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3
43화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지금의 귀족적인 모습과 달리 속은 썩어 문드러진 불량배였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요란하게 파혼한 약혼녀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고릿적 풍습을 따라 초상화까지 교환했으니 사실은 소개도 전에 알아봤어야 옳았다.
그러니까 이곳은 던바틴 하면 이를 갈고 낫을 집어 들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땅인 것이다.
“던바틴 공작께선 탄식을 금치 못하시겠군요. 귀중한 후계자가 저주받은 땅에 머물고 계시니. 공작님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던바틴으로 돌아가실 수 있길 바랄게요. 아니, 나인 호더로 가시려나?”
에스페란사는 인형의 눈처럼 예쁜 눈을 번뜩이며 분노를 쏟아내는 코델리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러다 정말 따귀라도 올려붙일 것 같아서였다. 알라스테어는 그제야 에스페란사의 존재를 인식하고 몸을 흠칫 뒤로 물렸다.
“몰랐습니다. 정말로, 여기가 마벨우드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안 왔을 거란 뜻이다. 그 이유가 뭐든, 코델리아는 잔뜩 빈정이 상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저주받은 땅에 발을 들이고 마셨군요. 악령의 저주가 서린 땅에서 심지어 하룻밤을 보내셨고요? 어머나, 그러고 보니 저주를 받기는 하신 모양이죠?”
코델리아의 눈이 그의 몸에 둘둘 감긴 붕대를 위아래로 슥 훑으며 비웃자, 알라스테어가 처음으로 눈을 부라렸다.
“저는 저주 때문에 다친 게 아닙니다!”
“그건 던바틴 공작께서 판단하실 일이죠. 하지만 백작께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탁드리건대 이번에는 우리 마벨우드를 백작의 일에서 빼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다섯 살도 아니고 50살이나 먹어선 아직도 요정 동화책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이 보내는 편지야말로 진짜 저주 같으니까.”
알라스테어는 모욕감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지만, 그럼에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가히 오스던 전역에서 비웃을 만한 파혼 사유였다.
“그럼, 제 사과를 받아 주시는 걸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어요. 부디 조속히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얼른 쾌차해서 떠나지 않으면 팔이라도 부러뜨려 주겠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코델리아가 휙 몸을 돌렸다.
“에스페란사, 이제 우리 가요.”
몸이 그 모양이어서였는지, 아니면 다행히 성정이 난폭하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코델리아와 에스페란사에게 주먹 한 번 들어 올리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코델리아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낮춰 주지는 않았다. 들으란 듯 발을 쾅쾅 구르며 응접실로 내려가는 기세가 대단했다.
에스페란사는 중간에 슬쩍 빠져나와 시더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난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시더는 고개 한 번 들어 올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나사를 몇 개 더 조인 후에야 고개를 든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할래요, 아니면 이것부터 볼래요?”
그가 그렇게 철저하게 집중한 상태로 다루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 그리고 예의 물건을 본 순간, 에스페란사의 입이 벌어지며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아……!”
얼마 전 시더가 에스페란사에게 줬던 바로 그 총이었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와는 형태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아한 총신을 가볍게 쓸어 보았다. 전과는 달리 좀 더 묵직해진 총을 어깨에 짊어 보았다.
“어때요?”
“어, 좋은 거 같아요.”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원래 쓰던 것과 비슷한 무게감이었다. 무게 중심도 그렇고. 조금 더 길어진 총신과 레버로 바뀐 다이얼. 그때 콸콸 쏟아 냈던 불만 사항들을 시더는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총은 그의 세심한 손끝에서 한층 더 정교한 무기로 재탄생했다.
“공격 방식은 지속 공격으로 바꿨어요. 마력탄 연사도 괜찮겠지만, 당신이 이쪽이 편하다면서요? 대신 알아서 잘 끊어 써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잘하니까.”
에스페란사는 몸에 딱 맞게 바뀐 총을 만지작거리느라 흘리듯 대답했다. 들뜬 티가 감추려야 감춰지질 않았기에, 시더도 그 성의 없는 대답을 기분 좋게 넘겼다.
“고마워요. 진짜로.”
이번의 감사 인사는 시더도 선뜻 받아들였다. 에스페란사는 한참 더 총구에서 개머리판으로 이어지는 몸체를 만지작거렸다.
한 번에 모든 걸 완벽하게 만들 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 번 만에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더는 해낸 것 같았다. 예상할 수 있는 하자를 고치면서 예상외의 하자까지 잡아낸 것 같다.
자세한 건 쏴 봐야 알겠지만, 척 봐도 장전되는 소리와 마력이 돌아가는 형태가 보통이 아니었다. 대단한 혁신은 없었지만, 가능한 기술 내에서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물건이었다.
“와,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시더는 그 혼잣말이 적잖이 마음에 든 듯 흐뭇한 얼굴로 턱을 괴고 에스페란사가 총을 이리저리 관찰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한번 써 봤으면 좋겠는데…….”
최소 출력으로 쓴다고 해도 사격을 할 만한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마벨우드에 그럴 만한 장소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정 안 되면 숲에 다시 들어가서 사냥이라도 하는 수밖엔.
“멧돼지라도 잡아 올래요?”
시더가 마치 에스페란사의 머릿속을 읽은 듯 말했다.
“잡아서 어쩌게요? 바비큐라도 해 먹게요?”
