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51
51화
둘둘 말아 놓은 커다란 지도를 응접실 티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쳤다. 커다랗게 ‘마벨우드’라고 적혀 있고, 마벨우드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오이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먹으며 커다란 창문을 넘어 바깥으로 나왔다. 교육받은 신사 숙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알라스테어가 입을 헤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던전 규모를 확인할 거예요. 다른 때 같으면 뛰어다니면서 하겠는데, 근처 다른 마을도 휩쓸렸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서요. 코델리아, 영지 지리는 다 알고 있죠?”
“그럼요. 대충 설명만 해도 어디인지 알 수 있어요.”
“내가 총을 쏘고, 로드 에이번데일이 마력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확인해 주면 코델리아, 당신이 기록해요.”
숲 쪽은 나무가 너무 많아 이런 방식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민가가 듬성듬성 있는 시골 마을 쪽은 충분히 가능했다. 숲 너머에는 폐촌이 된 마을밖에 없으니 확인이 필요 없기도 했다.
시더가 뭔가 조작을 하자 망원경이 쭉 늘어나더니 각도가 이리저리 꺾였다. 총 위에 딱 달라붙은 것을 에스페란사가 어색하게 툭툭 건드렸다.
“이게 뭐예요?”
“이렇게 보는 게 편할 것 같아서요. 계속해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신기술 아닙니까?”
자기 일에 열중하던 알라스테어도 뼈마디가 뒤틀린 망원경의 형태를 보며 감탄했다.
“신기술? 아니, ……뭐, 그렇다고 쳐요.”
“왜 말을 바꿔요?”
“내가 발표 안 했으면 신기술이죠. 그보다, 시간이 없다면서요?”
에스페란사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억누르며 총을 쏘았다. 긴 마력의 광선이 끝을 모르고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듯 사라졌다. 황동으로 만든 망원경의 몸체가 길게 늘어났다. 창가에 가져 둔 의자에 앉아 꼼짝도 안 한 채 시더가 뭔지 모를 다이얼을 돌렸다. 쏟아지는 광선 위로 망원경이 목을 뺐다.
“어디예요?”
“파란 지붕에, 빈 닭장이 있는 집 근처요. 레이디 코델리아, 어딘지 알겠어요?”
“페들리 씨 집이에요. 할머니를 보필하고 계셔서 집은 비어 있을 거예요.”
코델리아는 거침없이 지도에 표시를 했다. 같은 방식으로 각도를 바꿔 몇 번 더 확인하자, 지도에 빨간 점선이 나타났다.
“다행히 아까 그 마을 빼고는 전부 던전 범위 밖이네요.”
다시 창을 넘어 들어온 에스페란사가 지도를 살폈다. 지도 기호가 옛날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숲의 크기와 비교해 봤을 때 던전의 크기는…….
“3천 아일이네요.”
에스페란사의 위에서 고개를 불쑥 들이민 시더가 말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를 돌아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시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도 한편을 가리켰다. 에스페란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자로 잰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축척이 있으니까요.”
“축척은 우리도 보이거든요.”
“그럼 뭐가 문제죠? 간단한 산수잖아요.”
“……아, 네에.”
힘 빠진 대답 말곤 돌려줄 게 없었다. 그 방에 있는 모두가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산수는 그렇다 치고, 거기서 슬쩍 눈대중으로 지도의 면적을 계산해 낸 것도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물어보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복장 터지는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3천 아일이면 크지도 작지도 않다. 민가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딱 C급 던전에 맞는 크기였으니 정말로 여덟 시간이나 걸릴 것 같지도 않다. 에스페란사는 예상 시간을 여섯 시간 정도로 줄였다.
다 식은 식사를 마저 먹은 에스페란사는 저택의 경비도 꼼꼼히 확인했다. 창문 앞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영지민 몇몇을 잡아냈다.
대부분은 과다할 정도로 긴장한 채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페란사는 오히려 그들의 긴장을 풀어 주어야 했다.
“뭐가 들어오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숫자가 많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숲과 하나로 묶인 게 다행이었다. 몬스터들은 저택에 똘똘 뭉친 사람들보다는 숲의 들짐승을 우선적으로 사냥했다. 이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가면 마을의 가축들도 뼈밖에 남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보스전을 치를 때가 되면 이쪽으로도 공격이 들어올 테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에스페란사는 정말로 저택 전체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동안 시더가 벽난로 앞에 세워 놓은 기계 장치 주변을 기웃거리는 어린애들을 붙잡아 방으로 돌려놓은 것만 세 번. 코델리아는 잔뜩 뿔이 나서는 그 아이들에게 노호를 질렀다. 그리고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웰즐리 부인에게 전부 보내 버렸다.
“그럼 이제 맘 편히 던전을 공략할 일만 남았네요.”
남은 마력량을 확인한 에스페란사가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냈다. 더 준비할 것도 없었다. C급 던전에 변수가 생겨 봤자지.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고 총을 어깨에 얹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시더가 언제 꺼내 놓았는지 모를 던전 탐지기를 꺼내 창문에 설치하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이건 왜 꺼내 놨어요?”
“표본 수집해야죠. 진짜 던전만큼 좋은 표본이 어디 있겠어요?”
왜 진작 저 생각을 못 했을까 싶다가도 이 상황에 탐지기 생각을 하다니,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네. 그럼 전 가요.”
