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에스페란사는 먼저 시더의 방문을 열고 짐 가방을 쏟아 냈다. 연구실로 내어 준 방에서는, 이번에는 힘을 합쳐 연구 장비들을 정리했다.
짐 가방은 부딪히든 널브러지든 신경도 안 쓰던 시더가 연구 장비에는 보통 까탈스러운 게 아니어서 에스페란사는 실수인 척 그의 발을 한 번 세게 밟아 주었다. 정말 얄밉게도 백작 나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긴 했지만.
결국 연구실만 깨끗이 정리하고 각자의 방에는 짐을 대충 쌓아 둔 채로 만찬장에 내려갔다.
상석이 비어 있었다.
당연히 그 자리는 이 자리의 유일한 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시더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 코델리아가 그다음 상석에, 60세가 넘은 웰즐리 부인은 그다음, 그리고 에스페란사의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예의를 잘 지킨 자리 배치이기는 했으나, 보통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지키진 않는다. 가족 식탁에선 노인인 웰즐리 부인이 상석에 앉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훨씬 즐거운 만찬이었다. 예의를 딱딱하게 차리는 웰즐리 부인은 또한 집안에서 맞이한 손님을 성심을 다해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식사는 따뜻하고 정성스러웠고, 웰즐리 부인은 부담스러운 첫인상에 비해 다정하고 세심했다. 식사가 끝날 때쯤, 에스페란사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러지, 에스페란사 양도 편하게 대하게.”
“저도 편하게 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시더가 덧붙였다. 웰즐리 부인이 차가운 눈으로 대답했다.
“감히 백작께 그럴 수는 없지요. 이 늙은이는 존대가 편합니다.”
에스페란사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웰즐리 부인이 두 사람을 질책하듯 바라보는 동안 시더는 부루퉁한 얼굴로 술잔을 흔들었다. 처음에 비해 훨씬 풀어진 분위기에 코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방으로 돌아가면서, 에스페란사의 귀에 속삭였다.
“할머니가 워낙 어려워 보이는 분이시잖아요. 걱정했었어요.”
“좋은 분이시던데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로드 에이번데일도 좋아하는 것 같고요.”
편하게 대해달라는 말은 여지없이 거절당했지만, 시더도 처음 상석에 앉을 때에 비해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그 사람은 좀 자기를 막 대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상한 성향이 있다.
“아, 코델리아. 내일 아침엔 말을 좀 빌려도 될까요?”
“말을요? 어렵지 않지만, 왜요?”
“숲에 가 보려고요. 사고가 있었던 숲까지의 지도를 보여 줄 수 있어요?”
“바로 갈 거예요? 그럼 난, 누구랑 놀아요?”
예쁜 소녀가 울상짓는 모습은 절로 동정심이 들 정도로 애처로웠다. 에스페란사는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내 취향이 금발인가? 금발 미인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을 발견한 것 같은데.
“혼자 놀아요. 저녁때엔 올게요.”
“로드 에이번데일과 함께 가실 거죠?”
에스페란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은 두 마리로 부탁해요.”
* * *
“이쪽이 앤이고, 이쪽이 샬럿이에요.”
코델리아가 말 두 마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시더가 분명 어제까지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 있었을 정체 모를 물건들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물었다.
“레이디 코델리아는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지요?”
“로드 에이번데일, 간밤에 잘 지내셨나요? 마구간을 안내해 주려고 왔답니다. 그리고 말도 골라 주려고 했고요. 앤과 샬럿이 가장 튼튼해요. 음, 그리고.”
하녀에게 피크닉 바구니를 받은 코델리아가 그것을 시더의 손에 들려 주었다.
“식사도 잊지 말고요. 숲 너머에 사고가 일어난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전부 이사했으니까 증언을 들어 보고 싶은 거라면 숲 외곽의 마을에서 들으셔야 해요.”
“알았어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치만…… 역시 하인을 좀 더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우리 둘 다 무장 상태고, 다른 사람은 거추장스러워요.”
코델리아는 영 미덥지 않다는 듯이 시더를 흘끔거렸다. 개조한 마력 권총의 마력탄 수를 가늠해 보던 시더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어머,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쉬운 티를 가득 낸 코델리아가 드디어 자리를 뜨자, 시더는 기다렸다는 듯이 피크닉 바구니와 가지고 온 장비들을 가리켰다. 에스페란사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세 들었어요?”
“비슷해요.”
무단침입 세입자가 어제 겨우 비운 자리를 야금야금 채웠다. 에스페란사는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먼저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거침없이 내달렸다.
“허어, 저렇게 험하게 말을 모는 숙녀는 난생처음 봅니다.”
마구간지기가 침침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뒤따라 말에 올라탄 시더의 입가에 짧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험하게 몬다고?
“저건 잘 모는 거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휘둥그레 눈을 뜬 마구간지기를 뒤로하고, 그 역시 빠른 속도로 저택 정문을 넘어섰다.
엄연히 따지면 말을 험하게 모는 쪽은 시더였다. 에스페란사는 능률적이고 속도가 빠른 쪽이었다. 다시 말하면 말을 동물보다는 탈것으로 보는 몸짓이다. 그러나 시더는 그 능숙함에서 일말의 어색함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 타 본 게 언제예요?”
“작년인가?”
에스페란사는 고삐를 조금 당겨 속도를 늦추며 대꾸했다.
“떨어져도 안 다칠 자신 있어요?”
“아뇨!”
“그럼 좀 천천히 가요. 숲이 도망가진 않으니까.”
