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6
46화
“귀족 저택에는 묵어만 봤지, 주방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삐걱삐걱 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와 희뿌연 김.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면 연구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황동으로 만든 오븐 속에서 살이 오른 닭 요리가 돌아가고, 태엽을 돌려 놓은 자동 채칼이 감자를 썰고 있었다. 요리사는 틈틈이 행주로 도마 주변을 닦아 냈다.
“에이번데일 백작님, 고장 난 기계를 방에 올려다 드리겠다고 했는데요!”
나이 든 요리사는 귀한 백작을 지저분한 부엌에 모셨다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바로 보고 가겠네. 고장 난 기계는 어디 있지?”
“이쪽 레인지입니다.”
시더가 요리사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대저택의 기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세세한 것은 요리사들이 맞추어야 했고 기계는 시키는 일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기계 팔과 태엽이 삐걱거리며 음식을 만들어 내는 광경이 신기했다.
“마력이 다해서 멈춘 것뿐이네. 마정석을 새로 끼우게.”
“아…… 정말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야.”
시더는 싱겁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예요?”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할 때 보면, 마정석이 수명이 다한 것뿐일 경우가 꽤 많아요. 그다음이 마정석이 잘못 끼워진 경우.”
컴퓨터가 안 켜진다고 수십 대 때리고 보니 콘센트가 뽑혀 있다거나……? 유경험자는 할 말이 없었다.
“사람보다 기계가 똑똑하니까, 문제가 있을 때는 기계보다는 사람의 오류를 의심하는 게 낫죠.”
이게 정곡을 찔린 기분인가. 에스페란사는 가볍게 투덜거렸다.
“에스페란사아아!”
잠깐 딴짓을 하고 왔을 뿐인데, 코델리아가 에스페란사를 찾으러 달려왔다. 체스는? 하고 생각하던 에스페란사는 코델리아의 새빨간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의 손을 낚아채며 시더를 노려보았다. 시더는 보란 듯 입술을 끌어 당겨 웃었다.
“로드 에이번데일,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죠?”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싸웠나? 나잇값도 못하고 열여덟 살짜리랑 싸운 건가?
에스페란사는 설마 하는 눈초리로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저 양반이 제대로 답을 해 줄 리 없다는 판단이 들어, 자연스레 코델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얘기는 무슨요. 그보다 로드 스털링이 뭐라는 줄 알아요? 나인 호더의 예의는 너무 인사치레 위주라 진정성이 없대요!”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허례허식이 많다고……!”
“그게 그 말이죠! 내 친구들이 보내준 초대장이 전부 허례허식이라는 거예요?”
“상대가 오지도 못할 파티의 초대장을 보내는 게 허례허식이 아닙니까? 그리고 친구도 아니잖습니까. 친구의 어머니 정도면 모를까.”
“친구의 어머니도 친구예요!”
코델리아가 싸운 건 시더가 아니라 알라스테어 쪽인 것 같다. 체통도 없이 쿵쿵거리며 쫓아온 알라스테어가 마찬가지로 열이 오른 얼굴로 말했다.
“파티에 가고 싶어 하시면서 갈 수도 없는 초대장만 보고 계시길래 한 말일 뿐입니다.”
나름대로는 위로를 하려고 한 말에 싸늘한 대꾸가 돌아오자 적잖이 무안했는지, 지금껏 얌전하던 알라스테어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누가 그런 청승을 떨었다는 거예요?”
코델리아가 발끈하며 반박했지만 에스페란사도 시더도 이 말만은 알라스테어가 옳았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나인 호더에서 한창 이런저런 파티를 다니며 사교에 힘써야 할 시기에 쫓기듯 마벨우드로 와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요, 했어요. 근데 그게 누구 때문인데요?”
“저 때문이란 말입니까? 왜…….”
알라스테어의 말끝이 사그라들었다. 코델리아는 그를 따갑게 노려보았다가 휙 몸을 돌려 사라졌다. 알라스테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스페란사를 향해 물었다.
“미스 헌터, 혹시 레이디 코델리아께서 사교 시즌에 마벨우드로 돌아오신 게, 저 때문입니까?”
에스페란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알라스테어는 커다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 차라리 나인 호더에서 부딪혔었더라면…….”
“구경거리가 됐겠지요?”
“……그렇군요.”
잠깐 구경거리가 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남 말하기 좋아하는 나인 호더 사교계에서는. 하지만 누가 더 상처받는가? 누가 더 견디기 힘든가?
기사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나인 호더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던바틴과 사교계 최고의 명사 중 하나인 마벨우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쳐야 했던 코델리아. 아무것도 몰랐던 알라스테어.
그것은 권력이었다.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은 무형의 칼, 지닌 자가 지닌 줄도 모르는 무기였다.
“잘 알았습니다. 미스 헌터, 고견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스테어가 비틀비틀 목발을 짚고 코델리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따라갔다.
자기가 한 일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끼는 게 안되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상처받은 코델리아와 어쩔 줄 모르는 알라스테어의 모습이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기분 전환이 필요해 보이네요.”
