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2
42화
“아.”
웰즐리 부인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조카손녀가 미흡한 모습을 보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씀을 낮추시지요.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분들이 아니십니까?”
“당치 않습니다. 백작의 목숨을 구한 것은 저희가 아니라 제 옆의 숙녀분과, 이 자리에 없는 다른 신사분입니다. 두 분은 저희의 손님이니 그 공을 빼앗을 수는 없지요.”
그렇게 말하는 웰즐리 부인의 목소리가 사뭇 냉랭했다. 인상이 냉정하고 엄격해 보이는 부인이지만 기본적으로 인정이 많고 다정했다. 웰즐리 부인은 시더나 에스페란사에게는 결코 저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저렇게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쪼록,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험한 일을 당해 피곤하실 테니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에스페란사, 나가자꾸나. 닥터 멜슨. 손님의 치료를 부탁하네.”
“예, 예. 부인,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어리둥절한 청년을 두고, 웰즐리 부인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는 에스페란사를 데리고 나왔다. 청년은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눈만 동그랗게 떴다.
“닥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소개도 못 드렸는데.”
천천히 닫히는 문 사이로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꼿꼿이 서 있던 웰즐리 부인의 몸이 휘청였다.
“괜찮으세요?”
에스페란사가 황급히 부인을 붙들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던 부인이 겨우 몸을 가누고 일어났다.
“추태를 보였구나. 이해해 주길 바란다. 우리는 결코 예상치 못한 손님이라고 박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단지.”
웰즐리 부인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 쉬어야겠다.”
부인의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부축했다. 사라져 가는 웰즐리 부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에스페란사는 부인이 방 안의 청년을 ‘백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신분 높은 귀족이라고만 생각한 에스페란사와 달리 나인 호더 사교계를 잘 아는 그들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바로 한눈에 알아차린 것이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듯 보였다. 그 청년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나인 호더 사교계의 인기인인 코델리아조차도. 아마도 나인 호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시더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두운 숲속이었다고는 하지만, 피범벅이 되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내내 같은 말을 타고 오면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 사람은 원래 관심 없으면 눈길도 안 주긴 하지.’
지금 당장 궁금증을 해소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에스페란사는 하녀들에게 일러 코델리아의 방에 따뜻한 우유라도 가져다주라고 말한 뒤 응접실로 돌아갔다.
텅 빈 응접실에 앉아서 손장난이나 하고 있자니, 뒤늦게 일어난 듯 시더가 들어왔다.
“아무도 없네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요.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렇고.”
그렇다면 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그들은 시더의 연구실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꼭 닫았다. 장성한 신사 숙녀가 단둘이 닫힌 방에 있다니, 코델리아나 웰즐리 부인이 보면 기겁을 할 일이었다.
정리를 덜 마친 상태라 정신없는 방이지만, 어제 숲으로 가면서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 꽤 많은 것을 도로 넣어 두었기 때문에 자리만은 꽤 넉넉해 보였다. 에스페란사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어제 우리가 데리고 온 사람 말이에요.”
자초지종을 붙여 설명해도 그다지 길지 않은 이야기였다. 상황을 대강 파악한 시더는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은 못 알아봤었죠, 어제?”
“몰랐어요. 내가 아무리 사교계에 어두워도, 나인 호더의 유력 인사라면 얼굴을 모를 수가 없죠. 그럭저럭하는 뜨내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본 적 있는 사람이면 알아는 봤을 거고.”
지금까지 나인 호더 사교계에 등장한 적 없는 인물. 그러나 코델리아와 웰즐리 부인은 한눈에 알아본 인물. 게다가 코델리아가 보자마자 도망치고 웰즐리 부인마저 적대감을 드러냈다면?
“그런데 당사자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고요?”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묻던걸요.”
“……여기까지 온 건 자의가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하긴, 양심이 있으면 그럴 수가 없지.”
이 저택에서 제일 양심 없는 양반이 쉽게도 양심을 운운했다. 에스페란사의 힐난 어린 눈길에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모르겠어요?”
“어떻게 알겠어요?”
볼멘소리로 대꾸하자 시더가 검지를 들어 짧게 흔들었다.
“힌트를 줄게요. 레이디 코델리아 같은 인물은 특별히 척을 진 사람이 없어요. 마벨우드 가문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잊지 않기 때문이죠.”
뜬금없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마치 에스페란사의 답답한 속을 들여다본 듯 흐릿한 안개를 흩어냈다.
“설마. 아니, 왜?”
“알아들었군요. 이래서 당신이 참 좋아요.”
턱을 괴고 앉은 시더가 흘리듯 말했다.
에스페란사가 잠시 멈칫한 사이, 그는 마치 그 말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그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뱉은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던바틴의 렌프루.”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청년의 이름도 명쾌해졌다. 던바틴에 아는 사람이라곤 13년 후의 인물들밖에 없는 에스페란사조차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 던바틴 공작의 장남이자 후계자. 던바틴 공작의 두 번째 작위인 스털링 백작으로 불리며, 13년 후의 세계에서는 던바틴 공작으로 자리하는 인물이다.
