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0
상태 이상 0
사망 78
아무리 체력이 넘쳐난다고 해도 사람이니만큼 지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투 자체가 오랜만이라 몸이 덜 풀린 상태였다. 몸이 벌써부터 뻐근했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체력을 슬쩍 확인해 본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게이지의 3분의 1 정도가 비어 있었다. 회복하지 않고 바로 C급 던전 보스를 잡아도 괜찮은 체력인데, 문제는 보스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숨었니?”
아니, 보스가 숨으면 어쩌자는 거야. 장난하나?
보스가 살아 있으면 하위 몬스터들은 보스의 버프를 받고, 하위 몬스터들이 살아 있으면 보스가 버프를 받는다. 어느 쪽이든 하나는 박멸하고 시작하는 것이 빠른데, 그렇다고 다 죽일 때까지 보스가 나타나지 않는 건 또 흔치 않은 일이다.
겁이 많은 놈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스씩이나 되는 놈이…….
[던전 보스, ‘히드라’가 나타났습니다!] [보스의 위치가 맵에 표시됩니다.] [하위 몬스터들이 보스의 영향을 받습니다. 공격력 +30%. 저항력 +10%.] [보스가 하위 몬스터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방어력 +30%, 스킬 발동률 +10%]황급히 맵을 켠 에스페란사가 이를 악물었다. 검은 부분에 둘러싸인 미색의 맵에 붉은 점이 깜박였다. 점 위에 선명하게 보스라고 적힌 글자를 노려보던 에스페란사는 긴 라이딩 후드를 여미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몸을 휙 돌리자 발밑의 흰 빛이 마력을 빠르게 소진시키며 정신없이 돌아갔다. 방독면은 찾을 시간이 없어 달리면서 인벤토리를 손으로 휘저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날 인식했으면 내 쪽으로 찾아올 것이지. 쓸데없이 머리만 좋아선!’
던전의 보스, 히드라가 나타난 곳은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 그중에서도 저택의 창문에서 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히드라가 저택까지 가는 게 더 빠를까, 에스페란사가 히드라를 찾아내는 게 더 빠를까?
지금으로서는 후자가 더 빠르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나무가 쌩쌩 뒤로 달린다. 뺨을 때리는 바람이 매서웠다. 몬스터의 영향을 받아, 던전 안의 자연은 한층 더 거칠어진다. 에스페란사는 창칼 같은 바람을 정면으로 뚫고 숲 가장자리까지 단숨에 향했다.
히드라의 머리 여덟 개가 숲 위로 삐죽 올라왔다. 에스페란사는 그쪽을 향해 거침없이 총을 쏘았다. 히드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총을 피했다. 하지만 분명히 에스페란사를 인식했다. 이걸로 저 머리들이 저택에 관심을 꺼 준다면 좋을 텐데.
히드라. 천하의 헤라클레스도 동료와 둘이서 움직여서야 겨우 해치울 수 있었다던 신화 속 그 히드라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베면 다시 자라난다는 점은 똑같았다. 다시 말하면, 동료가 있으면 한없이 유리해지는 타입의 몬스터였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아무리 혼자 여러 명의 몫을 한다고 해도 혼자 몸이었다.
시더라도 데리고 왔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왜, 내가 당신을 걱정하면 안 되나요?’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달리던 발이 멎었다. 입술이 하얗게 눌렸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을까? 뭐라고 했어야 다시 떠올리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은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히드라의 붉은 눈 세 쌍이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먹잇감. 눈앞에는 강력한 적. 히드라가 내뿜는 독이 땅에 퍼졌다. 순식간에 잔디가 시들었다. 총을 치켜든 에스페란사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긴 광선이 히드라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잘린 상처 위로 두 갈래의 머리가 자라났다. 순식간이었다. 에스페란사는 히드라의 독을 피해 몸을 굴리며 생각했다.
머리가 자라나는 것까지는 확실하고, 속도도 무시 못 할 수준이지만 C급 보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방심할 생각은 없다.
항상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쉬운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
입 안으로 되뇌며, 총의 화력을 올렸다. 에스페란사는 그 원칙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아홉 개의 입이 동시에 커다랗게 벌어지며 시커먼 독을 내뿜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정도였다. 에스페란사는 망설이지 않고 마력을 뿜어냈다.
총 안쪽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들렸다. 심장과 심장을 맞대고 있을 때처럼 모든 감각이 가라앉고 의식이 편안하게 또렷해졌다.
독기가 총구에 닿으려던 순간 실처럼 가느다랗게 뽑힌 마력의 실이 넓게 퍼졌다. 둥글게 독기를 감싸 안은 새파란 마력이 조금씩 독기를 밀어냈다.
검은 독기와 푸른 빛이 충돌하며 교차했다. 독이 빛을 잡아먹으려 치면 에스페란사는 가차 없이 마력을 더 투입했다. 빛이 독을 밀어내려 치면 히드라가 독을 더 뿜어냈다.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그사이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미동 없이 총에 마력을 쏟아붓던 에스페란사가 히드라의 붉은 눈 아홉 쌍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치익, 소리와 함께 가죽 후드가 독에 녹아내렸다. 에스페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기 가득한 히드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방사형으로 넓게 퍼졌던 마력이 한 점을 겨냥하며 후벼팠다.
