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59
59화
에스페란사는 햇빛 아래 번쩍이는 낫을 든 남자가 그려진 그림책을 들어 올렸다. 햇빛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날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애들 읽는 책에 이렇게 험한 그림을 그려 놔도 되나?
“이거 읽은 적 있어요?”
“유명한 신화니까요. 하지만 그림책으로 읽은 적은 없어요.”
시더는 같은 책을 두 권 들어 점원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두 권씩이나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나는 당신 거예요.”
그것도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어쨌든 사 준다니 고맙게 받기로 했다. 저걸 읽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오르골, 스노우 볼 같은 장식품들을 지나쳐, 거대한 인형의 집까지 돌아본 에스페란사는 그림밖에 없는 책 한 권과 종이와 펜 없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모래판을 하나 샀다. 그리고 사탕 캔도 하나 집어 들었다. 선물을 다 고른 뒤 돌아가려던 찰나, 커다란 양 인형이 눈에 밟혔다.
“봉제 인형은 어떤 게 인기가 많지?”
확실히 좀 이상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봉제 인형 같은 건 웬만해서는 유행을 타지 않으니까. 인기를 타는 캐릭터가 있다면 모를까, 콘텐츠 사업이랄 게 거의 없는 이 시대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손님들이 제일 좋아하시는 건 이 토끼랍니다. 옷을 갈아입힐 수도 있어요. 명탐정 토끼 세트는 특히 어린 숙녀분들 사이에서 하나씩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린 신사분들은 이쪽, 마도 공학자 토끼 세트를 더 좋아하시고요.”
에스페란사는 아무런 옷도 입고 있지 않은 복슬복슬한 회색 토끼 인형을 가리켰다.
“저건?”
“아, 그것도 인기가 많은 제품입니다. 보통은 조금 더 어린 손님들이 좋아하시지만요.”
상술임이 틀림없었다. 귀족 아이들이 좋아하기엔 좀 못생긴 인형이었다. 하지만 인형은 좀 못생겨도 귀여우니까. 에스페란사는 토끼를 품에 안았다.
“이거 어때요?”
질문을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시더는 완전히 한눈을 팔고 있었다. 허리를 반쯤 숙인 채 토끼 인형들 중에서도 한구석에 틀어박힌 옅은 갈색 토끼를 꺼내선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찰하느라 에스페란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뭐지? 마도구인가?
의문의 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에스페란사. 이거 당신 닮지 않았어요?”
“……그게요?”
“음. 역시 닮았는데.”
너무 순해 보이다 못해 좀 졸려 보이는 인형이었다. 눈매가 똑같은 에스페란사의 얼굴 옆에 두고 비교해 보니 둘 다 의욕이 없어 보이는 것이 보는 사람마저 매사가 귀찮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안고 있던 회색 토끼보다는 백만 배 정도 귀여웠다.
“근데 무슨 말 하고 있었죠?”
“이거 어떠냐고요. 선물로.”
에스페란사가 얼굴 높이로 회색 토끼 인형을 들어 올리자, 시더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솔직한 대답 원해요?”
“아뇨.”
“아주 귀엽네요.”
에스페란사는 불만스레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게 별로인가? 좀 못생기긴 했지만…….”
눈앞에서 제품의 욕을 들은 점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든 회색 토끼를 받아 들고 대신 자기 손에 있던 갈색 토끼를 품에 안겨 주었다. 고개를 여러 방향으로 기울여 가며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웃음기를 감추지도 못한 채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이건 선물로 주고.”
회색 토끼를 흔들며 그렇게 말한 후, 갈색 토끼는 귀를 붙잡고 에스페란사의 품 안에서 집어 들었다.
“이건 당신이 가지고.”
갑자기? 에스페란사는 엉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어때요?”
“어, 좋은 것 같아요?”
“그럼 끝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에스페란사는 어린 신사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마도 공학자 토끼 세트를 들어 올렸다.
“이것도.”
이번엔 시더가 미간을 찡그릴 차례였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회복했다.
“그럼 그러죠. 전부 에이번데일 이름으로 달아 두게.”
“아, 알겠습니다. 에이번데일, 에이번데일…… 에이번데일 백작님이셨군요!”
점원은 ‘그런데 에이번데일 백작님이 결혼을 하셨던가?’ 하고 중얼거리며 장부를 찾으러 달려갔다.
유명인사는 유명인사였다. 에스페란사는 뒤늦게, 이 소란스러운 장난감 가게 안에서도 사람들이 시더를 흘끔거리고 있던 것을 알아챘다.
별다른 적의 없는 호기심과, 그럼에도 부담스러운 관심. 그리고 핥는 듯 집요한 몇몇 시선들.
그러나 장난감 가게를 거의 한 바퀴 돈 지금까지 아무도 말을 걸러 오지는 않았다.
