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켄드릭도 집사도 없는 응접실에서, 에스페란사가 켄드릭의 코트를 벗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사나 숙녀는 절대 저렇게 앉지 않는다. 시더가 나직이 혀를 찼다.
“옷, 안 보였죠?”
“아깐 안 보였는데 지금은 보이네요. 누가 들어올 줄 알고 그러고 있어요?”
“악, 몰라요. 피곤해.”
나 좋다는 사람은, 나도 좋아질 줄 알았다. 에스페란사는 최대한의 예의로 켄드릭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불편하기만 한 것은, 역시 취향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것보단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겠지. 저 재수 없는 백작이 싫지 않은 것은, 물론 얼굴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스페란사에게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피 뽑고 쉴래요?”
“……그 말 진짜였어요?”
“그럼요. 정말 조금만 뽑을게요. 저번에 내가 얼마나 잘 뽑아 갔는지 기억하죠?”
“저번에 사기 쳤잖아요. 진짜 약속 잘 지킨 것처럼 말해 봤자, 얼마나 된 일이라고?”
찔리는 게 없는 시더는 눈도 깜짝 않고 미소 지었다.
“날 못 믿어요?”
“……믿을 것 같아요?”
“하지만 피는 줄 거죠?”
한 번은 어려워도 두 번은 쉽다. 언쟁하기도 귀찮고, 저번만큼만 뽑을 거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묘하게 판단 능력이 떨어진 상태인 에스페란사가 블라우스의 소매 단추를 풀었다.
풍성한 녹색 블라우스 소매 안쪽에서 핏줄이 비치는 흰 팔목이 나타났다. 그 거대한 총을 자유자재로 다룬다기엔 무척 작고 여린 손이었다. 그러나 굳은살이 박인 부위는 확실히 총잡이의 것이다.
시더는 손바닥을 거슬러 올라가 손목의 핏줄에 손을 댔다. 바늘로 찔린 상처는 어느덧 아물어 있었다.
“음. 측정을 해야겠어요. 상처가 안 보여서.”
그러니까, 그때 만들어 둔 상처를 헤집을 생각이셨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기자, 시더가 빙그레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손목을 매만졌다.
“마력 측정 안 한다니까요. 자연스럽게 데리고 가지 마세요.”
“아프지 않게 할게요. 날 믿잖아요. 그렇죠?”
이따위 것도 신뢰라고 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시더는 말을 지켰다. 약간 따끔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원흉의 발을 밟으니 그것도 참을 만했다. 원흉은 지은 죄가 있는 만큼 얌전히 발을 내주었다.
새빨간 핏방울이 팔뚝을 따라 흘렀다. 시더는 한 방울도 아깝다는 듯이 피를 충분히 뽑아 간 다음에야 에스페란사를 놔 주었다. 남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 내며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하길래 발을 꽉꽉 짓밟아 주었다.
좀 놀라고 아파하길 바랐건만, 자기 팔에 직접 상처를 낸 인사답게 그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서비스 정신이야, 뭐야? 에스페란사는 시시해하며 소파로 돌아가 쿠션을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았다.
시더는 가보 모시듯 피가 든 유리병을 가져다 놓고 서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그가 툭 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들켰어요?”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에스페란사가 흔들리는 눈으로 천천히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시더는 입매를 비틀며 답을 기다렸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날 무슨 빈민가 어린애 데리고 봉사 놀이하는 여자로 알아요. 안 들켰어요.”
“그런 걸 했어요? 아. 자선 사업?”
“사업이라기엔 너무 소규모죠. 어린애 하나 데려다 매일 빵 한 개씩 먹게 해 준 것뿐이에요. 그다지 순수한 이유도 아니었고.”
신문팔이 잭을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잭처럼 빈민가 소년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 밑바닥의 정보를 받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걸 자선이라고 한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그래요. 어쨌든 괴짜 아가씨로 보이는 편이 당신의 능력을 들키는 것보단 낫죠. 하지만 당신 옷차림은 그냥 괴짜 정도가 아니에요. 잡혀간다니까.”
몇 번 봤다고 이제 전처럼 눈살을 찌푸리지는 않게 됐다. 하지만 시더는 저 차림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도 상당히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그 사람이 그렇게 보여도 상당히 순진하고 편견 덩어리인 사람이라 잭이랑 같이 다니니 정말 내가 대책 없이 어린애 하나 믿고 빈민 구제라도 하러 나온 줄 알던걸요. 어느 정도는 의도한 구석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속을 줄이야.”
눈앞의 남자가 상대였다면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른 척했겠지. 이러나저러나 과도한 간섭이긴 했다. 그것도 거의 초면인 사람을 상대로는.
“사람은 착한데…….”
말이 좀 구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말 그대로 순진하죠. 그 집에서 싸고 키운 막내거든요.”
