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
6화
“전혀 눈치를 못 채셨어요?”
에스페란사가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숙녀의 정체를 깨달은 백작은 상석을 찾아 앉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그 어마어마하던 차림으로, 아, 앉아요,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게 그렇게 어마어마했나. 비슷하지 않아요? 여기 사람들 입는 옷이랑?”
“전혀요. 그보다 잘 어울리네요. 어머니가 당신께는 맞지도 않는 옷을 사들이는 걸 내버려 둔 보람이 있어요.”
작고한 전 백작 부인은 키가 작고 풍만한 편이었다. 키 크고 날씬한 체형을 바랐지만, 도무지 자신이 그렇게 될 가망이 없어 보이자 넘치는 부를 펑펑 써서 마네킹이나 키 큰 하녀에게 옷을 입혀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했다.
백작은 어머니의 취미 생활이 상당히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원래 취미라는 것이 그런 것이므로 내버려 두었다. 모두가 그 자신처럼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취미 생활을 가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백작 부인이 입으시던 옷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렇구나…….”
할 말이 없어 차만 홀짝였다. 조금 더 황송해진 기분이다. 입을 좀 축이고 나서는 잘 어울린단 소리를 들은 김에 얼른 해치워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백작은 꽤 관대한 상태인 것 같았다. 안 관대한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제가, 아침에…… 재단사를 불렀는데. 럭스 부인이.”
아니지,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럭스 부인은 손님을 위해서 배려해 준 것이다. 그러니 호의를 입은 자신은, 럭스 부인을 핑계로 대서는 안 된다.
“제가 드레스를 몇 벌 맞추면서, 백작님의 돈을 쓴 것 같은데, 금방 갚을게요.”
“왜요?”
“그야…….”
왜냐니.
“럭스 부인이 충분한 설명을 안 했나요?”
“아뇨, 충분히 설명해 주셨어요.”
“머리가 나쁜 편인가요?”
“아마 아닐걸요.”
그럼 뭐가 문제냐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린 백작이 방만하게 몸을 의자에 묻었다. 1인용 의자에 앉은 그는 의자에 비해 상당히 크고 길어 보였다. 대강 묶은 금발이 꽉 조인 베스트 위로 성의 없이 늘어졌다. 그런데도 사진작가가 공들여 각도를 잡은 것 같이 보이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당신은 내게 그 무기를 줬고, 난 당신에게 의식주를 책임지겠다고 했죠. 손님에 준하여, 즉 숙녀에 준하여.”
“전 애초에 숙녀가 아니라니까요.”
“당신이 아니라 내 문제예요.”
에스페란사는 이 게임을 꽤 오래 했다. 그러면서 귀족들과도 꽤 많이 부딪혔다. 그러니 귀족 사회에는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로드 에이번데일의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몬스터 사태 이후의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많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응 못 할 일인가?
“내 손님이라면, 신사 계급보다 밑일 수는 없는 거니까.”
점점 귀찮아지는지, 설명도 짧아졌다. 그래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니까 요는, 품위와 체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 무기는 제법 쓸 만하고요.”
“다른 무기도 좀 드릴까요?”
아무래도 양심이 찔린 에스페란사가 슬그머니 물었다. 옷도 사 줬고, 차도 이렇게 맛있고, 방도 좋고. 무기 값에 비해 진짜 진짜 황송한데.
“있으면 좋죠. 하지만 당분간은 낫을 가지고 노는 걸로도 충분할 것 같네요.”
단순히 연구하는 게 아니라 변형을 할 생각인가? 예를 들면, 장비 강화라든가. 설리번 박사에게 몬스터 부산물을 가지고 가면 그런 걸 해 줬었다. 대장장이들도 그랬고. 하지만 여긴 몬스터 부산물이 없는데.
“나중에 보여 줄게요.”
“아, 감사합니다.”
차를 마시고 쿠키를 씹는 소리만 났다. 백작은 쉬는 시간에도 연구 생각을 하는지 가끔 손을 움직이다가, 아예 종이를 붙잡고 뭔가를 바쁘게 써 내리기 시작했다. 흘끔 봤는데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글자는 아는 글잔데 뭔 말인지 모르겠네.’
잭의 악필을 볼 때나 떠올렸던 생각이다. 백작은 악필은 아니었지만,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악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티 푸드가 동이 날 때까지 그런 침묵이 이어졌다. 할 일도 할 말도 없으니 먹기만 했다.
‘다 먹어 버렸어.’
딱 두 개 남은 쿠키에서 손을 뗀 에스페란사는 눈을 굴리며 백작의 눈치를 보았다. 거금을 턱턱 쓰게 한 남자가 고작 쿠키 먹은 것으로 눈치를 주지야 않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마도 공학자였지.
“저기, 혹시.”
“말해요.”
여전히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남자가 대답했다. 듣고는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설리번 박사라는 사람을 아세요? 제가 그분한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가려고 하는데. 13년 후랑 같은 곳에서 사는지 모르겠어서요.”
“하워드에게 물어봐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에스페란사는 머리를 움츠렸다. 그렇긴 하지. 백작에게 물어볼 만한 건 아니었지.
“아, 네. 그냥 같은 마도 공학자라서 알까 했어요.”
“……뭘 물어보게요?”
멋쩍은 기분이 들어 얼마 남지 않은 찻물에 시선을 고정한 에스페란사는 대강 웅얼거렸다. 어느덧 백작이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였다.
“돌아갈 방법과 관련해서 알아낸 게 있어서요.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데, 마법과 관련된 거니까 마도 공학자라면 아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설리번?”
