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자 다들, 일단 이 저택 안의 사람들을 지키는 걸 목표로 해요. 무기가…… 아버지가 쓰시던 사냥총이랑, 식칼이랑, 할머니, 혹시 가지신 것 있으세요?”
“호신용 권총을 내어 주마. 옛날 것이라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고용인들은 코델리아의 지휘 아래 뿔뿔이 흩어져 무기가 될 만한 물건들을 추려 왔다.
“로드 에이번데일의 방에 무기가 될 만한 게 있을 것 같은데.”
비상 상황이니 예의를 지킬 것도 없었다. 고용인들은 기계가 둘둘 돌아가는 연구실 대신 시더의 침실을 먼저 털어, 마력탄을 쓰는 권총을 찾아왔다.
“좋아.”
좋지 않았다. 하나도 좋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영주 대리로서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덜덜 떨고 있었다. 또 뭘 해야 하지?
“아, 식량. 식량을 확인해야지. 듀, 먹을 게 충분히 남아 있어?”
집사, 듀 허슬러가 바로 대답했다.
“며칠 전에 장을 봐 두었습니다. 손님이 계신지라 언제 만찬이 있을지 몰라 넉넉히 봐 두었는데, 다행입니다. 적어도 사흘 정도는 날 수 있을 겁니다.”
겨우 한숨 돌렸다. 코델리아가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사흘이라…… 사흘씩이나 버틸 수는 있을까? 눈앞이 어지러웠다. 안 돼, 버텨야 된다. 아무리 정정하다 한들 노인인 할머니와, 부상자인 스털링 백작, 그리고 고용인들과 영지민들밖에 없었다.
아무리 경험도 일천하고 나이도 어리다고 한들 ‘마벨우드의 레이디 코델리아’는 이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에이번데일 백작님입니다! 미스 헌터도 계십니다!”
소파를 짚고 있던 코델리아의 팔이 꺾였다. 문이 열렸다. 하늘을 덮은 괴조의 울음소리와 거의 동시에 에스페란사와 시더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페란사! 다친 덴 없어요? 로드 에이번데일, 괜찮은 거죠? 난,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긴장이 풀리자,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하며 말을 쏟아 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에스페란사가 힘으로 지탱해야 했다.
“이게 마벨우드에 닥쳤던 재앙의 정체예요. 던전이라고 하죠.”
에스페란사는 덤덤히 말하며 코델리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베이스캠프를 잘 지키기만 하면 나머진 나 혼자서도 해치울 수 있으니까.”
혼자 던전을 공략하는 일은 지지부진하고 어렵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게임 속에서 친분을 만드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공략을 혼자 진행해 왔다.
“혼자서요? 에스페란사, 위험해요!”
“괜찮을 거라고 약속할게요.”
코델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에스페란사는 분명 상당한 실력자이지만, 그것이 저런 압도적인 재앙 앞에서까지 당당할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코델리아, 난 자신 있어요.”
“하지만!”
무의미한 공방전이 계속될 것 같자,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앞에 팔을 뻗으며 코델리아를 떼어 냈다.
“그만. 레이디 코델리아, 이 건은 내가 보증하죠. 괜찮을 테니 보내 줘요.”
코델리아도 에스페란사가 이런 순간에 허언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백작이 보증하겠다고 하니, 더는 말릴 명분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짓으로 물러나자, 시더가 덧붙였다.
“그런데 레이디 코델리아께선 내 보증 따위보다 친구인 미스 헌터를 믿어야 하는 게 아닌지?”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쿡 찔렀다. 그만 좀 해요, 하고 속삭이자 시더는 억울하단 얼굴로 어깨만 으쓱였다.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로드 스털링. 군사학을 배웠죠?”
“예.”
알라스테어는 마치 베테랑 군인과도 같은 에스페란사의 태도에 놀라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를 전쟁터의 요새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야 역할을 나누어서 분산시키고 수비 지점을 정해서 거점 위주로 수비를 하면서 수시로 정찰을 하겠지요. 지휘관들은 따로 모여서 전략을 짜고 수정하길 반복할 테고, 순찰과 불침번도 정해야 할 테고.”
그대로 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에스페란사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코델리아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코델리아는 겨우 두 다리로 버텨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듀, 아까 말한 20세 이상 60세 미만의 영지민들을 다섯 명씩 조를 짜서 나눠야겠어. 나머지 사람들은 식사 준비나 부상자 치료 쪽으로 돌려줘. 닥터가 치료를 맡아 주시고요.”
닥터 멜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쏟아질 부상자를 생각하며 이미 거멓게 죽은 얼굴이었다.
“할머니, 아이들이랑 노인들을 맡아 주세요. 로드 스털링은.”
알라스테어는 미약하게 긴장했다. 그에게도 이 마벨우드에서 할 일이 있을까? 코델리아가 그에게도 일을 맡길 만큼 신뢰해 줄까? 그러나 지금 같은 시기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코델리아가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 스털링은 날 도와줘요. 작위도 없는 일개 숙녀의 보좌가 별로 내키진 않겠지만.”
