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53
53화
마을 사람들은 에스페란사가 혼자서 장정 백 명 몫은 하는 것 같다고 코델리아를 위로했다. 그 총에서 불도 아닌 것을 뿜어내는데 몬스터들이 하나같이 찍 소리도 못하고 죽더라고.
그래서? 그게 무슨 변명이 되지?
머나먼 옛날, 코델리아의 먼 조상은 이 땅을 봉토로 하사받고 마을 사람들의 먼 조상에게 세금을 걷었다. 그 대가로 코델리아의 조상은 마을 사람들을 지켜 주기로 약속했다.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지금, 비록 그때처럼 장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성벽을 쌓아 적으로부터 땅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코델리아는 여전히 그 오랜 약속의 흔적 위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 레이디 코델리아 마벨우드는 마땅히 위협으로부터 이 땅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곳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숙녀를 숲으로 밀어 넣을 것이 아니라.
“레이디 코델리아.”
“로드 스털링. 만약 같은 일이 던바틴에서 일어났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어요?”
“……고민은 했겠지만, 결국은 레이디 코델리아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에스페란사가 데려온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파견했던 청년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선택이 옳았다.
“하지만 우리의 의무를 해태했다는 죄책감은 당신이라도 피할 수 없었겠지요.”
알라스테어는 어쩔 줄 몰라 눈을 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목조목한 얼굴 가득 드리운 수심을 감추지도 않은 채 입술만 깨물고 있는 코델리아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불쾌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알면서 말을 꺼낸 이유가 있겠죠.”
“아버지는 소금 세 스푼에 영지를 구한 영주의 이야기나 빵 냄새로 악마를 물리친 이야기 같은 것들을 어렸을 적에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냥 어린 저와 시간을 보내려고 읽어 주신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당시에도 상당히 고지식한 꼬마였기 때문에, 융통성을 길러 주고 싶으셨다고 했습니다.”
알라스테어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턱을 괸 채 대강 흘려들었다. 알라스테어도 코델리아가 무관심한 것을 알면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때로는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고, 때로는 목숨 같은 신념을 포기해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경험이 가르쳐 줄 것이다…….”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코델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부분만 들어도 던바틴 공작이 얼마나 심보 고약한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저기에 미신 신봉자라는 점까지 합치면? 답도 없지.
“저는 아직도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코델리아는 내심 놀라서 그를 돌아볼 뻔했다. 가까스로 시선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어깨를 움찔거린 것은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영주의 자리를 맡고 계신 레이디 코델리아께는, 와닿는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에스페란사가 이 재앙을 끝내 준다면, 총칼 한 번 제대로 못 들어 본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모두를 위해서 낫겠지요.”
시혜적인 위로에 비꼬는 대답이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듀, 다들 홀로 모이라고 해. 로드 스털링, 명단을 가지고 와 줘요. 할머니와 로드 에이번데일에게도 모여달라고 부탁해.”
듀 허슬러가 허리를 숙이고 사라졌다. 젊고 단정한 집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코델리아와 그 뒤에 선 알라스테어 렌프루를 스치듯 보았다.
“……집사치곤 젊군요.”
“듀 말인가요? 듀의 아버지가 그 전 집사였어요. 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어서 그 뒤로는 듀가 맡고 있죠.”
“아. 그렇습니까.”
괜한 것을 물었다. 알라스테어가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에요. 날 아주 예뻐해 줬고요. 건넛마을에 사는데, 듀도 티는 안 내지만 아버지를 걱정했겠지요.”
“이 밑 마을이 아니면 던전에 포함되진 않았을 테니, 안전할 겁니다.”
“그것만은 다행이에요.”
이 저택의 다른 고용인들도 마찬가지다. 저마다의 불안감을 억누른 채 평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모였나요?”
1층 홀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본 코델리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들 잘해 주고 있어 고마워요.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도록 하고. 주방에서 식사를 받아가요. 변변치는 못해도 먹을 만할 거예요. 불침번 명단을 작성했으니 이대로 따라주길 바라요. 아이들은 모여서 자게 하고, 굴뚝과 벽난로를 살피는 걸 잊지 말고요.”
“네, 아가씨.”
식량을 얼마나 아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찐 감자 두 알씩과 급하게 구운 뻣뻣한 빵 한 조각씩, 그리고 코델리아가 관대하게 지급한 치즈와 구운 햄 한 덩이씩이 지급되었다. 그만하면 불만을 표할 식사는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오늘 안에 끝날 테고, 운이 나쁘더라도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힘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으니, 닥터, 부상자들을 잘 부탁해요. 엠마, 불침번을 설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 줘요. 대신 아침에는 쉬고.”
“아닙니다. 주인의 아침 식사 준비에 소홀할 수는 없지요.”
단호하게 대답한 요리사 엠마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다른 요리사와 주방 하인들이 엠마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알라스테어가 배정하는 대로 고용인들과 마을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눈을 비비는 아이들을 위해 웰즐리 부인은 자신의 넓은 방을 내어 주었다. 1층 홀이 거의 다 비었을 때쯤 시더가 내려왔다.
