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1
41화
인벤토리를 뒤져 보니 금방 나왔다. 에스페란사는 색을 잔뜩 섞어 놓은 루빅스 큐브를 꺼냈다.
“이게 원래 다 맞추면 뭐가 나오는, 그런 아이템인데 이런 거에 약해서요.”
몇 번 시도해 봤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못 하겠고, 공식이란 걸 보고 하다가 머리 아파서 때려치웠다. 분명 뭐가 나오기는 할 텐데, 끝까지 못 맞춰서 뭐가 나오는지 모른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닐 테지만서도.
“이렇게, 이렇게 돌려서 모든 면의 조각이 다 같은 색이 되도록 맞추는 거예요. 이 면은 다 빨간색, 저 면은 다 파란색, 뭐 그런 식으로.”
어차피 오토마톤이 돌아올 때까지 할 일도 없었으므로 시더는 그 빈약한 설명에 의지해서 어설프게 큐브를 돌려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실히 될 놈은 된다. 큐브를 감싼 긴 손가락이 안정적으로 변했고, 손바닥을 써서 돌리던 큐브를 손끝으로 휙휙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의 눈에도 점점 같은 색 조각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시더가 큐브를 돌리고, 모든 색이 다 맞춰지자 펑!
“아…….”
시더는 반토막 난 큐브를 손에 쥐고 망연한 한숨을 쉬었다. 에스페란사도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잠깐만요.”
열린 큐브를 받아 든 에스페란사가 그 안에서 동그란 구슬을 찾아냈다. 그것을 앞뒤로 살펴보다가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은 에스페란사가 탄식했다.
아, 5년 전이었다면 과금을 해서라도 얻고 싶었을 장비 강화석이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
[푸른 강화석 ― 중급 (887)]시간이 지나면 아이템은 똥값이 되기 마련. 이미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는 887개의 중급 강화석이 가득 쌓여 있었다.
“뭐가 나왔어요?”
시더가 고개를 가까이 하고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아, 5년만 일찍 열걸.”
“당신이 5년 일찍 왔으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걸요. 그땐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쫓겨났을지도 몰라요.”
아, 그러니까 본인을 못 만났으면 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열 받는데, 사실이라서. 에스페란사는 고작 큐브 하나 못 맞추는 자신의 손을 보고 한탄했다.
기껏 받은 장비 강화석이 아까우니 시더에게 주기로 했다. 정작 받아 본 시더도 별 효용은 없어 보인다고 했지만, 연구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시더의 공구 상자에 넣고 상자째 인벤토리에 던져 버렸다.
“이벤트란 게 그렇지 뭐…….”
때깔만 좋고 실리는 없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
황금 발톱 세계관 안에서 진짜 좋은 장비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금을 할 것. 단, 상상 이상으로 많이. 아니면 스스로 발품을 팔아 훌륭한 마도 공학자나 대장장이와 친분을 쌓을 것. 어느 쪽이든 쉽지는 않다.
강화석 같은 것으로 대강 장비 업그레이드를 시키는 것도 초반에는 나쁘진 않지만, 결국 진짜 좋은 장비를 얻게 되면서는 인벤토리에 쌓이기만 할 뿐이다. 아이템이 모이기 시작하면 그 아이템의 쓸모가 떨어진다는 뜻이지.
에스페란사는 헌터 경력 7년 만에 얻은 진리를 되새겼다. 그때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왔어요.”
에스페란사도 고개를 들었다. 작은 강아지가 황동으로 된 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멀쩡해 보이던 꼬리가 갈고리 모양으로 변해서…….
“저게 뭐야?”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희게 질린 채 입술을 잘근거렸다. 신음 소리의 주인은 짐승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아니.
“시체인가……?”
“시체가 무서워요?”
시더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비꼼 없이 순수한 의문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많이 봤어요. 무서운 건 아니지만…….”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 어쩔 수 없이, 혹은 그럴 만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결코 좋아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게임 속 일이었다. 아무리 진짜 같아도 진짜가 아니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진짜다. 이곳에서 사람을 죽이면, 진짜 살인자가 된다.
게임에서도 대체로 살인을 멀리하긴 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 단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총까지 든 산적들에게 구태여 몽둥이를 쓴 이유도 그것이었다.
진짜 사람이라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좋아지지는 않아요.”
“좋아할 필요는 없죠.”
건조하게 대꾸한 시더가 발치까지 다가온 오토마톤을 들어 올려 에스페란사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옷이 물을 먹은 데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구의 남자가 결코 가볍지 않을 텐데, 그는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은 듯 두 손으로 가뿐히 일으켰다.
“살아 있네요. 시체를 안 봐서 다행이죠?”
에스페란사는 뒤늦게 대답했다.
“아, 네.”
하지만 숨만 붙어 있다뿐,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두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아늑했던 자리에서 벗어나 비를 다 뒤집어써 가며 말에 올라탔다. 시더가 어설프게 세운 파이프를 가리키자 에스페란사가 단호히 말했다.
“버려요.”
“그러시다면야.”
“아, 그 사람은 제가 데리고 탈게요.”
자연스럽게 쓰러진 남자를 들고 말에 탄 시더를 본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당연히 그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시더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당신은 이 사람 몸집의 반밖에 안 되는데, 당신이 데리고 탔다간 미끄러질걸요.”
