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58
58화
얼마 만에 돌아온 나인 호더인가. 머리 위로 공기 정화 프로펠러를 단 비행선이 날아다니는 시각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낯익은 하녀가 가져다준 홍차와 쿠키를 깨작거리며 생각했다.
잭에게 한번 가 볼 때가 됐는데.
잭에게는 말도 없이 마벨우드에 다녀왔으니, 벌써 2주 넘게 만나지 못했다. 고작 2주로 에스페란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겠다 걱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빈민가의 어둑한 골목을, 마치 하수구를 돌아다니는 쥐처럼 쏘다니는 꼬마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 정보상이 뒤를 봐주고 있겠지?
‘무능해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제대로 된 정보 하나 못 물어오던 것을 떠올린 에스페란사가 이마를 찡그렸다. 빵집에 넣어 둔 돈도 슬슬 떨어질 때가 됐고.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 빈손으로 가기도 그렇다.
“시간 있어요?”
노크도 없이 연구실 문을 열고 묻자, 책과 연구 기록에 파묻혀 있던 시더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단정하게 묶어 놓았을 머리칼이 반쯤 풀어 헤쳐진 상태였다. 관성적으로 종이를 훑어 내리던 눈이 에스페란사의 목소리를 듣자 빛을 띠었다.
“있어요.”
없어 보이는데.
“바쁜 것 아니에요?”
“바빠 봤자 취미 생활이죠.”
“진전은 있어요?”
턱을 괴며 스치듯 미소를 지은 시더가 대답했다.
“없을 리가요. 탐지기 개량이 완료되면 95% 확률로 근처의 던전을 추적할 수 있어요. 아직은 정보가 부족한데, 충분히 데이터가 쌓이면 발생한 던전의 크기나 타입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겠죠. 마력 패턴을 보건대, 나타나는 몬스터 종류에 따라서 파장이 달라지는 것 같으니까요. 이건 다시 정리를 해 봐야겠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또 한 건 해냈다는 건 알겠다. 에스페란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스템만은 못해도, 던전 탐지기가 있으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에스페란사. 들어오지 않고 뭐 해요?”
여전히 문틈에 상체를 끼워 넣은 채 고개만 들이밀고 있던 에스페란사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여유가 있긴 한 것 같지.
“앉아요. 차를 좀 가져오라고……. 아니, 그냥 같이 나가죠.”
“별 얘기 아니니까 여기서 해도 괜찮은데.”
“나도 휴식이 필요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에스페란사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분이 왜 어제는 밤을 샜을까?
“잠이나 자요.”
“그렇게 보기 괴로운 꼴은 아닐 텐데.”
뺨을 쓸어내린 시더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테나의 눈처럼 선명한 회색 눈동자 위에 음영이 졌다. 피곤이 묻어나기는 했지만 까딱하면 우습게 보이기 쉬운 온순한 인상에 오만한 본연의 성정이 조금 더 드러났을 뿐이다.
“아, 네에.”
뚱한 대답을 가벼운 웃음으로 맞받아친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시더가 움직이자, 헐겁게 걸려 있던 흰 머리끈이 에스페란사의 발치에 뚝 떨어져 발끝을 간지럽혔다. 그와 동시에 완전히 풀린 금발이 쏟아졌다. 묶었을 때 날개뼈보다 조금 아래에서 맴돌던 머리칼이 그보다 조금 더 밑으로 내려왔다.
금빛 머리칼이 뺨의 윤곽을 감쌌다. 반쯤 내리뜬 눈과 미소 없이 일자를 그린 입술이 무심해 보였다. 작은 차이일 뿐인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서슴지 않고 허리를 굽혀 공단 끈을 주운 시더는 손끝이 스친 순간 실내화 속의 발끝이 오므라드는 것을 보고 남몰래 미소 지었다.
“왜 그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응접실로 향한 뒤, 찻잔에 가득 찼던 차가 비워질 때까지 내내.
“용건 없는 티타임도 나쁘진 않지만, 대화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숙녀분?”
긴 손가락이 티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에스페란사가 퍼뜩 깨어나듯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아, 맞다?’”
“미안해요. 딴생각을 좀 했어요.”
그건 누가 봐도 알아요. 시더는 찻물 사이로 그 말을 삼켰다. 하지만 따가운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외모에 홀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시더는 에스페란사에겐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지.’
절대로 말 안 해야지. 백 년 치 놀림감이다.
“그래서 용건은?”
“용건은, 그게 뭐였냐면.”
뭐였더라? 까먹어 버렸다. 한참 ‘그게, 그러니까’ 하던 에스페란사가 마침내 찻잔을 내려놓았다.
“잭을 만나러 갈 건데, 열 살 정도 된 애한테 줄 만한 선물이 뭐가 좋을까 물어보려고 그랬어요.”
시더가 미간을 찡그렸다. 열 살? 애?
“질문할 상대가 잘못됐단 생각은 안 들어요?”