‘공작 부인이 누구였더라?’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던바틴 던전 공략에 나섰던 것도 벌써 몇 년 된 이야기였다. 렌프루 일가는 북부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므로 나인 호더나 다른 지역에서 그들을 볼 일은 잘 없었다.
“레이디 코델리아는 딱하게 됐군요. 던바틴을 피해 영지로 왔더니 정작 영지에 던바틴이 나타나다니.”
시더가 연민이라곤 하나도 스며 있지 않은 목소리로 읽듯이 말했다.
“……던바틴을 피해 와요?”
“몰랐어요?”
전혀. 당연히 두 사람 때문에 마벨우드에 오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던바틴 때문이었다니.
던바틴이라면 질색할 법도 했다. 아까 너덜너덜하던 알라스테어 렌프루의 따귀를 올려붙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코델리아의 이성을 칭송해야 할 판이다.
“던바틴은 왜 하필 이 시기에 나인 호더에 와요! 어차피 딱히 사교계와 친하지도 않잖아요?”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하니까요. 알라스테어 렌프루도 혼인적령기에 들었을 테니, 특히 그렇게 보수적인 지역에선 혼인이 빠르기도 하고요.”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기엔, 그쪽 동네에도 자기들끼리의 사교계가 있잖아요. 굳이 추문을 감수해야 해요?”
귀천상혼을 논하는 시대도 아니고, 나인 호더에 온다고 특별히 더 좋은 신붓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벨우드 남작이 사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금, 나인 호더에서 던바틴이 좋은 취급을 당하지 못할 것 정도는 예상하고도 남을 텐데.
“상관없는 거겠죠. 봐요, 결국 도망친 게 누군지.”
그래. 결국 그건 다 이론에 불과하다. 에스페란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델리아에게 가 봐야겠어요.”
“……그러도록 해요.”
“당신은?”
“나도 따라가란 소린 아니겠죠?”
시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젓자, 그는 바로 덧붙여 말했다.
“내 연구 장비 다시 줘요. ……어제 준 건 레이디 코델리아에게 보여 주지 말고.”
어제 장비 없이 연구하느라 고생을 좀 한 모양이다. 에스페란사는 키득거리며 인벤토리를 열어 주었다.
* * *
코델리아는 눈이 빨개진 채로 베개를 잡아 뜯고 있었다. 말도 못 하고 훌쩍이고 있을 것만 생각했던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뭐야,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 에스페란사?”
“어, 괜찮은 건가요?”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요? 양심도 없는 작자 같으니라고, 감히 내 땅에 발을 딛다니. 에스페란사,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요? 던바틴이에요! 던바틴이라고요!”
하나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지금 보니 빨개진 눈은 오직 분노와 모멸감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울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날 알아보지도 못했어. 아무리 초상화만 교환했다지만, 파혼한 약혼녀 따윈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가 보죠. 가만두지 않겠어요. 아깐 할머니가 계셔서 못했지만, 지금 가서 쫓아낼 거예요. 감히, 감히…….”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가 들어오자마자 마치 잘됐다는 듯이 잡아끌었다.
“날 좀 도와주지 않을래요? 에스페란사는 파오룬에서 무술을 배워 왔으니까. 그 무도한 작자가 내게 해코지라도 하지 않게요.”
설마 마벨우드의 땅에서 마벨우드 남작의 손녀에게 손찌검이라도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으나, 에스페란사는 잠자코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이 놓인다면야.
게다가 그자를 데리고 온 건 시더와 에스페란사의 짓이었다. 코델리아는 그들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게 아닌가.
코델리아는 알라스테어 렌프루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그 나이 대의 청년치고는 낮은 목소리가 그들을 반겼다.
“아.”
의사나 하인인 줄 알았는지, 예쁜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고개를 들이밀자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당황해 눈을 굴렸다.
“아까의 실례를 사죄하러 왔어요.”
“그러실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제가 폐를 끼치고 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폐인 줄은 아는 모양이지? 코델리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느 무도회장에서 만난 신사를 대하듯 예의를 차렸다.
“그렇다고 한들 실례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요. 다만 제게 변명할 기회를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십시오.”
알라스테어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가는 코델리아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스털링 백작께서 저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을 보자마자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지요.”
의아한 낯을 감추지 못하는 청년의 녹색 눈동자를 직시하며 코델리아는 뼈를 담아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던바틴의 스털링 백작께서 이 미천한 마벨우드에 임하셨을까? 어떻게 감히 그러실 수가 있을까?”
“무슨…….”
마벨우드? 알라스테어가 입 안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여기가 마벨우드라고?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아무것도 묻질 못했다.
“설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알라스테어는 몰려오는 격통에 신음을 터뜨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델리아는 냉랭하게 그를 노려보며 무릎을 굽혔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코델리아 마벨우드입니다. 이 이름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