아무리 힘이 세고 순발력이 좋아도, 달리는 말 위에서 의식 잃은 남자가 미끄러지는 것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몸집이 반은 아닌데. 남자는 시더보다 키가 조금 작고 몸집이 조금 큰 정도였다. 에스페란사가 입을 다물자 시더는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돌아갔을 때 당신이 쓰러진 사람을 말에 태우고 있으면 마벨우드 일가 앞에서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거라면 매우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에스페란사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자, 시더는 들으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 납득해 버리면 내가 정말 쓰레기 같잖아요.”
“뭐어.”
에스페란사가 말을 흐리자, 시더는 눈을 흘겼다. 그래 봐야 비가 쏟아지는 숲이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시더의 기마술은 늦은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에서 빛을 발했다. 놀랍게도, 정신 잃은 사람까지 가누는 중에도 시더는 안정적으로 에스페란사와 같은 속도를 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말을 타는데도 그랬다.
사격술도 상당하고, 기마술은 에스페란사만큼이나 능숙하다. 그러나 정작 진짜 천재성을 발휘하는 것은 마도 공학. 이쯤 되면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앞서 나가는 시더의 뺨에 긴 물줄기가 가로로 튀었다. 푹 젖은 머리칼과 속눈썹이 어두운 숲에서도 빛을 냈다.
집중해 말을 모는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지만, 더 이상 오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을 대면하고 있지 않을 때 자연스레 나오는 본모습이었다.
고요하게 고정된 시선. 세상을 향해 그 무엇도 발산하지 않는.
에스페란사는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두었다. 말발굽 소리가 빗소리를 뚫었다. 숲이 빠른 속도로 뒤로 멀어졌다.
* * *
“세상에, 세상에. 얼른 들어와요.”
푹 젖은 데다 죽어가는 사람까지 데리고 온 손님들을 보고 코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저녁을 먹고 쉬어야 하는 시간에 하녀들이 바삐 움직여 수건을 가지고 오고 목욕물을 데웠다.
목욕을 마친 에스페란사가 커다란 수건을 가져다준 하녀에게 미안한 눈짓을 해 보였다. 코델리아가 주춤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들고 있는 쟁반 위에는 데운 우유가 김을 내고 있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미안해요. 기다린 건 아니죠?”
“먼저 먹었어요. 할머니는 아쉬워하셨지만, 비가 오니까 아마 마을에서 묵고 들어오려나 보다 했죠. 그런데 웬 사람이에요? 그것도 저렇게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사람이라니.”
“숲에 쓰러져 있었어요. 크게 다친 것 같던데…….”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피에 뒤덮여 얼굴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이나 잘 관리된 머리칼에서 귀하게 자란 티가 물씬 풍겼다.
그러나 그렇게 곱게 자란 인물이 왜 뜬금없이 마벨우드에서 부상을 입은 채로 나타났단 말인가?
“일단 의사를 불러 뒀어요. 깨어나면 알 수 있겠죠.”
“로드 에이번데일은요?”
“방으로 올라가셨어요. 하인들이 목욕물을 올려다 드렸고요. 아마 지금쯤은 주무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코델리아보다는 시더 클라이번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는 무슨.
“절대 자고 있을 리가 없어요. 연구실에나 안 들어가 있으면 다행이죠.”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위에서 뚝딱대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페란사가 보란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잠깐 이어지던 소리가 머잖아 줄어들었다. 코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도감은 딱 반나절을 갔다. 시더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예의를 지켜 조용히 있었던 것은 아니고, 평소처럼 늦잠을 잤기 때문에 소식을 조금 늦게 들었던 것뿐이다.
시더를 제외한 세 사람이 아침 일찍 모여 있던 응접실로 의사가 내려왔다.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 아닙니다.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웰즐리 부인과 코델리아가 서로를 마주 보고 의문을 나누었다. 그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페란사, 같이 가겠니?”
할 일도 없었던 에스페란사가 선뜻 따라나섰다. 정체 모를 남자와 ‘연약한 숙녀’인 두 사람을 대면하게 하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잇따랐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적당히 좀 일어나지.’
시더는 아직도 침실에 있다. 어제 밤새도록 뭔가를 하는 것 같더니, 결국 또 새벽 늦게 잠이 든 모양이다.
물론 시더가 없다고 에스페란사가 두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건장한 남자가 있으면 일단 덤비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그것만도 열 배는 더 편해진다.
“들어가겠습니다.”
손님방 앞에 도착해 의사가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오.”
예상보다 앳된 목소리였다. 기껏해야 스물 초반. 상당히 단련되어 있던 체격 탓에 무의식적으로 다섯 살 정도 나이를 올려잡고 있었다. 스물 초반의, 아마도 귀족일 청년. 문이 열렸다.
짧은 붉은 머리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비록 얼굴에 상처가 남기는 했지만, 어디에서나 인기를 끌 준수한 생김새였다.
남자는 몸을 일으키려던 것 같았으나 고통 탓에 실패하고 멋쩍은 얼굴로 결국 침대에 주저앉았다.
“저택의 주인이시군요. 앉아서 뵙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그렇다 치고, 예의를 엄격하게 따지는 웰즐리 부인조차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앞서 들어왔던 에스페란사가 의아함을 느끼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코델리아는 숨도 쉬지 못하고 입술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괜찮아요? 코…….”
고운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코델리아가 몸을 휙 돌려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