에스페란사는 아주 조금 속도를 늦추었다. 숲은 과연 도망가지 않았다. 시커먼 입을 벌린 숲은 오히려 그 이빨을 날카롭게 벼리고 다가왔다. 등 뒤의 맹수처럼.
에스페란사가 숲과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높은 철책 앞에서 고삐를 당겼다. 질주하던 말이 앞발을 들고 커다랗게 울었다. 목이 조금 젖은 채 뒤를 돌아보자, 말 하나 정도 거리를 두고 시더가 바로 따라붙었다.
“저 숲이네요.”
어젯밤 대강 보고 잤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초승달처럼 생긴 숲이었다. 나무가 빽빽한 숲에는 다행히 사람이 다져 놓은 길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꽤 오래 지나다니지 않았는지 잡초가 무성했다. 그렇게 커다란 철책을 세워 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금방 마을이 보일 줄 알았는데, 길이 복잡해서 그런지 한참을 걸어도 마을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아요?”
“……글쎄요. 하늘이 보여야 방향을 알 텐데.”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나뭇잎이 빽빽하게 차양을 드리운 나머지 햇빛 한 줄 볼 수 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 마을이 보일까요?”
“글쎄요. 여기선 확실히 안 보이는데.”
그곳도 이미 마을보다는 폐허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여기만큼 답답하진 않을 테니 얼른 나가서 좀 쉬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마치 13년 후의 에이번데일 저택 정원처럼 풀이 높게 자란 자리를 밟던 찰나였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거의 동시에 에스페란사는 반사적으로 손을 높이 뻗었다. 손에 기다란 것이 잡혔다.
“화살?”
이 구시대적인 무기는 뭐람.
“웬 화살이에요?”
“저쪽에서 날아왔어요.”
기척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먼 곳이었다. 말을 타고 오지 않았다면 저쪽에서도 이쪽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말 두 마리가 바쁘게 걷는 소리에 상대 쪽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대답해라, 아니면 쏜다!”
한 명이 아니다. 뒤를 돌아보니 나무에 박힌 화살이 몇 발 보였다. 여러 번 쏘았는데 에스페란사에게 도달한 게 한 발뿐인 것 같았다. 이렇게 허술할 데가 있나. 위험한 상대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은데. 한 명쯤은 길을 알고 있겠죠?”
에스페란사가 반색했다. 당장이라도 그쪽으로 뛰쳐나갈 태세였다.
“지금 우리 공격을 당한 것 같은데, 그 문제에 대한 생각은 어때요?”
시더가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말과 동시에 에스페란사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어느새 에스페란사의 두 손에 각각 무기가 들려 있었다. 총도 검도 아니었다. 날도 서지 않은 기다란 나무 몽둥이. 무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물건이다.
죽일 생각이 없군?
그는 가볍게 생각하며, 말을 앞으로 몰았다. 생각보다 패거리가 꽤 많아 보였다. 에스페란사 정도의 무위를 가진 사람에게 그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후방 지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저 녀석들, 우리를 봤습니다.”
“관청에 신고하면 어떡합니까?”
“그냥 목을 따 버립시다!”
결론이 꽤 빠르게 난 모양이다. 패거리가 동시에 기합을 지르며 몰려왔다.
적은 스무 명 정도에 대체로 무기도 변변치 않았지만, 분명 총기를 든 사람도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무기를 든, 관청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의 모임.
도적들이군.
시더와 에스페란사가 거의 동시에 판단했다. 그리고 판단과 동시에, 에스페란사는 적의 한복판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여, 여자잖아?”
공격을 먼저 시작한 것도 그 여자 쪽이었다. 팔다리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적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4
상태 이상 0
사망 0
시야 한쪽을 차지한 상태 창을 곁눈질한 에스페란사가 나무 몸통을 방패 삼아 공격을 피해 냈다. 검이야 눈에 보이는 대로 피하면 그만이지만 화살과 총알은 조금 귀찮았다. 일단 쏘는 쪽이 멀리 있다는 점에서.
“으아아아!”
기합을 지르며 다가오는 도적의 명치를 찌르고, 거칠게 때려 기절시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날아오는 화살을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쳐냈다. 적들과 얽혀 들자 아군이 맞을까 두려워 화살이나 총알은 더 날아오지 못했다. 커다란 나무 몸통을 달리듯 밟고 올랐던 발이 다가오는 도적의 얼굴을 걷어찼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17
상태 이상 0
사망 0
‘네 놈은 원거리 공격 중이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 갔지? 도망갔나?’
탕.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화약으로 만든 총과는 소리의 질이 다른 마력 권총이 깔끔하게 도적의 팔을 꿰뚫은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말 위에 구경하듯 앉아 있던 시더가 권총을 든 팔을 흔들며 말했다.
“내가 만만해 보였나 봐요.”
과연.
에스페란사는 맘 놓고 먼 곳에서 지원하던 남은 패거리를 마저 해치웠다. 그리고 널브러진 사람들 위를 마치 평지처럼 밟으며 세워 놓은 말에게로 돌아왔다.
“에스페란사.”
“왜요?”
“저기, 도망가는데요?”
에스페란사는 몸을 가눌 수 있는 몇 명이 겨우 일어나 도망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어디겠어요? 하나밖에 없지.”
이 근처에 도적이 머물 만한 은신처라면 마을뿐이다.
폐허나 다름없고 건물도 드문드문 있지만 그래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인 데다, 철책까지 쳐 가며 기피하는 곳이니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도적 떼가 임시 거처로 쓰기에 딱 좋았다. 이 숲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이동 경로로 알맞았다.
그럼 마벨우드는 괜찮은 건가? 범죄는 원인 모를 사고보다 실질적인 위협이다.
“일단 따라가 보죠.”
시더가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