펄떡이는 심장을 덮은 가죽 위에 날카로운 마력탄이 작렬했다. 두 뺨이 희열에 물든 순간, 히드라의 꼬리가 에스페란사의 허리를 후려쳤다.
“윽!”
높이 날아간 몸이 허공에서 빙글 돌아 착지했다. 장비의 방어력 덕에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독기가 철철 흐르는 꼬리에 닿은 부분이 욱신거렸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총구가 카랑카랑한 소리와 함께 마력을 뿜어냈다. 독니를 내민 아홉 개의 머리 중 하나가 터져 나갔다. 에스페란사는 벼락처럼 달려들어 손을 감싼 불꽃으로 잘린 단면을 지졌다. 독기가 연기처럼 스며들자 후드를 넓게 치켜들어 몸을 가렸다.
에스페란사는 펄럭이는 후드 자락에 닿은 독기가 연기를 뿜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린 머리의 단면 위에 서서 다음 머리를 겨누었다.
총구가 다시 빛을 쏟아 냈다. 독니를 피해 몸을 뒤로 던지며,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쏘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날아오는 꼬리를 발판 삼아 도약해서 지진다. 한계까지 근육을 찢고, 마력을 거침없이 소모한다. 폭파된 머리의 잔해와 힘을 잃는 적을 보니 뱃속에서부터 희열이 끓어올랐다.
히드라가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소음에도 에스페란사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기만 했다.
이게 전투지.
다시 여덟 개가 된 머리에 꼬리까지 가진 히드라와 팔다리를 모두 합쳐 고작 네 개뿐인 인간은 쉴 새 없이 엉키고 떨어졌다. 거대한 괴물에 비해 작고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인간의 몸은 자기 몸에 비해서도 커다란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히드라의 머리를 따고 상처를 지졌다.
살이 타는 매캐한 연기. 짙은 연기 사이에서, 고통에 겨워 마구 흔들리는 목 위에 군홧발로 선 여자. 히드라는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멀쩡히 남은 머리는 이제 겨우 네 개였다.
숨이 가쁘게 뛰고 심장이 덜컹거렸다. 맹렬하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 술에 취한 것처럼 들떴다.
슬슬 심장을 찔러도 될 것 같은데? 머리 네 개 정도는 어떻게든 피할 것 같다.
에스페란사는 독니에 날을 세우고 달려드는 히드라의 이를 발로 걷어차며 그 반동으로 몸을 멀리 날렸다. 히드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섰을 때, 그들 발밑의 잔디는 전부 독에 절어 시들어 있었다.
시든 풀밭 위에 독을 가진 괴물과 마력을 가진 인간. 붉게 타오르는 하늘과 새까만 독. 그 가운데서 푸르고 깨끗한, 무엇보다 날카로운 마력이 총구에 맺혔다.
히드라가 독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총구가 뻗은 방향을 피해 네 개의 기다란 목이 작은 인간을 잡아먹을 듯 그림자를 드리웠다.
독이 고인 입이 머리를 삼켜 버릴 듯 다가온 순간에도 에스페란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빗나간 총구를 제대로 맞추려는 노력도 없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후드 자락만 에스페란사에게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석양을 받은 히드라의 송곳니가 이미 식사를 마친 것처럼 번뜩인 바로 그 순간.
탕. 탕.
귀족들의 장난 같은 사냥터에서나 날 법한 총성이 울렸다. 고작 두 발.
네 개의 머리가 뻥 뚫린 심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당한 줄도 몰랐을 만큼 재빨랐다. 히드라의 머리 하나가 포식을 위해 경계를 잊은 순간, 그 희미한 빈틈을 뚫고 총구가 튀어 올라 정확히 심장을 겨냥했다. 모두 히드라가 이를 세우고, 그 송곳니로 에스페란사의 머리를 꿰뚫기 직전까지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전투가 끝났다.
[던전 보스, ‘히드라’를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그 밑으로는 보지 않았다. 시야 한편에서 숫자가 바쁘게 쭉쭉 올라갔다. 에스페란사는 세운 총에 기대 주홍빛 노을이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찌릿한 쾌감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몽롱하게 들떴다. 뇌리를 괴롭히던 복잡한 문제들도 모두 단순하게 느껴졌다.
더는 남은 생명체가 없는 전장 한가운데서 유일한 승리자는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래간만의 웃음, 오래간만의 자유였다.
* * *
1층의 응접실. 코델리아가 신발 뒤꿈치를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에스페란사가 떠난 지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소리의 주인은 견디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에스페란사는 하루 안에 해치우겠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로드 에이번데일은 어떻게 따라가지도 않을 수가 있죠?”
“괜찮을 겁니다.”
“말을 내어 줄 걸 그랬어요. 어떻게 혼자 그 거리를 뛰어가게 해요.”
“말을 드렸으면 괴수의 밥이 됐을 겁니다. 레이디 코델리아, 현명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로드 스털링, 좀 더 성의 있는 대답을 할 순 없는 건가요?”
알라스테어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또 무슨 실수를……?”
“됐어요. 내가 심술부린 것뿐이니까.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다쳐오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연고도 없는 숙녀 하나를 정체도 모를 괴수가 우글거리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어떻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