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식탁에 전운이 감돌았다.
코델리아의 부탁에 따라, 코델리아를 에스코트한 것은 시더였다. 똑같이 백작이라고 불리지만 알라스테어의 스털링 백작 작위는 엄연히 말하면 본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에, 웰즐리 부인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을 뿐 말없이 수긍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에게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로, 에스페란사와 시더를 환영하기 위해 마련했던 정성 어린 만찬과 달리 오늘의 만찬은 강박적일 정도로 화려했다.
적당히 뭉게 버렸던 예절도 까다롭게 지켰다. 남녀의 수를 맞추기 위해 영지 목사의 아들이 급하게 초대되었다.
분위기가 워낙 이상한 탓에 아직도 손님을 아직 소개받지 못한 그는 멀뚱히 에스페란사에게 말했다.
“코델리아 양이 저렇게 외면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어요. 신경 쓰실 일은 아니에요.”
에스페란사는 적당히, 하지만 단호하게 질문을 막았다.
웰즐리 부인은 알라스테어를 예의 바르게 백작이라고 호칭하며 대화의 기회가 충분히 돌아가도록 했다.
아까 응접실에서 웰즐리 부인의 진심을 알지 못했다면 순수한 호의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알라스테어 역시 웰즐리 부인에게 깍듯했지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로드 스털링,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알라스테어의 정체를 깨달은 목사의 아들이 딸꾹질을 했다. 에스페란사는 그를 애잔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걱정해 주신 덕에 좋아졌습니다. 오래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조만간 돌아가고자 합니다.”
“나인 호더로 가시나요?”
지금까지 알라스테어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코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나인 호더 사람들이 우릴 비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억지로 기차에 실어 보내다니.”
“코델리아!”
웰즐리 부인이 일갈하자, 코델리아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스털링 백작, 대신 사과드립니다. 코델리아가 한 말은 괘념치 마십시오. 하지만 저 역시 부상 당한 몸으로 기차 여행을 하시는 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코델리아가 ‘흥, 염치는 있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시더는 들었다. 다행히 아주 작게 말했기 때문에, 시더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요. 로드 스털링도 당연히 그리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던바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요.”
“……그렇기는 하지만.”
갓 스물 된 스털링 백작이 노회한 웰즐리 부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럴 관계가 아니지 않으냐’는 소리를 할 수도 없을 테니까.
완벽한 만찬이었건만,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상자를 씹듯 억지로 씹어 넘겨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시더와 목사의 아들만 시가룸으로 향했다. 알라스테어는 시가를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이후, 자기가 마벨우드 일가와 에스페란사만 있는 응접실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시퍼레졌다.
“당신 정말 파오란 피워 볼 생각 없어요?”
알라스테어 못지않게 피곤해 보이는 시더가 파오란을 입가에 가까이 대주며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편식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뒤로 뺐다.
“싫은데요.”
“지금 저 사람이랑 단둘이 시가룸에 버려지게 생겼어요.”
시더가 에이번데일 백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목사의 아들은 그에게 열렬하게 달라붙었다. 마도 공학에 관심이 있다면서 기초적인 걸 뻐기듯 말하는데, 상대해 주기 매우 귀찮다는 얘기였다.
“스털링 백작이 있는 내내 이런 식이어야 할까요?”
“오늘은 만찬이어서 더 엄격한 게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따 봐요.”
시더는 끌려가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시가룸으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쥐 죽은 듯한 침묵만 흘렀다. 견디다 못한 웰즐리 부인이 물었다.
“스털링 백작, 체스는 둘 줄 아시겠지요?”
“규칙만 아는 정도입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알라스테어는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혹시나 뻐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혹은 잘한다고 했다가 덤터기라도 쓰는 건 아닐까.
“코델…… 아니지, 에스페란사. 체스는 둘 줄 알지?”
“저도 규칙만 아는 정도예요.”
이쪽은 진심이었다.
“잘됐구나!”
안 잘됐어요.
에스페란사는 분위기의 제물이 될 것을 직감하고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시더가 빨리 시가룸에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 * *
전적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전부 졌으니까. 처참하게.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에는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에스페란사를 곁눈질했고, 이윽고는 져 주기 시작했다.
‘이걸 받아 줘, 말아?’
어린애가 먹으라고 비숍을 내미는데 이걸 받아 주기도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안 받자니 일천한 체스 지식으로도 몇 수 안에 끝장이 날 게 보였다.
“정말 규칙만 아는군요?”
“그렇다고 했잖아요…….”
왜 다들 안 믿어서. 코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판세를 살폈다. 웰즐리 부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마벨우드 대표로 출전한 것마냥 어깨가 무거웠다. 보다 못한 코델리아가 끼어들었다.
“에잇, 나와 봐요. 다음 판은 내가 둘게요!”