“역시 모르나요?”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는 질문이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글을 익힌 이후로 ‘역시 모른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생각을 좀 해 보죠. 정보를 줘요. 어떤 어린애길래 선물까지 챙겨 주려는지.”
“저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얼터 지구에서 만났다고 했던 꼬마애요. 건달패거리 시중도 들고 바람잡이도 하고, 소매치기도 하던.”
잭을 처음 만난 것도 벌써 꽤 오래전이다.
“그런 꼬마한테 선물을 챙겨 주려고요?”
“그래도 도움을 꽤 받았으니까요. 정보상도 소개해 줬고, 길도 찾아 줬고.”
정보상은 무능했고, 심지어 잭이 이용당한 셈이었으니 실제로는 길잡이밖에 안 됐다.
“그리고 원래 그 나이 대 애들은 아무 이유 없이 선물 받아도 돼요.”
“얼터 지구 출신의 꼬마 남자아이. 열 살. 선물을 줘도 보관할 집은 있어요?”
“있지 않을까요?”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사실 에스페란사는 잭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삶을 책임질 자신은 없었다. 사람 손을 탄 길고양이는 무리에서 배척당한다.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정을 줘서는 안 된다.
기만적인 선물 공세네. 쓴웃음을 찻잔으로 가리는 에스페란사를 물끄러미 보던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문가를 만나러 가죠.”
“전문가가 누군데요?”
“누구겠어요?”
프록코트를 걸친 시더가 모자 아래로 빙그레 미소 지었다.
* * *
순식간에 외출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이튼 홀이었다.
장난감 가게의 문 앞에 서서, 에스페란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전문가겠네요.”
코델리아와 가 봤던 그로더리 샵의 장난감 코너는 전부 마도구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곳은 장난감이라는 말에 충실했다.
목각 마리오네트, 호두까기 인형, 미니어처 기관차와 증기 마차. 한 뼘 정도 날 수 있는 비행선도 있었다. 블록과 레일을 깔 수 있는 기차놀이 세트. 봉제 인형부터 소름 끼치도록 정교한 밀랍 인형, 태엽을 돌리면 곧잘 움직이는 동물 오토마톤까지.
그리고 가장 시끄럽고 정신없는 것은 이 환상적인 세계에 푹 빠진 어린아이들이었다. 나름대로 예절이라는 것을 배웠을 귀족 아가씨 도련님들이 탄성을 터뜨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난리도 아니었다.
넓은 공간인데도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내부는 꽤나 더웠다. 아직 냉방 기구를 돌릴 철은 아니어서 오히려 더 텁텁했다. 에스페란사는 손부채질을 하며 미지근한 공기를 식혔다.
“안녕하세요, 부인.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정신없는 와중에, 나이가 어려 보이는 점원이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부인?
“그게, 친척 아이 선물을 찾고 있는데…….”
에스페란사가 오해를 정정하려던 찰나, 지팡이가 땅을 짚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모자 아래에서 음영 진 얼굴이 아름다운 젊은 백작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끌어당겨 미소 지으며 팔을 내밀었다.
“기다리지 그랬어요.”
핀잔 같지 않은 핀잔을 던진 시더가 뛰어다니던 아이 하나가 에스페란사에게 부딪히려는 것을 지팡이로 막아섰다. 그가 턱짓으로 점원을 가리키자 점원이 빳빳이 등을 세우고 섰다.
“열 살 남짓한 아이 선물로 뭐가 좋겠나? 부모가 엄한 편이니 적당히 실용적인 것으로.”
“아, 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더는 물론이거니와 에스페란사도 뒷골목 아이에게 어떤 선물을 주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그 나이의 평범한 아이라면 어떤 선물을 좋아하는지, 전문가의 도움을 얻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문가답게, 점원은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설명했다.
“요즘 잘 나가는 퍼즐입니다. 세계지도, 명화, 다양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블록도 인기가 좋습니다. 교양 있는 어린 신사분들이 좋아하시지요. 조립식으로 간단한 오토마톤을 만드는 키트도 있습니다.”
점원이 안 보는 사이, 시더가 비웃었다.
“오토마톤은 무슨.”
“당신이 만든 그 강아지도 비슷한 거잖아요.”
“그걸 저런 거랑 비교하면 안 되죠. 창피하게.”
그 정도인가? 그것도 비 오는 숲에서 있는 부품을 대강 이어붙여서 겨우 강아지 모양이나 낸 것이었는데. 그 녀석은 지금 에스페란사의 침실에서 진짜 반려견처럼 호사스러운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마도구 말고 다른 건 없나?”
비싼 마도구를 잭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둑맞을 것이다. 도둑맞는 게 최선이고, 흠씬 두들겨 맞고 빼앗길지도 모른다.
“태엽 인형도 있고, 그림책도 있습니다.”
책을 추천하는 점원의 목소리엔 설마 이 멀쩡한 상류층 신사 숙녀의 친척 아이가 글을 모를 거란 의심은 한 치도 없었다. 그만한 나이의 귀족 아이라면 문맹일 리 없을 테니까. 기억 속 잭도 글을 읽을 줄은 알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