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0
60화
“냉동고를 꺼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나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던 거지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고…….”
손에 들린 빈 그릇이 설득력을 반감시켰다. 말끝을 흐린 에스페란사는 입을 삐죽였다.
“됐어요, 이제 일어나요.”
유리 천장을 씌운 마이튼 홀은 아까보다 조금 더 더웠다. 막 세 시를 넘긴 참이었다. 유리 천장이 충분히 달구어질 만했다. 적당한 때 아이스크림을 먹은 셈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에스페란사가 옷자락을 정리하고 일어나려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어머.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네요. 로드 에이번데일! 숙녀분을 에스코트하고 있어서 몰라봤어요. 미스 헌터? 맞죠?”
방금 지나온 의상실의 마네킹처럼 레이스가 빼곡한 상앗빛 드레스를 입은 숙녀가 거침없이 다가왔다. 에스페란사도 그 숙녀가 낯익었다. 그리고 이런 복장을 한 숙녀를 소개받았을 만한 곳은 하나뿐이었다. 험프리 파티.
“미스 탤벗.”
시더는 한 걸음 물러나며, 에스페란사에게 들으란 듯이 숙녀의 이름을 불렀다. 메리 엘리자베스 탤벗. 에스페란사는 그 전형적이고 고풍스러운 이름을 쉽사리 떠올려냈다.
“이런 거 싫어하시죠, 참? 오랜만이에요, 미스 헌터.”
“그러네요. 오랜만에 봬요, 미스 탤벗.”
“두 분, 나인 호더를 잠시 떠나 계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신 건가요? 그럼 다음 주 파티의 초대권을 구입하실 거죠?”
에스페란사의 의문을 미리 알아챈 듯 메리 탤벗이 웃으며 덧붙였다.
“어머니께서 주최하시는 자선 파티예요. 이런 말 민망하지만 어머니의 자선 파티는 늘 최고의 명사들이 참석하는 시즌 최고의 행사랍니다.”
파티. 나쁠 것은 없지만 굳이 참석해야 할까? 게다가 입장권을 사서까지? 좋은 말로 거절하려던 찰나, 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권 두 장을 빼놓으셨을 거라고 믿죠.”
“얼마든지요.”
메리 탤벗은 시더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미소를 띠며 짐짓 과장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그 어머니일 것이 분명한 귀부인의 뒤에 오토마톤 시종처럼 따라붙었다.
“시더?”
“좋은 뜻으로 하는 행사니까, 나쁠 것 없잖아요?”
메리 탤벗이 떠난 후,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달래듯 말했다. 자선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위선적인 자선에 굳이 한 발 집어넣고 싶지도 않았다.
“그 얘기는 돌아가서 하고, 잠깐 그로더리 샵에 들르죠.”
에스페란사가 코델리아와 다녀왔던 그 마도구 상점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들끼리 다녀갔기에 조용히 다녀갔던 것이다.
“당신이 가면 시선이 쏠릴 텐데요?”
백작은 장난감 가게에서도 유명인사였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유명인사였지만 마도구 상점에 금세기 최고의 마도 공학자가 등장하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에스페란사나 시더나 시선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시선을 즐기지는 않았다.
“귀찮기는 하지만, 아마 그로더리 샵의 카탈로그를 신청해 둔 적이 없을 거예요.”
“뭘 사려고요? 그냥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못 만들 것은 없지만.”
시더가 못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시중에서 만든 건 그 나름의 장점이 있죠.”
“예를 들면?”
“디자인?”
설득당했다. 마벨우드에서 시더가 대강 만들어 냈던 벽난로 지킴이는 아주 조잡한 꼴이었다. 상류층의 저택에 둘 만한 물건은 결코 아니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그로더리 샵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그래서 뭘 사러 여기까지 온 건데요?”
그로더리 부부는 거의 이마가 무릎에 닿도록 꾸벅거리며 시더를 안내했다. 시더는 별 감흥 없이 그들을 따라 걷다가 한곳에 멈춰 섰다. 오토마톤이 삐걱거리며 인사하는 장면을 곁눈질로 구경하던 에스페란사도 시더가 보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건…….
“냉동고를 사게요?”
“괜찮은 것 같죠?”
시범 작동 중인 기계 안에 물을 채운 판이 들어갔다. 오토마톤이 판을 기계 안에 넣은 채 문을 닫고 손잡이를 빙빙 돌렸다. 삐걱거리는 황금빛 몸체가 손잡이를 열 번 돌리자, 기계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맑은 종소리가 났다. 오토마톤이 기계를 열자, 판 안의 물은 그대로 얼음이 되어 있었다.
“집에 있다면서요.”
“오래된 거라서. 작동이야 하겠지만.”
“로드 에이번데일, 저희의 최신 상품입니다. 제오프린 사의 냉동고인데, 보시다시피 생김새가 아주 유려하답니다.”
