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35
35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행 준비는 기차 시간 한 시간 전에 겨우 마무리됐다. 옷가지나 꼭 필요한 것들은 애니가 챙겨 주었고 중요한 물건들은 인벤토리에 있는데도 왜 계속 뭘 더 가져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얼른 와요. 이러다 늦겠어요.”
시더가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며 재촉했다. 그러나 지각 위기의 원인은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 애니가 에스페란사를 붙잡고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아가씨, 이 리본으로 바꾸지 않으실래요? 모자가 예쁘긴 한데 지금 입으신 옷엔 이 리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쁜데, 딱 이 리본만 바꾸면 더 예뻐질 것 같은데. 네? 제가 1분 만에 뚝딱 바꿔 달아 드릴게요.”
“우리 지금 늦었대.”
“안 늦어요! 기차가 언제 정시에 출발한다고.”
“에스페란사. 늦으면 두고 갈 거예요.”
물론 본인에겐 씨알도 안 먹힐 협박이었지만, 에스페란사는 들으란 듯이 애니를 향해 눈짓했다. 애니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떼어 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의 모자를 향한 미련을 버릴 수 없는지 손이 움찔거리길 반복했다.
에스페란사는 그런 애니를 애써 외면한 채 마차에 올랐다. 증기 마차가 덜컹거리며 어퍼 레인을 떠나는 동안 시더는 애니가 바꿔 달려다 실패한 리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엔 멀쩡한데. 괜히 저래요.”
민망해진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래요? 하녀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애니한테 맞춰 주다간 진짜 기차 시간 놓쳤을걸요. 한번 시작하면 안 끝난다니까.”
다행히 기차 시간은 넉넉했다. 나인 호더 중앙역 한 가운데 높게 솟은 시계가 1시 30분을 가리켰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들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유독 단출했다. 짐 하나 없이, 그러나 옷차림만은 사교계 명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고상한 태를 낸 터라 썩 이상했다. 대동한 하녀 하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초라하게도, 어떻게 보면 화려하게도 보이는 둘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흘끔거렸다.
“하나쯤은 데리고 오는 게 나았을 텐데. 다들 쳐다보잖아요.”
“남의 시선 신경 쓰는 성격 아니잖아요?”
에스페란사가 대꾸했다. 사람이 많아지면 움직이기 힘들다. 에스페란사가 만일의 사태에 건사할 수 있는 것은 운동 신경도 있고 마도구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시더 정도였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고용인을 데리고 가는 건 분명 모양새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시더가 물었다.
“우린 지금 던전을 찾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던전이 있었던 흔적을 찾으러 가는 거지.”
그 말이 옳기는 했다. 에스페란사는 모자챙을 쥔 채 승강장 쪽을 바라보았다. 북쪽에서부터 세찬 바람이 불었다.
“불길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면 좀 우스워 보이나요?”
맹세코 단순한 기분에 휘둘릴 만큼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란 것은 때때로 다른 이름으로 찾아온다. 직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전사의 직감이란 때로 숙련된 대장장이가 벼린 칼날보다도 날카로웠다.
“어떤 쪽이든,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불길하다고 했으니 어떤 쪽일지 짐작은 가네요, 자, 기차 왔어요.”
눈앞이 새하얘지도록 증기를 뿜으며 까만 기관차가 승강장에 도착했다.
“터틴, 터틴행 두 시 열차입니다!”
나인 호더부터 동부의 대도시인 터틴을 잇는 NT선이 도착했다. 중간쯤에 있는 마벨우드까지는 다섯 시간. 아무 문제 없이 도착한다면 일곱 시 남짓 될 것이다.
“종착역까지 가는 사람은 아예 다음 날에 도착하겠네요. 불편하겠다.”
“그렇겠네요. 우린 그럴 일 없어요.”
사실 에스페란사는 게임 중에 기차에 탔다가 고생한 적이 있었다. 헌터의 몸은 워낙 튼튼하고 후유증이 적으니 금방 회복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목이 결렸었다. 그때는 초보라 돈도 없어서 3등석에 앉아서 갔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불편했다. 말이 끄는 마차를 타는 것보다 더. 의자가 덜덜덜덜 떨리고 사람들은 냄새나고 더럽고 시끄러웠다.
13년 후의 기차인데도 그랬다. 지금의 기차는 훨씬 더 심하겠지. 에스페란사는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이번데일 백작은 돈이 많았다. 에스페란사가 랭킹에 들고 나서야 겨우 탈 수 있었던 1등석을, 객실째로 빌려 버린 시더는 좌석 번호 네 개가 찍힌 표를 승무원에게 보여 주고 안내를 받았다.
“이쪽입니다.”
문을 열어 준 승무원은 에스페란사가 먼저 들어가고, 시더가 역방향으로 자리를 잡는 것까지 본 후에 상냥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문이 닫히자, 시더는 책상을 꺼냈다. 에스페란사가 그 위에 간식 상자를 올려놓자 이마를 찡그렸다.
“책 읽을 거예요.”
“흔들려서 이런 데서 어떻게 책을 읽어요? 그리고 당신 지금 역방향으로 타고 있어요. 멀미 날 텐데.”
“당신이나 그렇겠죠. 난 멀쩡해요.”
“해 봤어요?”
“당연히 해 봤죠. 내가 매년 에이번데일 영지에서 나인 호더까지 어떻게 오간다고 생각해요?”