“막내요? 그치만 펄즈베리 자작이잖아요?”
펄즈베리 후작의 후계자가 펄즈베리 자작이다. 막내라고? 손위로는 여자 형제밖에 없어서 막내아들이 후계자가 된 경우인가?
“손위로 남자 형제만 셋이었는데 첫째는 낙마했고, 나머지는 파오룬 식민 전쟁에서 죽었어요. 나이가 어려서 참전을 못 한 자작만 살아남았죠.”
“아…….”
에스페란사가 침음을 삼켰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시더의 설명은 간결했다. 사실만을 짧고 단호하게 전달했음에도, 그 안에서 비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해도 돼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예요. 그림스턴-행어 가문은 수십 년째 나인 호더 최고의 명사들 중 하나니까. 펄즈베리가 당신에게 구애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들 당신에게 이 얘기를 늘어놓고 싶어 못 견딜걸요.”
그러니 남들이 자극적으로 떠들기 전에 사실이라도 알아놓으라는 말이었다.
펄즈베리 자작과 별로 얽히고 싶지 않았던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엮이고 싶지 않은데.”
시더는 턱을 괴며 물끄러미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시선에서 점성이 느껴진다고 하면 헛소리처럼 들릴까?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나는 ‘로드 에이번데일’이고 펄즈베리는 ‘켄드릭’이에요?”
아?
에스페란사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펄즈베리 자작님’ 하고 깍듯하게 부르다가, 고작 마차 한 번 얻어탔다고 호칭이 날름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켄드릭에 대한 호감이 너무 빈약했다.
“코트를 빌려주는 대가로 이름을 불러달래요.”
“……그래서 그걸 들어줬다?”
“닳는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면서요? 각자 본인들이 원하는 호칭으로 불러주고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말문이 막힌 시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소파 뒤를 천천히 걸었다. 에스페란사는 뚱하니 쿠션을 껴안고 턱을 괴었다. 침묵은 짧았다. 시더는 금방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으니까.
“당신 말이 맞네요.”
“그렇다니까요.”
묘하게 개운치 못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선택은 틀리지만. 이름을 불러 줬으니 파티에서 만나면 꼼짝없이 엮이게 생겼어요.”
아차. 그 생각을 못 했다.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야겠네요.”
그리고 나중엔 어색해진 척 슬쩍 다시 자작님으로 돌아가야지.
“뭐, 그건 알아서 해요.”
시더는 산뜻하게 일별하고는, 뚱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에스페란사는 이제야 자기의 용건을 말할 수 있었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바깥은 벌써 깜깜했다.
조금 있으면 럭스 부인이 ‘어린아이들처럼 일일이 침실에 넣고 이불을 덮어드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고 찾아오겠지. 그러면서도 컵에 우유를 두 잔 데워 가지고 올 것이다.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자러 가기 전에 이 부분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존재감을 낮춰 주는 장비가 있는데요.”
천재 마도 공학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상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건 보여 주면서 말해야죠.”
“아, 네.”
에스페란사가 인벤토리에서 끄집어낸 후드를 알아본 시더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게 그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늘 이걸 입고 다녔군요? 이 음침한 걸 왜 쓰고 다니나 했더니.”
스티뮬러를 꺼낸 시더가 세로로 길게, 그다음엔 가로로 스티뮬러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페란사는 대체 그가 무엇을 알아본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냥 톱니바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게 보일 뿐인데? 심지어 그는 스티뮬러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대충 원리는 알겠어요.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상급 몬스터의 가죽을 얇게 펴서 만든 후드였다. 이것도 설리번 박사가 무두장이를 불러 만든 것인데, 당시로서도 꽤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아예 안 보이게 해 주는 물건은 오히려 만들기 쉽지만, 존재감만을 줄여 주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럼 변형은요?”
“물론 가능하죠. 하지만 한 번에 성공할 거라곤 말 못 해요. 망가져도 괜찮은 거면 시도해 보죠.”
“……됐어요, 그럼. 그보다 일반적인 사람이 이걸 뚫고 후드를 걸친 저를 인식하는 게 가능해요?”
“당신을 알아봤다는 건가요?”
시더가 오묘한 얼굴로 물었다.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더는 다시 시커먼 후드를 내려다보았으나, 그런다고 해서 모양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걸 쓰고 있는 사람을 알아봤다고?
“투시력이라도 있는 것 아니에요?”
“내 말이 그 말이라고요.”
“존재감을 줄여 주는 역할이 있든 없든 이걸 쓰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하죠. 뭐가 보여야 알아보지.”
질색하며 홀대했던 전과 달리 시더는 섬세한 손길로 후드를 쓸어내렸다. 정말 놀라운 태세 전환이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의 얼굴을 알아본 게 아닐 것 같은데.”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