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
4화
나들이 나온 가족들, 연인들, 고용인들, 오토마톤들, 증기 마차와 애완견들. 사람들은 호수 주변의 풀밭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고, 근처에는 변변한 건물 하나 없었다. 하늘은 아주 새파랗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멀찍한 곳의 굴뚝 연기도 하루에 두 번 도는 공기 청정 비행선이 쫓아낸 참이었다.
[1838년 4월 7일. 나인 호더는 마도 문명과 식민지 무역이 쌓아 올린 부와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이런 내레이션이 나와 주고.
그러나 다음 순간, 하늘의 색이 짙은 회녹색으로 바뀌고, 머리 위로 괴물들이 쏟아졌다. 비명 소리와 심박보다 더 묵직한 타악기 소리. 괴성을 내는 괴물들. 급박한 음악 소리.
그 공원은 통째로 던전이 되어 떨어져 나갔고, 몬스터들이 그 안의 모든 움직이는 생명체를 뼈째 씹어먹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던전이 사라졌을 때, 공원에 남은 것은 찢어진 옷가지와 핏자국, 먹다 남은 살점이 붙은 뼈다귀뿐이었다.]심의 때문이었는지 그 부분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시커먼 핏자국이 공원 곳곳에 묻어 있는 모습을 한 바퀴 쭉 둘러 보여 주었을 뿐이다.
13년 후 그 공원의 이름은 ‘메모리얼 파크’. 그 날의 끔찍한 재앙을 되새기고 추모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에스페란사도 공원에서 사람을 찾는 퀘스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 NPC들은 모두 검은 복장을 입고 있었고, 놀러 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그날, 그 자리에 에이번데일 백작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주말에 공원으로 산책을 나갈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필 그 날 외유를 나갔던 것일지도.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있다면 희생은 반의 반절, 어쩌면 그보다 더 줄어들 수도 있겠지. 로드 에이번데일은 얄미운 인간이지만 이미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 만큼 그를 구해 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에이번데일 백작은 죽어야 할 인물이 아니던가? 그를 살려 주다가 이 게임에서 나가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음. 으으으으으음.”
‘애초에 왜 난 못 나가고 있는 거지? 그것도 게임 시점도 아니고 13년 전으로 들어와서? 게다가 이름밖에 아는 게 없는 인물의 저택으로 들어와서는?’
운영자 양반, 이것보다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에스페란사는 침대에 대 자로 누워 끙끙댔다. 대체 의도가 뭐야?
그렇게 한참 구르다 보니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인벤토리 어딘가에 구겨 던져 놓은 잭의 종이. 이런 게 아이템화 되어 있다는 것을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잭이 술술 풀어놓은 정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퀘스트 창에 늘 떠 있었으니까.
지금은 없지만.
[아이템: 잭의 쪽지]“아이템 창에 그려진 거랑 똑같이 생겼네.”
기껏 꺼내 보고 나서 떠올린 감상은 그 정도였다. 황금 발톱 세계관의 글은 읽을 수 있었지만, 잭이 워낙 악필인 터라 해독이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 고민한 결과 고작 여섯 문장밖에 되지 않는 글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중 에스페란사가 주목한 것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얘가 또 낚네.’ 하고 넘겼겠지만 13년 전으로 넘어온 이상 이 문장도 예사 문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진짜인가?”
13년 전의 세상에 황금 발톱이 있는 것이다.
이 세계관에 던전의 출몰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다줄 전설적인 아이템. 그 능력 때문에 유저들에게는 ‘맥거핀’이라고 조롱당하는 물건. 카더라만 난무할 뿐 어떤 퀘스트에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준 적이 없었다. 황금 발톱이 있다고 찾아가면 늘 허탕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13년 전이라면……’
이미 게임 시점에서 황금 발톱은 없어졌거나, 찾을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13년 전,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인 이 시점에는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황금 발톱’을 찾는 것.
갑자기 눈앞에 없던 창이 떴다. 엉거주춤 앉아 있던 에스페란사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퀘스트: 황금 발톱을 찾아라!]진행률: (0/???)
완료 보상
―칭호: 시간의 지배자
―아이템: 황금 발톱, 귀환증(집)
진짜였어. 진짜였어!
귀환증은 아주 옛날에 써 봤었다. 도무지 자기 수준으로는 던전을 클리어할 수가 없을 때 쓰면 시작 포인트로 돌아가게 해 주는 물건인데, 로그아웃 당하는 느낌이 불쾌해서 랭킹 100대에 오른 이후로는 한 번도 구한 적이 없었다. 캐시템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간절했다.
좋아, 황금 발톱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자.
목표 의식이 생기자 할 일도 차례로 생각났다.
그나마 황금 발톱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이라. 몬스터도 던전도 없는 이 세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물건이지만, 마도 공학자인 설리번 박사에게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내일은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 보자.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구도 문전박대하지 않을 숙녀 행색이다.
설리번 박사가 지금 뭘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찾아가도 고용인이 경관을 부르지 않을 만한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려면 뭘 해야 할까?
일단 어제 고른 옷들 중에서 최대한 유행 타지 않을 법한 옷을 다시 골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의 유행이 뭔지는 전혀 모르지만, 10년 동안 옷을 고쳐서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변하지는 않겠지.
