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37
37화
“왜요? 다 안 읽었잖아요.”
“오늘 다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아까는 죽어라고 책만 봤겠다? 에스페란사는 불만을 담아 구두코로 시더가 앉은 의자 밑을 툭툭 건드렸다.
“그렇게 심심하면 좀 자지 그랬어요?”
“이런 데서 잠 못 자요. 시끄럽고 덜컹거려…….”
하지만 좀 피곤하긴 했다. 손 뒤에서 하품을 한 에스페란사가 자리에 구겨져 앉았다. 시더는 바른 자세로 앉으라고 잔소리하는 대신 에스페란사에게 자기 몫의 쿠션을 양보했다.
“할 말이 있어요.”
“해요.”
에스페란사는 손을 내밀어 시더의 책에 꽂혀 있던 만년필을 빼앗아 들었다. 책 위에 펜촉을 가까이하고 허락을 받듯 시더를 돌아보자, 그는 혀를 차며 책갈피를 해 두고 맨 앞 장으로 넘겨 주었다.
에스페란사는 슥슥 빠르게 적어 내렸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꾸로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시더는 만년필을 받아서 그 위에 이어 적었다. 에스페란사가 보기 쉽게 거꾸로, 오른쪽부터 적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아 진짜 재수 없어.
시더는 그런 소리를 잘도 적어 내린 뒤 에스페란사에게 펜을 양보했다.
펜이 번갈아 왔다 갔다 하다가, 뚝 멎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시더는 필담치고는 자질구레한 내용이 많은 페이지를 죽 찢어 접어선 에스페란사에게 내밀었다.
“지금 나한테 쓰레기 처리하는 거예요?”
“기밀문서의 보관을 부탁하는 거죠.”
말이나 못 하면. 에스페란사가 픽 웃으며 종이를 접어 인벤토리 안에 던져 넣었다. 시더가 다시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저 예쁜 눈 안에 얼마나 흉악한 생각들이 들어 있는지 잘 아는 에스페란사가 방어 태세로 돌아섰다.
“그 안에 액체를 쏟아 넣으면 어떻게 돼요?”
“안 해 보고 싶은데요.”
“궁금하지 않아요? 안에 있는 물건 다 빼고 한번 해 보지 않을래요?”
“안 궁금한데요.”
진짜 부을 것 같다. 하고도 남는다. 에스페란사가 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객실은 작고 에스페란사는 더 갈 데가 없었다.
“하기만 해 봐요.”
“뭘 그렇게 경계해요? 어차피 동의 없이 할 수도 없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했을 거라는 바로 그 어투를 경계하는 거다. 못 막을 것은 아니지만 지식욕이 차오르다 못해 철철 넘치는 저 눈빛은 껄끄럽다. 애초에 누가 인벤토리에 액체를 부어 넣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하여간 진짜 이상한 사람.
대화를 통해 이해하는 건 포기했다. 에스페란사는 투덜거리며 무릎을 모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암살자의 기척은 계속 느껴지고 있었다.
기차 내에서 소란을 일으켜 주목받는 것보단 낫지 싶어서 그냥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계속 거슬리면 정보를 캐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제압해 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헌터 생활 7년이면 암살자를 잡습니다.
물론 조심해야 하긴 한다. 지금처럼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때 실수로라도 네 위치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니까.
“앗.”
지금처럼 말이다.
그런데 방금은 티를 내지 않았는데? 에스페란사는 설마 하는 눈으로 시더를 살폈지만 그는 책에 빠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웃어 준 뒤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그럼 누구지? 뭐 때문에 사라진 거지?
‘왜 그래요?’
시더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없어졌어요.’
에스페란사가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시더는 아, 하고 탄식을 흘리더니 창문을 가리켰다.
“다 왔네요.”
그러고 보니 바깥에 보이는 수목이 아까 전보다 훨씬 울창했다. 오스던 동부답게 산맥이 잘생긴 고대 조각상의 콧대처럼 솟아 있었고, 그 위를 새파란 나무가 가득 덮어 흙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벌판 위에 하나뿐인 인공물로 자리하던 기찻길 근처에 하나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차는 속도가 줄어들수록 더 쉼 없이 덜컹거렸다. 빨간 기차역이 시야 끝머리에 나타났을 때쯤, 승무원이 객실 복도를 지나다니며 정신없이 종을 쳤다.
“이번 역은 마벨우드, 마벨우드 역입니다!”
* * *
다른 역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열차가 멈추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1등석과 2등석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을 빼면. 3등석에서 피곤한 낯으로 내리는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했다. 그마저도 다른 역에 비하면 수가 적었다. 마벨우드가 사람이 적은 지역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피 현상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수준이 이 정도라면 마벨우드의 경제도 꽤나 위축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코델리아는 괜찮을까? 마벨우드 남작은?
“에이번데일 백작님, 그리고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되십니까?”
