에스페란사는 예쁜 옷을 좋아했고, 캐릭터 커스텀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니까 ‘에스페란사’에게 이렇게 예쁘장한 얼굴과 설정 과다다 싶은 화려한 색감을 덕지덕지 발라 놓았지. 그저 럭스 부인의 열정이 에스페란사가 견딜 수 있는 수준보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높았을 뿐이다.
그래도, 난데없이 게임 속 배경으로부터 13년 전인 세상에 떨궈진 것치고는 시작이 좋다.
“로그아웃.”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사실 ‘황금 발톱’의 메뉴는 음성 인식 기능이 없었다. 그런 기능이 있었다면 유저들끼리 ‘나 조금 있다가 로그아웃함.’ 같은 대화도 나눌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나 했다.
“로그아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쓱해져서 공단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소리를 들었는지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두 배로 민망해졌다. 겨우 하녀를 돌려보낸 에스페란사는 푸우우, 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에이번데일 백작 저택을 탐사하다 이렇게 된 게 다행이지, 저번 퀘스트처럼 뒷골목에서 살인마 변종 몬스터 찾기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쯤 어느 판잣집 한 칸에 들어가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이상한 곳으로 떨어졌어도 방이 쾌적하고 침대가 푹신하니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해야 할 때였다. 로그아웃도 먹히지 않는다. 백작 앞에선 차마 못 해 본 음성 인식까지 시도해 보았지만 당연히 소용없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어떡하지?”
언제까지 이 집 안에 붙어 있는 건, 뭐, 지금 백작의 행동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인벤토리 내의 물건을 조금씩 떼어 주면서, 13년 후의 기술 얘기도 해 주면서.
어쩌면 에이번데일 백작의 죽음을 막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옆에 잘 붙어 있다가 목숨을 구해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사망 원인은 역시 몬스터 사태일까?
몬스터 사태.
사실 13년 후에 같은 규모의 사건이 일어났다면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던전 파훼법, 마도구와 마법 무기들, 그리고 던전 파훼의 전문가인 헌터들까지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던 때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그것은 끔찍한 사고가 되었다.
게임 프롤로그로 본 사고에 대해서는 게임의 배경이라는 것 외에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1년 후에도 게임 속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실제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