시더가 마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자, 그는 그림 같은 미소를 띄웠다.
“나도 일이 다 끝났고, 당신도 크레용을 졸업하자마자 보모 일을 하느라 꽤 힘들었을 거고.”
짐짓 더 가볍게 말한 시더가 구슬리듯 물었다.
“총을 써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저 둘을 저렇게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나가자는 거예요?”
‘우리끼리’라. 시더는 몇 번 그 말을 입 안으로 굴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사실 어제 웰즐리 부인에게 기계 수리를 부탁받으면서, 대가로 받은 게 있어요.”
“……무전취식하면서 고작 레인지 좀 수리해 준 거 갖고 대가를 받아 냈다고요?”
“그렇게 얘기하니 내가 참 못된 사람처럼 들리는데.”
“못된 사람이니까요. 연구는 왜 해요? 장사나 하지.”
“장사는 품위가 없잖아요.”
농담으로 한 말에 엄숙하게 대꾸한 시더가 말을 이었다.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고, 사냥터 사용 권한을 받아왔을 뿐이에요.”
사격장이 없는 마벨우드 저택에서 총을 쏴 볼 수 있는 곳은 사냥터밖에 없었다.
“어차피 저 둘은 감정을 풀든지 아예 다시는 얼굴을 안 보기로 하든지,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결론을 맺는 데 옆에서 구경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고.”
“그건 그렇긴 한데, 애초에 전투원을 분산시키려고 나 혼자 숲에 다녀온 거였잖아요. 우리가 둘 다 같이 나가버리면…….”
망설이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있지만 않으면 괜찮겠죠?”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일주일 넘게 이어진 평화에 둔감해진 마음이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저, 저게 뭐야?”
“다들 도망쳐!”
하늘이 열렸다. 날아가는 새를 향해 총을 치켜들었던 에스페란사도, 말에 탄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시더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검은 균열이 생겼다.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시커멓고 불길한 기운. 요동치는 마력.
거대한 스푼으로 세상을 푹 퍼 올리듯이, 바깥 세계와 단절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
시더가 속삭였다. 이름뿐이었지만,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담겨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창백한 뺨을 움직여, 겨우 소리를 냈다. 안타깝게도, 그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던전이에요.”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도, 이 평화로운 세상에, 인간들만이 먹고 먹히는 세상에 도래한 재앙은 마치 처음 본 듯 생경했다.
그러나 능숙한 헌터의 몸은 이미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야 해요!”
던전에 휩쓸렸을 때의 제1 수칙. 베이스캠프를 확보하라.
* * *
같은 시각, 마벨우드 저택도 혼란에 휩싸였다. 지반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하늘이 어두워졌다.
“저게 뭐야?”
“하늘이 열리고 있어요……!”
고용인들부터 코델리아와 웰즐리 부인까지, 모두가 창가에 멀거니 붙어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왜, 왜 우리 마벨우드에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죠? 정말 저주라도 받은 걸까요?”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여 울음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알라스테어가 조용히 말했다.
“저주 같은 건 없습니다. 레이디 코델리아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도록 쥔 주먹을 천천히 펴면서, 코델리아는 알라스테어를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시혜적인 말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로드 스털링께서는 부친과 의견이 다르신가 보군요.”
일부러 뱉어 낸 매몰찬 말이 코델리아의 이성을 더 확실히 붙잡았다.
“일단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저택으로 들여보내요. 어서, 저택 문을 열어요!”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알아챈 코델리아가 지시하자, 고용인들은 여전히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문을 열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어쩔 줄 모르고 저택으로 몰려오던 영지민들이 금세 홀에 가득 찼다. 어림잡아도 50명 남짓이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만 휩쓸렸다 치더라도 아직 저 밖에 수백 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에스페란사는? 그러고 보니 로드 에이번데일도!”
“누구 미스 헌터와 로드 에이번데일을 본 사람 없습니까?”
알라스테어가 북적대는 고용인들을 향해 소리 높여 물었다. 답은 엉뚱하게도 영지민들 쪽에서 나왔다.
“아까 말을 타고 숲으로 가시는 걸 봤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정말이지 하필이면 ‘이런 날’이다. 알라스테어는 멍하니 하늘이 툭툭 괴물을 뱉어 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른 때라면 그도 도움이 될 수 있었겠지만,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있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은커녕 짐이나 안 되면 다행이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세 이상, 60세 미만. 지금 이 안에 있는 사람만 따지면 서른 명이에요. 임신 중인 레터 부인과 핀 부인을 빼고, 허리가 안 좋은 조지도 빼면 총 스물일곱 명이죠. 지금 우리가 가진 전투력이에요.”
코델리아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알라스테어는 코델리아의 눈이 반짝이며 정보를 정리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서나 보았던 모습이었다.
영지에 대한 관심과 위험 상황에서 침착하게 방법을 찾아 나가는 모습은 ‘레이디 코델리아’를 마치 영주처럼 보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