나가는 사람만 있고 드는 사람은 없는 기차역에 번듯한 청년이 서 있었다. 드물게 잘 차려입었고 자세가 바르다. 둘 중 하나였다. 마벨우드 가문의 상급 고용인이거나, 근처의 귀족. 와서 대뜸 이름을 부른 걸 보면 전자겠지.
“마벨우드 저택의 집사인 듀 허슬러라고 합니다. 코델리아 아가씨께서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멈칫하다가 덧붙였다.
“마벨우드는 두 분께서 오신 나인 호더와 달리 아직 증기 마차가 보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반 마차로 모시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경 쓰지 않네.”
“감사합니다.”
투덜이 하워드 집사도 다른 손님을 대할 때는 저렇게 번듯하겠지. 에스페란사는 때론 상급 고용인이란 귀족 본인보다도 더 기품이 넘친다는 생각을 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포장이 덜 된 도로를 달려 도착한 저택은 영지 내의 귀족 저택답게 규모가 상당했고, 담쟁이덩굴이 엉켜 있어 고풍스러웠다. 그리고 낡았지만 예쁜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코델리아가 빙긋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혼자서는 심심했다고 투덜거린 코델리아는 시더에게 대강 인사하고 에스페란사의 팔 사이로 팔을 끼었다.
“그 무슨 무례한 인사냐, 코델리아.”
기척은 알고 있었지만, 코델리아의 친척인 줄은 몰랐다. 그만큼 단출한 행세였다. 코델리아의 아기자기한 미모와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노부인이었다. 꼿꼿한 자세와 치켜든 턱이 성정을 보여 주었다.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노부인이 눈짓으로 코델리아를 에스페란사에게서 떼어 냈다.
“에이번데일 백작님,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방문을 환영합니다. 코델리아 앤 웰즐리입니다. 웰즐리 부인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제 이모할머니세요. 마벨우드에 머무르고 계신 줄 몰랐는데, 하하, 저도 내려오고 나서 알았답니다.”
코델리아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시더는 알 만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페란사는 행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강 마벨우드에서의 일이 생각보다 험난할 것이라는 함의만 챙겼다.
“자, 자, 저녁이니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하녀를 부르시고요. 식사 아직 안 하셨죠? 할머니께서 만찬을 준비하셨는데, 아이, 참, 제가 두 분 피곤하실 테니 간단하게 드리자고 했는데도.”
“코델리아, 손님이 방문했을 때는 만찬으로 환영하는 것이 예의다. 언제쯤 안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셈이냐?”
“안주인이 될 때쯤 익혀도 늦지 않겠지요. 할머니, 우선 두 분이 짐을 푸실 수 있게 해드려야죠.”
웰즐리 부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코델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곧 손님들 앞임을 상기하고 한발 물러났다.
마벨우드 저택은 바깥에서 본 바와 같이 고풍스러웠다. 낡은 구석도 있었지만 제때 수리를 하는 모양인지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나랑 같은 층의 방을 써요. 같은 층에 할머니도 계시지만 많이 간섭하시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백작님께는…… 백작님께 드릴 방에 대해서 할머니와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할머니 말씀대로 하기로 했어요. 4층의 방을 쓰시면 돼요.”
“4층이라면.”
이 저택이 딱 4층짜리 저택이다.
“남작님의 방이 아닌가요?”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방이에요. 할머님, 그러니까 남작님은 다리가 안 좋으셔서 1층 방을 쓰시거든요. 할머니 말씀이, 그러니까 이모할머니 말씀이 작위를 가진 귀족 손님이 오시면 반드시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드려야 한대요.”
그게 예의이기는 했다. 영주가 자기 방을 비우고 손님에게 방을 내어 주는 것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것도 100년 전에나 성행한 전통인 데다, 나이가 한참 많은, 작고한 로드 마벨우드의 방을 쓴다는 것이 썩 편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더는 불편한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델리아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아, 연구실로 쓸 빈방을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불평이 없었던 건 이 말을 하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군.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세간의 편견과 달리 내 연구는 아주 조용하니까요.”
“이거 순 사기꾼 아냐?”
에스페란사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양심이 있어야지. 에스페란사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만서도, 어쩜 저렇게 뻔뻔하냔 말이다.
아주 조용하다고? 그야 그렇겠지, 서재에 방음재를 한 뼘 두께로 발라 놓고 기계엔 소음 제거 설비까지 해 뒀으니까. 사격장보다 연구실의 방음재가 더 두껍고 비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그리고 저 악랄한 인간은 인벤토리 자리가 모자란다는 말에 과감하게 소음 제거 설비를 뺐다. 에스페란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사기꾼이라뇨.”
시더의 눈초리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에스페란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모른 척했다.
“아, 저, 그럼 같은 층의 빈방을 내어드릴게요.”
코델리아가 얼른 대답했다.
“그런데 짐은? 혹시 따로 보내셨나요?”
“아뇨, 갖고 왔어요.”
다행히 코델리아가 더 궁금해하기 전에, 하녀들이 만찬 준비에 문제가 있다며 코델리아를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