에이번데일 백작 앞에서 냉동고 성능을 자랑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로더리 부인은 내내 생김새와 편리성만 자랑했다. 그리고 시더는 그걸 또 열심히 듣고 있었다.
기어이 몇만 테롯짜리 주문서에 서명을 하는 걸 본 에스페란사가 혀를 찼다.
* * *
“진짜, 왜 이래요, 당신답지 않게?”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자기 돈이니 말아먹더라도 업보지’와 ‘그래도 친구인데 이 정도 충고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이에서 갈등하던 에스페란사가 결국 물었다.
“지극히 나답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냉동고가 도착하면 얼리고 싶은 건 다 얼려 봐도 좋아요.”
“당신을 좀 얼려 버리고 싶은데요.”
“난 안 들어가죠.”
코트를 하워드 집사의 손에 맡긴 시더는 시계를 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것 아니에요. 내게는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고, 당신이 뭔가를 그렇게 즐겁게 먹는 건 처음 봤어요. 요컨대, 내가 원하는 걸 위해 쓸 수 있는 금액이었단 말이에요.”
주인의 지팡이를 손에 든 집사가 혀를 찼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이해하십시오.”
에스페란사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응접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 돈도 아니고, 괜한 걱정인지도 모르지만요.”
“아뇨, 걱정은 좋으니까 계속해요.”
“아, 네에.”
에스페란사가 그를 잠시 흘겨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냉동고는 언제 온다고요?”
시더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도 허허 웃었다.
사람이 하나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크다. 5년 전, 전대 백작이 죽은 후 이 저택에 이 정도로 생기가 돈 적이 없었다. 젊은 에이번데일 백작이 글라일리 자작이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비스듬히, 소파 팔걸이에 두 팔을 얹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맞은편 자리 대신 1인용 의자에 앉은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앉은 방향으로 몸을 반쯤 돌린 채, 역시 좋은 교육을 받은 상류층 신사답지 않은 자세로 에스페란사를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내 자세 갖고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애초에 포기했단 얘기는 기억이 안 나나 보죠?”
“으으으음. 그래서 자선 파티는 왜 가기로 했다고요?”
“말 돌리긴.”
시더는 모자를 벗어서 약간 부스스한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가볍게 시시덕거리는 듯한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단어가 던져졌다.
“‘수상의 개.’”
에스페란사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저 말을 얼마 전에 들어 봤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였더라…….
“아. 로드 스털링.”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분명히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죠. 그럼 여기서 문제. 수상의 개는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요?”
쉬운 문제였다. 그때는 그 단어 자체를 흘려들어서 생각이 닿지 않았으나, 조금만 관심을 두면 알 수 있었다.
수상은 이 나라의 입법과 행정에 있어 최고 권력자였다. 그런 수상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집단. 조금 부적절한 명령이라도 지체 없이 실행할 집단.
“비밀정보국이네요.”
처음 이 존재를 알았을 때, 제임스 본드 패러디냐고 비웃었던 기억이 있지만. MI6든, CIA든, 그 정도 규모가 되는 국가가 국내외의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국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스던 같은 나라에서 수상 아래에 정보국 하나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럼 ‘수상의 개’들과 대적할 만한 세력은?”
그들에게 쫓기고 있으면서 그 추적을 따돌릴 만한 세력. 간 크게도 스털링 백작, 던바틴 공작의 후계자를 위험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자들.
“13년 전이니까 내가 아는 것과 다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아는 대로라면.”
왕실이다. 말로는 통치하지 않는 군주라고 해도 왕실의 영향력은 은밀히 곳곳에 뻗쳐 있었다.
“여왕의 손발, 그러니까, 갈리스턴 공작이네요.”
“13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라 꼴이 그대로라니 참 희망적인 대답이로군요.”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마벨우드로 가는 기차에서 따라붙었던 암살자, 그리고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만났던 수상한 자들. 그 모든 게 갈리스턴 공작의 소행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갈리스턴 공작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어요. 그리고 공작이 왜 우리를……?”
“그건 차차 알아볼 일이죠. 자선 파티와 갈리스턴 공작. 13년 후에도 연결고리가 있나요?”
“글쎄요. 별로 관심 없어서.”
마이튼 홀에 끝내주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공작씩이나 되는 양반이 자선 파티에 나오는지 마는지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에스페란사의 편중된 정보력에 감탄을 표한 시더가 지체 없이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
“갈리스턴 공작은 사교 행사에 잘 나오는 편이 아니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참석하는 게 자선 행사예요. 늘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거기서 슬쩍 떠보자?”
“가능하다면요.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고.”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꼭 참석한다는 모임이 마약 파티도 아니고 자선 행사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왜 다짜고짜 암살자를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