“아닙니다.”
알라스테어가 재빨리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로드 에이번데일은 바빠지시겠어요. 무기 수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변변한 무기는 없지만. 필요하면 전투에도 참여해야 할 테고요.”
시더는 처음으로 코델리아에게 미소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대장장이가 아니에요, 레이디 코델리아. 마도구가 아니면 수리할 수 없어요.”
“로드 에이번데일.”
“그러니까, 마도구를 지원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코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게 당신 거예요?”
에스페란사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웰즐리 부인과 집사가 바쁘게 움직여 준 덕에 몇 명의 전투원을 제외한 영지민들은 홀을 비운 상태였다.
에스페란사는 남은 이들의 앞에서 인벤토리에 있는 무기들을 탈탈 털었다. 허공에서 무기가 쏟아지자 사람들은 기쁨 반 당혹 반으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스페란사는 성의 없는 변명을 덧붙였다.
“로드 에이번데일이 만든 마법 가방이에요.”
믿거나 말거나.
무기들 중에서는 시더의 손으로 업그레이드를 거친 거대한 장총과 낫도 있었다.
“이 많은 무기가 대체 어디서…… 미스 헌터, 무기 밀매업이라도 하십니까?”
“내가 가진 무기 중 하나라도 이상한 사람 손에 들어가면 정말 큰일 날걸요.”
하지만 밀매업 같은 헛소리가 아니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양의 무기였다. 알라스테어는 멍한 얼굴로 사냥용 엽총의 형태를 띠었지만 훨씬 장난감 같은 무기를 들어 보았다. 손잡이를 감싼 가죽의 재질이 기묘했다. 총신이 꺾인 부분에 박혀 있는 희고 딱딱한, 광택이 나는 물질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무기 같았다.
“로드 스털링, 사냥 잘하시는 편이면 그걸 쓰세요. 코델리아와 웰즐리 부인은 권총을 쓰시는 게 낫겠고, 혹시 모르니까 호신용 단검이라도 하나 더 들고 다니고요. 그리고, 제일 몸이 날래고 힘이 센 사람들을 좀 모아 줘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왜요?”
창밖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크고 작은 괴물들이 보였다. 그들은 삼림을 때려 부수며 민가를 향해 진격하는 중이었다. 빗장을 닫아건 저택과 달리 마을은 숲에서 더 가까웠고, 난생처음 보는 괴물들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서 그들은 무딘 연장을 들고 덜덜 떠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을 저택으로 대피시키게요.”
에스페란사는 빠르게 움직였다. 잠깐 방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진녹색 퍼프 블라우스만 그대로였고, 다리의 윤곽을 드러내는 바지 대신 광택이 있는 검은 치마를, 짧은 망토 대신 치마 길이만큼 오는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순전히 사람들의 눈 때문이었다. 여기가 13년 후, 온갖 복장의 헌터들이 돌아다니던 때도 아니고 시더 클라이번도 질겁했던 가죽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간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은 정말 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무기의 마력 구동을 확인하던 시더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에스페란사의 기기묘묘한 옷차림에 익숙해졌는지 오히려 정상적인 전투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전투복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건가요?”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빌린 옷이니까요.”
대답을 해 놓고도, 시더와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에스페란사가 입던 드레스가 시더가 내어 준, 전 백작 부인의 드레스이기는 했다. 그렇기는 한데. 시더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당신이 옷 좀 망가뜨린다고 뭐라 할 것 같아요?”
“어머니 옷이잖아요. 그래도 막상 망가지면 신경 쓰일 걸요.”
“전혀. 시도해 봐도 좋아요.”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시더의 눈치를 살폈다.
“나중에요.”
“과연.”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본격적인 전투에 나가면서 빌린 옷을 입고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을 구조해 오는 건 한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잘해 준다면. 던전 공략은…… 길면 여덟 시간 정도 봐요. 던전 규모도 확인해 봐야 하고, 특수 지형이 나타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보스를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상태 창. 에스페란사는 그 위에 쓰인 글씨를 읽어 내렸다.
[던전 발생!]유형: 숲
등급: C
위험도: C
헌터님, 행운을 빕니다!
C등급 던전. 평이하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여덟 시간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더 짧게도 끝낼 수 있겠지만.
“팀이 꾸려지면, 바로 아래 민가로 내려보내요.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몬스터가 집 안에서 나타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택을 지키는 사람들은 창문이랑 환풍구, 문 주변에 배치하고, 무엇보다, 굴뚝을 조심해요.”
굴뚝은 막을 수도 없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수들이 침입하기 좋은 루트였다. 벽난로의 불이 옮겨붙은 몬스터가 침입하면 저택의 방비가 뚫리는 건 순식간이다.
당부를 마친 에스페란사는 자기 몸통만 한 거대한 총을 어깨에 얹었다. 발밑에 흰빛이 맴돌았다. 전투 보조 스킬로 익힌 몇 안 되는 마법이었다.
“다녀올게요.”
에스페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잊고 있던 전투의 흥분이 발밑부터 차올랐다. 차에 시동을 걸듯 헌터의 몸은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