“네. 나이는 60살 정도 됐고. 이름이 뭐더라. 알버트?”
그건 아인슈타인이지. 아니야, 누가 봐도 아인슈타인에게서 따온 캐릭터 디자인이었으니 이름도 똑같았을 수도 있다. 늘 설리번 박사라고만 불렀으니 이름이 딱 기억나지 않았다.
“아닌가. 알베르트?”
음. 으으으음.
“이름은 됐고.”
“아, 네.”
“그런 작자 들어 본 적 없어요.”
“그러시구나.”
13년 전이니까, 설리번 박사는 별로 유명하지 않을 때인가? 13년 후에는 나인 호더 최고의 마도 공학자였는데 말이다. 아니면 진짜 아직 대학원생인가? 그러기엔 나이가 좀 많잖아?
“아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겠죠.”
말끝이 매섭게 느껴졌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깜박거렸다. 붉은 찻잔에 부유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비쳤다.
“에스페란사, 마도 공학에 대해 묻는다면서 그런 별 볼 일 없는 작자를 찾아가겠다고요?”
화가 난 것도 같고, 비웃는 것도 같았다.
“눈앞에, 나를 두고?”
“그게, 그러니까요.”
에스페란사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단 한 번도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황금 발톱에 대해 물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놈이니 분명 제대로 된 연구 결과 하나 없겠죠. 그런데 이 에이번데일 저택에 사는 당신이, 마도 공학에 대해 자문을 얻는다면서, 그런 작자를 찾아가려 했다고?”
“그…… 13년 후에는 진짜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저도 신세를 좀 졌었고요. 말이 잘 통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인 호더에서 제일 훌륭한 마도 공학자였다고요!”
그 말에 백작이 픽 웃었다.
“지금 나인 호더에서 제일 훌륭한 마도 공학자는 누구라고 생각해요?”
에스페란사는 눈을 크게 뜨고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사뭇 가볍게 말했다.
“시더 루스 클라이번 박사, 에이번데일 백작, 글라일리 자작, 오스던 왕립 마도 공학 대학 석좌 교수, 녹슨 검의 훈장 수훈자.”
문제는, 정말 큰 문제는 말이다. 에스페란사가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게 당신이라고요?”
세계관에 무관심한 에스페란사도 알 수밖에 없었다. 마도 공학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저 이름이 딸려 나왔으니까.
마도 공학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문이다. 그리고 시더 클라이번은 마도 공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술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다. 오토마톤, 통신 기술, 공간 확장 기술 등등, 셀 수도 없었다.
설리번 박사의 서재에서도, 왕립 도서관의 마도 공학 섹션에서도, 하물며 마법 무기를 다루는 대장장이들의 입에서도 나오던 이름이다.
게다가 에스페란사는 더더욱 알 수밖에 없었다. ‘녹슨 검의 훈장’은 10년에 한 명꼴로 주어지는 매우 가치 높은 훈장인데, 클라이번 박사 이후의 수훈자가 바로 헌터 에스페란사였기 때문에.
입꼬리를 치켜올린 오만한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커스텀이 필요 없을 미형의 얼굴이 이런 때조차 감탄스럽다. 그는 그 잘난 턱을 까닥이며 말했다.
“내가 죽는다는 말, 이제야 실감이 들어요. 살아있었다면 감히 내 앞에서 제일 훌륭한 마도 공학자로 다른 사람을 지목할 순 없었겠죠.”
지극히 오만하고, 그것이 철저하게 치수를 재어 맞춘 옷처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시더 루스 클라이번이라면, 그는 그럴 수 있었다. 클라이번과 에이번데일 백작이 동일 인물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노환으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그가 젊다 못해 어린 데다, 작위 있는 귀족에, 미남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나이 지긋한 노학자를 떠올렸다.
“정말 무례한 생각이군요.”
에스페란사는 흠칫했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더를 위아래로 훑었다.
“실례지만 로드 에이번데일, 몇 살이에요?”
“스물다섯이요.”
천재들이란.
“박사 학위는 언제 땄는데요?”
“5년 전에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최고의 마도 공학자가 아닌 적이 없었죠.”
그는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지금은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천재였군요.”
상상 속의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굽은 클라이번 박사도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의 그는 고작 스물다섯이라니.
그러나 시더는 눈썹을 치켜올릴 뿐, 시큰둥했다. 하긴, 이런 찬사는 그에게 숨 쉬듯 당연한 것일 테다. 대신 그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렇죠. 당신은 편견이 많고요.”
“제가 살던 곳에선 스무 살에 박사를 따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여기도 거의 없어요.”
“아, 그렇구나. 대단하시구나…….”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에스페란사도 머리가 꽤 복잡했다. 이를테면, 느닷없이 시간을 뛰어넘어 아이작 뉴턴의 집에 더부살이하게 된 셈이었으니까. 심지어 그 앞에서 다른 물리학자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겠다고 한 건가. 진짜 미쳤나 보다. 이제 와서 사과를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겠지. 그래도 황금 발톱에 대해 물어보려면 말을 걸어야 하는데.
눈치를 보는 사이, 백작은 자기만의 세상에 몰입해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긴 손가락은 의자 팔걸이 장식을 감싸 쥔 채 툭, 툭, 건드린다. 그대로 초상화로 변할 것 같이 조용했다. 설마 나가라고 하진 않겠지. 그 정도로 속이 좁진 않겠지.
목이 타기 시작할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찾는 아이템, ‘시간’에 관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