“……증기 마차로 다닌 줄 알았는데.”
시더가 피식 웃었다. 에스페란사는 입을 뾰족하게 오므리며 변명했다.
“우리 때는 그렇게들 많이 다녔다고요.”
“지금의 증기 마차는 그렇게 오래 달리지도 못하거니와, 그 거리를 증기 마차로 달리면 두 배는 더 걸릴걸요.”
“에이번데일이 나인 호더에서 얼마나 먼데요?”
“기차로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요.”
생각보다 가깝다.
“연착이 없다는 가정하에.”
시더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 기차도 연착되진 않겠죠?”
“기차란 건 연착이 되기 마련이에요. 포기해요.”
그리고 그가 꺼내 놓은 책을 보니, 본인은 포기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무슨 백과사전 두께의 책을 가져왔다.
“무슨 내용이에요?”
“마도구의 소재에 대한 내용이요. 설명해 줘요?”
“아뇨, 들으면 멀미 날 거 같아요.”
기차가 거친 기찻길을 따라 질주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증기를 뿜는 높은 소리, 하늘에 한 줄기 수 놓는 긴 연기.
그들은 빠른 속도로 문명의 중심지, 나인 호더를 벗어나고 있었다.
* * *
그늘에 잠긴 응접실.
의자에 깊숙이 앉은 남자는 검은 비숍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검은 가죽 장갑이 손을 빈틈없이 감쌌다. 장갑이 끝나는 지점에서 흰 셔츠 자락이 나타났다가, 어깨에 걸친 검은 모피에 감싸였다. 새까만 모피에 광택이 흘렀으나 남자의 검은 머리칼만큼 우아하진 못했다.
“전부 일치합니다.”
고개를 조아린 수하가 남자의 앞에 보인 것은 열 쌍의 지폐였다. 금액과 그림, 색, 일련번호까지 같은 지폐 열 쌍. 검은 가죽 안쪽으로 휘말려 들어간 비숍은 이제 꼭대기만 보이는 상태였다. 남자가 긁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사를 들여라.”
문이 열리고, 나이 든 남자가 잔뜩 움츠린 채 남자가 들어왔다.
이름도 없이 박사로만 불린 자는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몇 가지 도구를 가지고 들어온 그는 지폐를 돋보기로 살피다가, 약물을 떨어뜨려 보는 등의 몇 가지 절차를 거친 뒤 푸르르 떨었다.
“박사.”
“예.”
“결과가 어떠한가?”
“송구한 말씀이오나, 양쪽 모두 진짜입니다.”
“듣기로 박사는 위폐 감정에 있어 오스던 전체에서 따를 자가 없다고 하더군.”
말없이 마른 등을 옹송그린 박사가 바닥에 깔린 카펫의 무늬를 세며 불호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분노에 찬 고함 대신 맹수의 위협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만 이어졌다.
“한데 지금, 일련번호가 완전히 똑같은 두 지폐가 전부 진품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신실하신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중앙은행에서 발행된 화폐가?”
“송구합니다. 하지만, 제 30년 연구 인생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두 화폐 모두 한 치의 의심할 바도 없습니다.”
마노로 빚은 비숍이 나무 체스판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주의를 집중시키듯 체스판을 두드린 남자가 말했다.
“오늘 일은 아는 자가 없어야 할 걸세. 만약 말이 새어 나간다면, 박사의 입이 가벼웠던 것이라 짐작하겠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헨리, 박사를 모셔라.”
그림자처럼 응접실에 완전히 녹아든 수석 시종이 박사를 데리고 나갔다.
“두 번의 감정은 필요 없겠지. 네가 알아낸 바를 말해라.”
검은 단발을 한 수하가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그의 갈색 로브는 호화로운 응접실에서 이물질처럼 튀었다.
그는 열 장씩 두 줄로 가지런히 놓인 지폐 중 한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중 여덟 장은 제 손으로 받은 것이고, 두 장은 얼터 지구 근처의 빵집에서 찾은 것입니다.”
“‘찾았다’?”
“같은 값의 지폐를 두고 왔습니다.”
“그래. 성실히 일하는 여왕 폐하의 신민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너와 같은 자’는 더더욱.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출신의 굴레.
“계속해라.”
“제가 받은 지폐와 같은 자의 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위폐는 아니지만, 제 손에 들어온 이 열 장의 지폐가 한눈에도 확실히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은?”
“같은 지폐라면 제가 얻은 것이 더 오래됐고,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자리에 같은 흠집이 있는 두 지폐의 일련번호까지 같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말을 꺼내려고 해도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날것의 현실 위에서 살아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자니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치솟았다.
“결론은?”
남자가 다시 물었다. 결국 토해 내듯 말했다.
“결론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제가 받은 지폐가 미래의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남자가 일축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이 몇 년간, 의심조차 해 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의심할 가치는 있다. 루크 헤이븐리, 미래의 지폐를 가지고 있던 자가 누구지?”
“지폐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물건이니, 처음 미래의 지폐를 가져온 자를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제게 이 지폐를 준 자는 단신의 무력으로 수십 명을 상대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을 꺼내 드는 자입니다. 기감이 극도로 발달해 있으며, 짐작건대 살육에 익숙합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페란사 헌터. 현재 에이번데일 백작의 피후견인으로 머무르고 있는 숙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