아무튼, 할 일을 해야지. 에스페란사의 발밑에 흰빛이 맴돌았다.
마력 발현을 느낀 시더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에스페란사는 현관의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혼자였고, 누구의 동행도 요하지 않는다.
거대한 총을 든 가는 몸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정말 위태로운 건 에스페란사가 아니라는 것을 시더도 알고 있었다. 그는 에스페란사를 믿지만, 에스페란사가 자신하는 만큼은 믿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군화 끈이 풀릴 듯 말 듯 해서 에스페란사는 서슴없이 현관에 주저앉아 끈을 다시 묶었다.
시더는 탐지기를 완전히 등지고 서서 물었다.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는 데 지금부터 여덟 시간인가요?”
“그것보단 짧게, 한 여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이쪽으로도 몬스터가 분산될 테니 방비가 필요할 거예요. 숲에 사냥감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여기로 올 테니까요. 그 전에 끝나면 좋겠지만.”
그 정도로 빨리 끝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혼자 보통 헌터 대여섯 명의 몫을 했지만, 그래도 몸은 하나였으니, 한 번에 여러 곳을 공격할 수도 없었고 다칠 수도, 지칠 수도 있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여섯 시간이 아니라 열여섯 시간을 쓰더라도 누구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그렇게까지 어려운 던전 아니에요. 이 정도 던전을 꽤 많이 겪어 봤어요. 베이스캠프도 잘 마련돼 있는 편이고. 정말로. 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내가 당신을 걱정하면 안 되나요?”
부드럽게 흐르던 공기가 뚝 멎는다.
지나가듯 물은 말이다.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도 몸 어딘가에 꽂힌 듯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에스페란사는 말을 멈추고 눈을 천천히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가벼이 흘려보냈던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 뇌리에 박혔다. 장난으로 치부했던 말들, 때때로 드러내던 감정의 편린.
시선이 얽힌 순간,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입을 달싹이던 에스페란사가 벌떡 일어나 빠르게 속삭였다.
“다녀올게요.”
시위를 당긴 활처럼 바짝 긴장한 몸이 튕겨 나갔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던전 속으로. 시더는 그 뒷모습이 언덕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자기의 일로 돌아갔다.
* * *
던전 공략은 대체로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베이스캠프 설치. 둘째, 잡몹 공략. 셋째, 보스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론이다. 때로는 베이스캠프가 마련되기도 전에 잡몹이 몰려오거나 보스가 나타날 때도 있다. 혹은 특수 지형이 발발해서 헌터부터 일반인, 몬스터까지 전부 쓸려 나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보통 일반인을 포기하는 것이 답이다.
가끔 고지능 보스를 만나면 변형된 특수 지형이 나오기도 하는데, 의외로 그럴 땐 일반인들이 가진 전문 지식이 은근히 도움이 된다. 건축업자와 함께 궁전식 던전에 갇혔다가 비밀 통로로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흥미로웠지. 머리 쓰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다면 더 즐거웠겠지만.
C급 던전에는 어쨌거나 해당 사항 없다.
오직 몸으로 뚫고 나가면 그만. 특수 지형 없음. 난이도 평이.
수풀 아래로 몸을 낮춘 에스페란사는 숨을 죽이고 총구를 높이 세웠다. 소음기 아이템을 통해 빠져나온 마력탄이 소리 없이 거대한 괴물의 목젖을 뚫었다. 늑대를 한입에 삼키려던 괴물의 목이 떨어지자, 몸뚱어리도 곧 중심을 잃고 퍽 엎어졌다. 에스페란사는 빠르게 움직였다.
C급 던전답게 괴수는 대체로 크기가 커서 맞추기 쉬웠고, 공격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숫자도 적고, 공격 텀도 느리고. 에스페란사는 설렁설렁 움직이면서도 순식간에 수십의 몬스터를 도륙했다.
마력탄이 발사될 때의 가벼운 진동, 몸을 날리면 반대로 쏟아지는 공기의 저항, 단 한 발로 거대한 몬스터의 숨을 끊는 쾌감. 나무를 밟고 숲을 달리는 에스페란사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 감각을 잊지 못해서 7년이란 세월 동안 ‘황금 발톱’에 매달렸다. 더 강한 상대, 더 자극적인 살육. 온몸을 한껏 써서 달리고, 치고, 돌아서 쏘는 그 일련의 행위들. 현실에선 느낄 수 없는 감각들.
허용된 폭력.
시간이 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취했다. 탁한 자안을 치뜨며 총과 검을 오가며, 땅과 하늘을 오가며 날뛰었다.
세운 검날을 비껴 내리치자 꼬리가 긴 키마이라의 몸통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숲길을 미끄러지듯 달리며 에스페란사는 다음 괴물의 발톱을 피해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리고 발톱이 휙 지나간 그 순간 발로 관절을 때리며 허공에서 훌쩍 뒤로 재주를 넘었다.
공격이 빈 막간에 저택 쪽으로 날아가는 불새를 향해 마력탄을 쏘아 올린 에스페란사는, 그새 등 뒤를 덮치는 또 다른 키마이라의 등에 올라타 등에서부터 심장까지 한 번에 날려 버렸다.
그 손이 휘두르는 무기가 언제부터 검이었고 언제부터 총이었는지, 누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더라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휴…… 던전 보스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