“저 사람들, 저렇게 쳐다보면서 왜 당신한테 말을 안 걸어요?”
장난감 가게를 나오며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소개받은 사람이 없어서요. 소개도 없이 말을 걸면 무례하잖아요?”
“그래도 무작정 돌진하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그도 그렇지만, 옆에 당신이 있으니까요.”
“내가 왜요?”
마부 테일러에게 장난감을 담은 가방을 넘겨준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숙녀분과의 데이트를 방해했다가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았겠죠?”
에스페란사는 잠깐 멈칫했다가, 뚱하니 대꾸했다.
“아, 네.”
한 백만 번쯤 들어본 성의 없는 대답에도, 시더는 오히려 즐겁단 듯이 되물었다.
“데이트가 아니라곤 안 하는군요?”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그걸 왜 부정을 안 했을까? 에스페란사는 흰 실크 장갑을 낀 손이 시더의 팔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야…….’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누가 보든 적어도 친밀한 신사 숙녀의 외출이었고, 점원은 심지어 부부로 봤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나 좋을 대로 해석할게요. 그럼, 가 보고 싶은 데 있어요?”
“글쎄요.”
13년 후의 마이튼 홀은 어땠더라. 지금보다 더 화려하기야 했겠으나, 별 기억은 없었다. 황금 발톱을 순수하게 던전 공략 게임으로만 즐겼기 때문인지, 무려 7년을 플레이하고도 가진 정보가 상당히 편협했다. 결국 떠올린 것도 코델리아와 함께 왔었을 때 본 것들이었다.
“그로더리 샵은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요?”
“장난감 가게보다 더 소란스러웠던 것 같네요. 물건은, 음…… 신기한 게 많았어요. 사고 싶은 건 없었지만.”
“시중 것이 다 그렇죠. 당신은 필요한 게 생기면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요?”
시더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모자를 고쳐 썼다. 에스페란사는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진심이에요?”
“할 수 있는 건 다 만들어 줄게요.”
확실히, 그 날을 기점으로 시더의 태도는 알게 모르게 다정해졌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그런 다정함을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자칫 이 세계에 그대로 녹아 버릴 듯한, 그런 다정함.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짐짓 더 투덜거리며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해요?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글쎄요. 내가 당신 생각보다 당신을 잘 안다는 생각?”
“……그래요?”
어딘가 못 미더운 듯한 말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모자챙 아래로 몸을 낮추었다. 같은 그림자 아래 들어온 그린 듯 우아한 얼굴은 더 이상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그럼요. 난 잘 알죠, 당신 속마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았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삼켰다. 시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맞춰 볼게요.”
가죽 공방, 고급 시계 상점, 오토마톤 전문점, 서점, 증기 마차 전시장.
13년 후에도 이름 있는 상점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첫눈에도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보이지도 않는 듯이 거침없이 지나치던 시더가 멈춰 선 곳은, 복도 끝의 작은 가게였다.
“여기예요?”
뭐 하는 곳이지? 사람이 꽤 많았다. 귀부인의 손을 잡은 어린아이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또 애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나이 대의 신사 숙녀들이 가게 바깥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구나. 당신이 이런 곳도 알아요?”
“와 본 건 처음이에요.”
그럴 것 같았다.
“유명한 가게인가 봐요.”
저번에 갔던 카페보다 사람이 많았다.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몫으로 주문해 준 것은 얼음이 사각사각 씹히는 셔벗이었다. 열대과실 특유의 향이 입 안에 퍼졌다.
“와. 와아아…….”
인공적인 향은 하나도 없는 진짜 열대 과일 맛이다. 새콤하면서 뒷맛까지 찐득하게 달면서도 동시에 입 안이 차가워졌다. 아무나 입점할 수 없는 마이튼 홀답게 아이스크림 가게조차 비범했다.
“마음에 드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먹는 모습을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은 반쯤 먹다가 녹아내리고 있는데도.
“안 먹어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온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내가 그럴 사람인가요?”
아니지. 에스페란사는 한 스푼도 남기지 않고 셔벗을 싹 비웠다. 이런 걸 먹고 싶어했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냉동고를 꺼내 둘 걸 그랬네요.”
“냉동고가 있어요? 한 번도 쓰는 걸 못 봤는데.”
“날이 추웠잖아요.”
저택 전체에 마력으로 된 난방 기구를 돌리는 저택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에이번데일 저택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 돌아가지만 인력이 닿지 않는 부분에는 최첨단 기술을 아낌없이 이용했다.
“그리고 냉동고가 있어도 나 혼자인데, 얼음을 얼려서 어디다 쓰겠어요? 사용인들에게 나눠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시더는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을 즐기지 않는다. 싫어하지도 않지만 창고에 있는 냉동고를 꺼내서라도 먹을 성정이 아니었다. 애초에 특별히 즐기는 음식이 있기나 하던가.
“하지만 이제 당신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