원래 게임 속 세계는 그렇게 가파르게 변하지 않는다. 설정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도 다 일이니까. 하녀들과 럭스 부인의 도움을 받으면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숙녀 행세를 할 때 필요한 게 뭘까?
답은 간단했다. 돈.
인벤토리를 열어 지폐를 쏟아 낸 에스페란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노동이네, 노동.”
1837년 이전의 지폐와 이후의 지폐를 분류해야겠다. 얼마나 걸릴까? 세 시간? 네 시간?
창문 바깥의 하늘을 흘끔 바라보았다. 어둑한 하늘에 낮게 비구름이 깔려 있다. 언제나 그렇듯 축축한 나인 호더의 회색 하늘 위로 어둠이 드리운 모습.
취침은 글렀다. 쏟아 낸 지폐 사이에서 네글리제를 무릎까지 끌어올린 채 러그에 주저앉은 에스페란사가 한숨을 쉬었다.
1837년 이전의 지폐와 이후의 지폐를 완벽하게 분류하기 전, 계획이 바뀌었다. 1838년이 되어도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1838년에 나온 지폐도 써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1837년 이전의 지폐, 1838년의 지폐, 1839년의 지폐, 그리고 그 이후의 지폐로 분류된 종이들이 네 더미를 이루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릴 기력은 없었다.
인벤토리 안에 따로따로 집어넣은 뒤에 몸을 씻었다. 마력으로 돌아가는 욕조가 증기를 뿜으며 물을 데워 주었다. 연결된 톱니바퀴 가운데에 동그란 구슬이 보였다.
마력을 담고 있는 마정석이었다. 누군가의 눈처럼 새까만 빛을 내는 마정석.
“마도 공학자라더니, 이런 걸 집에다 설치해 놓고. 대단하네.”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면 집의 욕조에 일일이 마정석을 박아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나인 호더 북방의 광산에서 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게 마정석이라지만, 거기에 마력을 담고, 그 마력을 운용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한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를 유지, 보수하는 일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값비싸다.
에이번데일 백작이 얼마나 부유한지와 관계없이 특별한 호의 없이는 주어지지 않을 호사라는 뜻이다. 그리고 백작은 그런 호의를 아무 감정 없이 내밀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이 파트너십을 중요시한다는 뜻일 테고.
“낫을 준 건 좀 심했나.”
게임 초반에 업적 달성용으로 산 무기였다. 게임에 작게나마 돈을 쓰기 시작한 후엔 거들떠도 보지 않은 물건이라 쉽게 내줬는데.
‘에스페란사 님, 랭킹도 높으신 분이 그런 무기는 왜 갖고 다니십니까? 인벤토리 아깝게. 그런 건 버리시고 이거 한 번 써 보세요. 이게 잘 맞을 것 같은데.’
던전 공략을 몇 번 같이 했던 랭킹 2위, 사이러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초보자 대하듯이 자기가 키워 놓은 무기를 쏟아 줬었지. 그 낫을 아직까지 가지고 다니는 게 얼마나 안타까워 보였으면…….
목욕물에 퉁퉁 불어 버린 손가락을 후 불며 고민에 빠졌다.
음. 아무래도 낫을 준 건 심했던 것 같다. 수습해야겠는데.
* * *
에스페란사가 백작과 다시 만난 것은 오후 세 시를 반이나 넘겼을 때였다. 13년 전의 세상에 들어온 지 만 하루가 지났을 시점.
원래의 몸이었다면 열두 시가 다 돼서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헌터의 몸은 체력이 넘쳤다. 아무리 더 미적거려 보아도 여덟 시 반에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럭스 부인을 따라 집 안을 구경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특별한 게 있을 만한 곳은 전부 백작의 개인 공간이었으니까. 서재나 연구실, 재료 보관실.
그래도 저택의 맵은 새까만 색에서 대부분 컬러로 변했다. 어제 다녀온 서재 역시 미색을 띠었고, 화려한 필기체로 ‘서재’라고 휘갈겨져 있었다.
저택은 훌륭했지만, 마도 공학자의 집답지 않게 고풍스럽고 전형적인 귀족 저택이었다. 늙은 고용인들이 쓰는 승강기와 증기 마차가 들어 있는 차고 정도만 이 시대의 저택다웠다.
둘러본 곳 중 건진 게 있다면 훌륭한 마구간과 실내 사격장이었다. 게임 시점보다 더 생기가 넘치는 것 같은 말의 갈기를 쓸어 보다가 생각했다.
‘증기 마차가 있는데 왜 말을 키우지? 취미인가?’
빈 사격장을 훑어보기도 했다.
“이 사격장은 전 백작님께서 지으신 것인데, 그때는 신사분들이 모여서 총을 쏘실 때마다 세상이 떠나가라 시끄러웠답니다. 지금은 방음이 되니까 그런 걱정은 없지요.”
“방음이 된다고요? 그거 꽤…….”
“비싸죠.”
럭스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집사 양반은 가격을 듣고 뒤로 넘어가려고 하더군요. 어제 보셨던 걸 기억하시죠? 늙은 하워드 집사요.”
럭스 부인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었는데. 하지만 그런 지적을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럭스 부인이 신이 나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우리 백작님께선 외벽 전체에 방음벽을 설치해 버리셨죠. 정말 대단하시지 않나요?”
“그러게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서 집을 마련해서 직접 꾸몄던 에스페란사로서는 대강 가격을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자재와 기술이 훨씬 값비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