“하는 것 없이 식량만 축내는 손님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레이디 코델리아는 당신이 자기랑 안 놀아 주고 나가는 걸 싫어할걸요.”
“코델리아 하니 말인데.”
에스페란사는 그제야 여기까지 온 목적을 깨닫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알라스테어 렌프루 본인이더라고요.”
비록 그에게서 13년 후의 공작과 같은 노련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에스페란사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든 던바틴 공작의 모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코델리아가 어마어마하게 화가 나서, 그 사람 방을 찾아가서 한 소리 하고 왔어요.”
“그래요?”
때마침 아래층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게 말이나 되는 말씀이세요!”
이크.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벌인 일이잖아요.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벌인 일이라……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우리가 데리고 왔으니까요.”
“나인 호더로 가던 던바틴이 난데없이 마벨우드에서 상처입은 채로 발견된 건 우리 탓이 아니죠.”
그건 그렇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던바틴만 보면 그렇지만, 어찌 됐건 우린 손님으로 와서 군입까지 얹어 준 꼴이란 말이에요.”
“그래서요?”
“사과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과할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당신 마음이 편해진다면야.”
의외로 산뜻하게 긍정의 뜻을 표한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나온 김에 해치우는 게 낫겠죠? 지금쯤이면 주인들의 회의도 적당히 결론이 났을 거고. 더 큰 소리가 나기 전에 제지하는 게 서로서로 좋을 테고.”
에스페란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아래층을 향해 눈짓했다. 사실 아까부터 아래층 소리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말도 안 돼요. 전 절대 납득 못 해요.”
코델리아는 단호했다. 아까는 분노에 충혈되었던 눈이 지금은 정말로 울듯이 촉촉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에스페란사가 우뚝 섰다. 뒤따라오던 시더가 앞질러 가려고 하자, 소매를 붙잡았다. 왜요? 그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턱짓으로 응접실 쪽을 가리켰다.
“코델리아, 네가 뭐라고 하든 스털링 백작은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나을 때까지 마벨우드에 머물게 될 거다. 손님으로서 말이지. 부디 손님을 대할 때의 예의를 지켜주기 바란다.”
“어떻게 제게 던바틴과, 그것도 저 알라스테어 렌프루와 한집에 지내라고 하실 수가 있으세요? 저 악랄한, 끔찍한 렌프루를 손님으로 모시라니요!”
“저런, 아직 결론이 덜 났나 본데요. 그냥 다시 올라갈까요?”
귓가에 거의 입술을 붙이고 속삭인 말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주저 않고 그의 손등을 꼬집었다.
“지금 재미있는 상황 아니에요.”
“우리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던바틴 놈들이라고요!”
응접실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잘 하면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누워 있는 방까지 들릴 것 같았다.
“우리 명예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제가 왜 여기 있죠?”
웰즐리 부인이 입을 닫았다. 코델리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제 명예만 땅에 떨어졌군요.”
“코델리아.”
“저도 알아요. 아무리 찢어 죽이고 싶은 렌프루라고 해도 환자를 쫓아낼 수는 없는 거겠죠. 알지만……!”
결국 코델리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웰즐리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에게 눈짓했다.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들어가야죠.”
시더는 반쯤 열린 응접실 문을 젖히고 들어갔다. 웰즐리 부인이 황급히 입을 닫고, 코델리아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냈다.
“우리가 좋지 않은 때에 내려온 걸까요?”
“그럴 리가요. 잠깐 목소리가 커졌는데, 백작께서 들으셨을까 저어되는군요.”
“전혀 듣지 못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문에 귀를 대고 전부 엿들었던 시더가 양심도 없이 말했다. 거짓말할 때는 더 잘 웃는군. 에스페란사는 그를 흘끔거리며 생각했다.
“저희가 괜한 일을 했나 싶어요. 일을 키워 버렸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니다.”
1인용 소파에 앉은 웰즐리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친 사람을 가만히 두고 왔다면 자네에게 더 실망했을 거야. 그가 하필 렌프루였던 것은…… 자네가 어찌 알았겠나? 알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하지만. 저절로 코델리아에게 시선이 갔다. 코델리아는 여전히 새빨간 눈으로 말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당장 쫓아내고 싶은 마음인 것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스털링 백작이 마벨우드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것보다는 백만 번 나아요. ……손님으로 데리고 있기는 정말 싫지만.”
“코델리아!”
웰즐리 부인이 엄격하게 타일렀지만 코델리아는 연신 입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살아서 마벨우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냥 지금 기차를 태워서 나인 호더로 보내면 안 되나요?”
에스페란사가 뚱하니 묻자, 코델리아는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그러다 시더도 똑같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내렸다. 웰즐리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도리가 아니란다. 그가 멀쩡한 몸으로 와서 손님으로 머물기를 청했다면 나는 그를 쫓아냈을 거다. 결투를 신청해서라도 마벨우드 땅에 발도 대지 못하게 했겠지. 하지만 다친 몸으로 들어온 자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원수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지.”
만약 에스페란사였다면 주저할 것도 없이 내쫓았을 것이다. 숨이나 붙여 줬으면 됐지, 부러진 다리가 붙을 때까지 치료해 주며 모시고 지내야 된단 말인가?
하지만 코델리아도 결국은 동의했고, 시더도 당연한 결과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치관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알라스테어 렌프루를 찢어 죽이고 싶은 건 코델리아지 에스페란사가 아니었으므로, 본인이 납득한다면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