“내가 늦었군요?”
“엄청나게요.”
코델리아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시더는 변명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일단 호출하면 제때 나와 주시고요.”
“시간 봐서요.”
그게 제때야? 코델리아가 눈을 부라렸다. 정말이지 비협조적인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알라스테어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코델리아는 뒤를 흘끔거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렸다.
“우리는 응접실로 갈 거예요. 에스페란사가 돌아오지 못할 때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못 올 거라고 생각하나 보죠?”
“제가 본 건 에스페란사가 험프리가의 파티장에서 저와 강제로 결혼하려던 남자를 때려눕힌 것 정도예요. 아주 훌륭했지만, 그것만으로 에스페란사가 저 바깥에서 무사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어요. 로드 에이번데일의 신뢰의 근거를 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합리적인 신뢰이길 바라요.”
코델리아가 조용히 손을 감싸 쥐었다. 끝이 차가운 손가락 위에 떨리는 숨결을 올려놓은 채로 눈을 감았다. 시더는 비로소 팔짱을 풀고 말했다.
“합리적인 신뢰라고 말해 두죠. 레이디 코델리아, 친구로서는 형편없지만 영주로서는 훌륭하군요.”
“로드 에이번데일이 우정에 대해 뭘 안다고…….”
시더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더 말을 이어 가는 대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날 왜 불렀다고요?”
“만약 에스페란사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면, 우리는 장기전을 준비해야 해요.”
어차피 이 안에서 나갈 수는 없다. 처음에는 왜 에스페란사가 사람들을 모두 저택 안으로 데리고 왔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마력이 무형의 벽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갇혔다는 걸.
최악의 사태가 왔을 때 그들은 이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미지의, 인외의 무언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고견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렇게 1층 응접실에는 웰즐리 부인을 위시하여 코델리아, 알라스테어, 시더까지 이 집의 주인과 손님이 전부 모였다. 사태가 벌어진 후 이렇게 제대로 둘러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코델리아는 의장으로서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총소리. 비명. 머리 위에서 울리는 발소리들과 그들을 뒤쫓아 한 박자 늦게 쿵, 쿵, 울려 퍼지는 무거운 소리.
“뭐지?”
“나가 봐야겠어요.”
코델리아가 날카롭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더가 제일 앞, 거동이 불편한 알라스테어를 마지막으로 한 일행이 1층 홀로 나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저택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누가 설명 좀 해 줘, 대체 무슨 일이야?”
“괴물이 들어왔습니다!”
고용인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디에서?”
“굴뚝, 굴뚝입니다. 정말로 굴뚝에서 벽난로를 타고……!”
“설치해 둔 총은?”
“제대로 작동했습니다만, 들어온 놈의 손이 워낙 길어서, 그대로 쳐 낸 모양입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실책이었지만, 그 자리에 총 대신 사람이 있었던들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괴물의 이빨 사이에서 우그러졌겠지. 시더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지금 놈은 어디에 있어?”
“3층 복도 끝쪽인 것 같습니다. 그쪽 계단으로 이동할 것 같습니다. 3층 사람들은 다행히 피신했지만…….”
“내가 가죠.”
“로드 에이번데일,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요, 영주님 생각은 어떠신지.”
말로는 코델리아의 생각을 묻고 있지만, 시더는 이미 권총을 꺼내 장전하고 있었다. 코델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럼 여기서 사람을 좀 데려가세요.”
“방해돼요.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로드 에이번데일, 당신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난 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아니면 필요 없어요.”
그는 코델리아의 말을 기다려 주지 않고 앞서 나갔다.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얼떨결에 길을 비켜 주었다. 코델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더는 스스로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의 자만심에 걸고, 결코 자기 목숨을 남의 목숨보다 하찮게 취급할 리는 없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저 총은 에스페란사가 쏟아 낸 그 어떤 무기보다 괜찮은 무기겠지. 코델리아는 겨우 숨을 다잡았다.
“코델리아 아가씨, 2층에도 괴물이……!”
“벌써 2층까지 내려왔단 말이야?”
“다른 놈입니다!”
그리고 여기엔 전력 비슷한 것도 못 되는 사람들만 가득. 코델리아는 한 번도 쏘아 본 적 없는 총을 꼭 말아 쥐었다.
“다들 진정해요!”
그 외침과 거의 동시에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 피부를 가진 비쩍 마른 괴물은 몸에 비해 과도하게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 팔은 마치 인간의 손목에 팔을 하나 더 갖다 붙인 것마냥 세 군데서 꺾이며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피해!”
“으아악, 이쪽으로 온다!”
비쩍 마른 팔에 꽂힌 단검은 에스페란사가 내놓은 마법 무기 중 하나였다. 고통에 눈이 시뻘게진 괴물이 팔을 마구 휘두를 때마다 갈고리 같은 손끝에 닿은 살이 찢겨 나간다.
“엄마!”
피가 솟아나는 어머니의 팔을 손으로 가리며 우는 아이를 달래 줄 사람도 없었다. 코델리아가 이를 악물고 총을 쐈다. 반도 맞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