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31
31화
“당신, 걸음걸이가 독특하잖아요.”
사교계에 나간다고 특별히 걸음걸이 교정 같은 것을 하진 않았으니 에스페란사의 걸음은 헌터일 때의 걸음 그대로였다. 드레스를 입으면 보폭이 조금 좁아지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대의 드레스도 페티코트를 한계까지 부풀린다거나 팔 너비보다 더 넓은 옷자락을 자랑하는 모양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일평생 구두와 드레스를 갖추고 산 숙녀들과, 아니, 신사들과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만한 걸음걸이. 넓은 보폭. 경계를 늦추지 않는, 싸우는 자의 걸음.
전투에 임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걸음걸이. 그야말로 헌터의 상징 그 자체.
“펄즈베리는 잠깐 입대한 전적이 있죠. 제대로 임관되기 전에 후계자가 되면서 제대했지만, 군사 훈련도 받았고, 그 분야에 재능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정작 지금은 법학자가 되었지만, 그의 분야가 형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다른 친척들처럼 수사관 쪽을 지망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후작의 후계자가 된 이상 직업을 가지기는 요원한 일이지만. 형법 공부조차도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으면 더 해 나가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럼 정보상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자도 알아보던가요? 뒷골목 사람이 그 정도 눈썰미를 가지게 될 계기라.”
에스페란사의 머리에도 몇 가지가 떠올랐다. 펄즈베리 자작의 형제들처럼 식민 전쟁에 병사로 참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허여멀건 얼굴을 보아하니, 말라 죽을 때까지 땡볕이 내리쬔다는 파오룬 쪽 전선에 다녀온 것 같지는 않았다. 참전 용사로 한몫 번 사람이 뒷골목으로 돌아올 이유도 거의 없고. 뒷골목 사람이 군대에 들어갈 만한 방법은 식민 전쟁에 참전하는 것뿐이니, 그 외의 요소는 전부 배제된다.
도둑이나 건달도 훈련받은 자와 같이 뛰어난 실력을 가질 수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하지만 정보상의 위험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암살자.”
동시에 답이 튀어나왔다.
“어쩐지 위험해 보이더라니. 자리를 권해 놓고, 벽 뒤에 총을 숨겨 놨더라고요.”
“당신은 뭐, 안전하게 다니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보죠?”
시더가 혀를 차며 비꼬았다. 정말로 말린 적도 없지만, 이제는 거의 두 손 두 발 다 든 것 같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가 뭐라 한들 에스페란사가 위험한 일을 안 할 리도 없고, 실제로 위험해질 리도 없으니까.
* * *
켄드릭도 피할 겸, 정보를 정리할 겸, 에스페란사는 외출을 삼가고, 시더의 서재 한편을 빌렸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의원 일에는 보좌관을 두고 있다는 시더와는 달리 에스페란사는 이 두툼한 서류철을 혼자 정리하고 분석해야 했다.
정보상이 준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도 알 수 없었다. 중간에 이상한 점이 보이면 교차 검증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믿어 보는 수밖에. 적어도 게임을 하면서 정보상의 정보가 틀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에 대한 뒷조사도 아니고 이런 단순 조사라면 더더욱.
‘정보상, 돈값은 해라.’
가장 최근 날짜부터, 하나하나 사건들을 정리하고, 정리한 사건들을 역시 시더에게서 얻어 온 오스던 전국 지도에 표시했다. 처음엔 만년필을 빌려줬던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하는 꼴을 보더니 집사를 시켜 있는 줄도 몰랐던 육아실에서 8색 크레용을 꺼내다 줬다.
“……이걸로 하라고요?”
“당신이 하는 작업에 딱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시더가 실실 웃으며 턱짓했다.
그야. 그렇기는 한데. 에스페란사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놀림당하는 기분이라 손가락 하나 길이의 짧은 크레용과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색깔 있는 만년필로 동그라미 치는 것보다는 크레용으로 칠하는 것이 더 깔끔하고 보기 좋긴 하겠지. 20년 된 것치고는 질도 좋았다.
“묘하게…….”
“왜요, 내 호의가 마음에 안 드나 보죠?”
호의 같은 소리를 하는 것 보니 역시 놀리는 것이었다. 정작 그는 뭘 하고 있었느냐 하면, 회로를 옮겨 그리고 있었다. 자기는 뭐 대단한 걸 하는 마냥.
“네, 뭐, 거의 유치원이네요. 하나는 색칠 공부, 하나는 따라 그리기.”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유치원? 시더가 반문했다가, 대강 이해하고는 되받아쳤다.
“가정 교사라도 고용해야 할까 봐요?”
“그보다 어린애한텐 간식이죠.”
벌떡 일어난 에스페란사가 서재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더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시계를 보고 납득했다. 정확히 간식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티타임이었지만 에스페란사에겐 차보다 간식이 더 중요했다. 보통 에스페란사가 요리사를 구슬려 좋아하는 간식을 먹고, 시더는 옆에서 자기 몫을 먹다가 슬그머니 접시 반절을 에스페란사에게 넘겼다. 에스페란사는 마치 그게 원래 자기 접시에 있었던 것인 양 자연스럽게 받아먹었다.
식사량도 적으면서 간식도 즐기지 않는 백작 때문에 고민하던 가정부, 럭스 부인은 에스페란사 아가씨가 온 이후로 백작님이 간식이라도 잘 챙겨 드신다며 기뻐했다. 오래오래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시더는 회로를 마저 그리고 느긋하게 일어났다.