“저는 이제 그만…….”
알라스테어가 입을 열었다가, 조용히 닫았다.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코델리아와 알라스테어가 흑백 체스 말을 가운데 두고 붙었을 때쯤 시더가 돌아왔다. 어떻게 수완을 발휘했는지 목사의 아들은 돌아간 상태였다. 어차피 인원수 맞추러 온 것이니 굳이 남아 있어 줄 필요도 없었다.
“로드 에이번데일, 에스페란사에게 체스를 가르치지 않았나 봅니다.”
“할 줄 모르던가요?”
알싸한 파오란 연기가 옷깃에 묻어 있었다. 시더는 품 안에서 향수로 보이는 액체를 꺼내 소매 끝에 뿌리며 물었다.
“할 줄만 알아요.”
“저런.”
“백작이 칼리지에서 체스 챔피언이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시더에게서 ‘운이 좋았습니다’와 같은 겸양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입꼬리를 싱긋 올리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행마법부터 하나하나 가르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요.”
또 그렇게 말해 놓고는 에스페란사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래도 배워 볼래요?”
“그 말을 듣고요? 됐어요, 됐어요.”
흥미도 없었다. 그사이 알라스테어와 코델리아는 한 번 씩 승패를 주고받으며 박빙의 승부를 이어 가고 있었다. 시더는 체스판에 시선을 줬다가 미련 없이 떼어 내며 말했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로드 스털링이 마벨우드까지 오게 된 경위나 들어 보죠.”
아, 맞다. 그걸 물어봤어야 하는데. 분위기를 푸는 데 집중하다가 주객이 전도돼 버렸다.
“……그 말씀을 안 드렸군요. 여러분도 아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게임은 중단됐다. 체스판을 치우고, 의자를 가지고 와 둘러앉았다. 시더가 자연스럽게 술이 달린 작은 쿠션을 에스페란사에게 쥐여 주자 코델리아가 묘한 눈으로 쿠션을 바라보았다.
“쓸래요?”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아무도 쿠션을 들고 있지 않다. 에스페란사는 슬그머니 쿠션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분위기가 정돈되자 알라스테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결코 계획된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랬어야지. 코델리아가 새침하게 중얼거리다 웰즐리 부인에게 손등을 꼬집혔다. 이럴 때 쿠션이 쓰이는군.
“나인 호더까지 오는 길이 길어서 그리즐먼드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는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즐먼드는 나인 호더와 던바틴 사이의 중간 역인데, 땅덩어리가 곰 같이 생겼다.
“유독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까지 멀뚱거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나뭇잎을 치는 바람 소리가 스산한 새벽이었다. 수행하는 시종은 코를 골며 잠에 빠졌는데, 알라스테어는 홀로 눈을 말똥거리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한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나인 호더 땅에 가는 길에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들은 종종 그를 불면의 밤으로 이끌었다.
“늦기 전에 나가지.”
“쉿. 소리 낮춰.”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그의 방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라스테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수상의 개들이 따라붙었어. 꼬리를 밟혔다간…….”
알라스테어는 유난히 청력이 좋은 편이었다. 조심히 문에 귀를 기대고,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수상과 척지지 않는 게 좋지만, 중요한 일이니 필요하면 죽여도 되겠지.”
헙. 알라스테어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척을 눈치챈 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여관 밖으로 두 필의 말이 해 뜨는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앞에서 어떤 음모가 지나갔다. 알라스테어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곧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휘갈겨 놓고, 마구간에서 아무 말이나 끌고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자들을 쫓아 달리고 달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빽빽한 숲속에서 복면을 쓴 자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제 몸에서 던바틴의 문장이 새겨진 시계를 발견하곤 저를 살려 둔 것이 다행이지요. 기절했던 것 같은데, 그게 아마 그 숲 외곽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웬 도적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화가 많이 나 보였지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움찔했고, 시더는 뻔뻔스럽게도 ‘저런’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숙녀분들 앞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닙니다만, 많이 맞았습니다. 제 몸에 생긴 상처는 다 그때 생긴 상처입니다.”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에게 잘 두드려 맞은 도적 떼는 마찬가지로 잘 차려입은 청년을 발견하고 화풀이를 한 것이다. 품 안의 귀금속도 다 빼앗겼다. 여행 중이라 중요한 물건은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도적 떼는 곧 이 근방을 떠날 것 같으니 걱정하실 것이 아닙니다만, 제가 처음 쫓은 자들은 숙련된 자들이었습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키운 자들일 겁니다. 아마도 암살자나 정보원 같은 자들이겠지요. 마벨우드가 목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암살자. 아주 최근에도 그런 자를 하나 만나지 않았던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 암살자들은 그들을 따라왔다. 누가 보냈는지도, 왜 보냈는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