“백작님.”
늙은 집사가 쟁반에 가득한 초대장을 보여 주며 눈짓으로 압박했다. 시더는 웃으며 반항했다.
“티타임이라서. 숙녀분을 기다리게 할 셈인가?”
“백작님, 그 숙녀분께서 조금이라도 백작님을 기다리실 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앉으시지요.”
“내 간식은 날 기다릴 텐데.”
“그 많은 간식을 입 짧으신 백작님께서 다 드셨을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늙은 럭스 부인도 내일쯤이면 알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럭스 부인과 집사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주인에 대한 정보 공유는 원활했다. 시더는 집사를 노려보며 자리에 앉았다.
“많이 먹지는 않아도 먹기는 한단 말이지. 자넨 대체 날 뭘로 보는 건지.”
“금방 하실 겁니다.”
시더는 초대장을 대충 책상에 쏟아 놓고 훑어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별 내용 없이 모이자는 제안이 대부분이었다.
“학회 것은 따로 모아 둬.”
“다 가실 겁니까?”
“글쎄…….”
웬만하면 학회는 참석해 왔지만, 당분간은 대단한 기술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그 자신의 연구에 집중할 시간도 모자랐다. 게다가 쓸데없이 의회 같은 게 개회해 버리는 바람에…….
“재커리 씨가 오늘도 의원실에는 출근하지 않으실 거냐고 묻더군요.”
“안 간다고 해.”
“경질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도 괜찮지.”
남들은 갖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세습 작위와 충분한 세수를 거두는 영지를 가지고 고작 의회 좀 나가는 걸로 투덜거린 백작이 초대장을 슬슬 헤집었다.
“정말 다들 시간도 많아. ……이건 내 게 아닌데?”
“예? 백작님 말고 초대장을 받으실 분이 대체 누가, 아.”
“에스페란사의 이름으로 온 편지야. 발신인은, 어디 보자, ‘코델리아 마벨우드.’”
그때 대화를 꽤 오래 하는 것 같더니 제법 친해진 모양이다. 다른 목적을 갖고 있으면서 예민하고 눈치 좋기로 유명한 코델리아와 친해진 것을 보니, 에스페란사의 수완도 상당했다.
“이건 갖다 주기로 하고, 나머지는 전부 거절해.”
“또 이 늙은이의 팔을 혹사시키시는군요.”
집사는 주인을 힐난하며 초대장을 정갈하게 쟁반에 모았다. 집사가 나가기도 전에 다른 방문객이 찾아왔다.
“왜 아직도 안 와요?”
에스페란사가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시더는 보란 듯 집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안 기다릴 거라며? 집사가 한숨을 쉬고는 서재 밖으로 나갔다.
“할 일 많으면 그냥 여기서 먹어요. 따라 그리기는 다 끝났어요?”
“따라 그리기는 끝났어요. 당신 색칠 공부는 멀었겠지만.”
“아, 네.”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 대충 말을 끊어 버린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책상 위에 수북한 간식 접시를 올려놓았다. 식사 대용으로 먹을 만한 오이 샌드위치가 있긴 했지만 에스페란사는 마들렌만 골라 먹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새 숙제예요.”
“뭔데요?”
“초대장. 레이디 코델리아로부터 왔더군요.”
“아,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안 했던가? 에스페란사가 건네받은 봉투를 열어 보곤 말을 이었다.
“코델리아가 마벨우드에 초대해 준대요.”
“마벨우드에? 당신 레이디 코델리아와 따로 만난 일이 있었던가요?”
“험프리 저택에서 본 것 말곤 없어요. 초대 얘기는 여기 적혀 있고. 아, 코델리아가 마이튼 홀에서 보자네요. 아직 안 가 봤다면 안내도 해 주겠대요.”
뒤에 ‘원래는 후견인이 해야 할 일이지만 당신의 후견인이 그런 것까지 챙길 리 없다고 생각해요.’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사실이다. 에스페란사의 명목상 후견인은 그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함께 외출한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마법 용품점으로, 다른 한 번은 험프리 저택으로. 모두 확실한 의도가 있는 외출이었지.
“날짜는요?”
“내일.”
“……그날은 외출을 해야겠네요. 오랜만에 대학에라도 가 봐야 하나.”
에스페란사가 없으면 1인분의 간식이 모조리 그의 차지가 될 테니까. 럭스 부인의 잔소리는 아주 귀찮았다.
“가서 살 것 있으면 에이번데일 이름으로 달아 놓고, 가는 김에 나 대신 그로더리 샵에서 새로 나온 게 뭐가 있나 좀 봐 줘요.”
“그로더리 샵?”
“13년 후엔 없나 보죠?”
“처음 들어 봐요.”
시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 * *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더니.”
에스페란사는 탄식했다. 그로더리 샵. 그로더리 씨 부부가 운영하는 마이튼 홀 최대의 마도구 상점이었다. 가게 하나하나의 임대료가 다른 상점가의 가게를 사는 값만큼 비싼 이 마이튼 홀에서 유일하게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 가게이기도 했다.
에스페란사와 코델리아가 가게로 막 들어갔을 때에는 움직이는 미소년 인형이 역시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을 산책시키고 있었다. 귀족들은 개 산책시킬 때도 오토마톤을 쓰는군. 물론 문 여는 인형은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