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어퍼 레인의 내로라하는 상류층 저택은 모두 그 유명한 탤벗 부인의 파티에 참석할 준비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 복작거리는 상류층 지구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 에이번데일 저택도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이례적인 일이다.
저택의 주인은 파티를 좋아하지 않았고, 참석할 때도 부산을 떠는 일이 없었다. 주인은 남들이 들이는 노력의 반도 들이지 않아도 완벽하게 성장한 신사로 보이는 축복을 타고났으므로.
그러나 숙녀의 성장은 보다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법이다. 주름이 촘촘히 잡힌 나비 날개 같은 드레스 자락이 걸음에 따라 너울거렸다. 애교머리를 빼고 전부 틀어 올린 머리칼에 드레스와 같은 색의 장식을 올린 애니가 씩 웃었다.
“됐어요!”
주름이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에스페란사를 세워 놓고 자기가 의자에 올라가 봐주겠다며 수선을 부린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예쁜 모양새였다.
“아, 오늘 또 무도회를 휩쓸고 오시면 어쩌지? 막 연서가 쏟아지면 어떡해요? 청혼하겠다고 쫓아오는 신사분들이 저택을 막 에워싸면 어쩌죠?”
“그럴 리가 있나…….”
에스페란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애니가 열심히 살린 치맛주름을 대강 한 손으로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 보람도 없이 조금 늦고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선 파티에 늦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에스페란사도 시더도 평판을 중시하지는 않지만, 챙길 수 있다면 챙겨서 나쁠 것도 없었다.
시간을 가리키는 침 말고도 뭔가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회중시계를 보고 있던 시더가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에스페란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흐음.”
“처음 보는 것처럼 그러지 말아 줄래요?”
재단사가 옷을 맞출 때 슬쩍 끼어들어 구경했으면서. 그러나 시더는 대답도 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핀잔을 준 에스페란사가 되려 민망해졌다.
“뭐가 이상해요? 옷을 너무 세게 잡았나?”
애니가 기껏 맞춰 준 주름이 상했을까 싶어 치마폭을 확인하는데, 시더가 턱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 아래를 향해 기울어지던 턱이 단단한 손가락 위에 툭 닿았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시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둔 지 오래였다.
“좀 허전하기는 하네요. 럭스 부인?”
주인의 외출을 배웅하느라 한편에 서 있던 럭스 부인이 지체 없이 다가왔다.
“말씀하세요.”
“어머니의 보석 상자를 가져오게.”
에스페란사가 눈을 크게 떴다. 전 백작 부인의 보석 상자라니, 그 안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들어 있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굳이……?”
“당신 말마따나 없는 것도 아니고, 집에 멀쩡히 있는데 ‘굳이?’”
그게 그렇게 되나. 에스페란사는 멀뚱하게 치맛자락을 쥐었다. 럭스 부인은 왠지 모르게 반색하며 쏜살같이 커다란 보석 상자를 가지고 왔다. 무릎이 아프다더니 거짓말이었나?
“시간이 늦었잖아요?”
“증기 마차로 가면 얼마 안 걸려요. 시작부터 자리 지켜 줄 필요도 없고.”
현관 앞에서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무려 3단으로 된 보석 상자를 열었다. 응접실의 조명에 비친 보석들이 색색으로 반짝였다. 유리 조각같이 현실성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봐요.”
“함부로 손대도 돼요?”
“괜찮아요. 이건 어때요?”
시더가 꺼낸 목걸이는 가운데에 새파란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보석이네.’
너무 크고 화려해서 오히려 실감이 덜 났다. 럭스 부인이 받아서 에스페란사의 목에 대주었다. 그리고 보석함에 달린 거울을 통해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튀어요, 백작님. 그보다 이건 어떨까요?”
“럭스 부인, 난 상관없지만 숙녀분은 싫어하실걸.”
에스페란사는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 럭스 부인이 입맛을 다시며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시더가 턱을 괴며 느릿느릿 말했다.
“어머니가 조모님께 물려받은 목걸이예요. 그리고 조모님은 증조모님께…….”
조모에서부터 입이 벌어진 에스페란사는 증조모 소리를 듣자마자 거의 목걸이의 무게에 당장이라도 압사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른 걸로 해요!”
시더는 삐딱하게 웃었다. 다른 일 때문이라면 저 흔치 않은 표정을 꽤 즐겁게 감상했겠지만, 또 저렇게까지 질색할 것은 뭔가? 그런 식으로는 엮이기도 싫다는 것처럼.
럭스 부인이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며 알이 조금 작은 것을 골라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그것마저 혹시 ‘백작 가문의 보석’은 아닐지 눈치를 살피다가, 이러다 정말 늦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보다 조금 더 색이 진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자기 손이 보석함을 뭉개기라도 할 듯 조심스러웠다.
“이건요?”
“잘 어울려요. 당신이 가질래요?”
거의 즉답이었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겼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시더는 빙그레 웃은 채 답해 주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불안한 기분으로 럭스 부인과 시더를 번갈아 보다가, 슬쩍 내려놓았다.
“럭스 부인, 숙녀분이 고르신 것 같으니 목걸이를 걸어드려.”
“백작님께서 해드리면 어떨까요?”
럭스 부인의 수작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시더는 구태여 거절하지 않으며 에스페란사에게로 결정권을 넘겼다.
“그럴까요?”
“어느 쪽이든 빨리 출발할 수 있는 쪽으로 해요.”
럭스 부인이 화색을 띠며 거의 던지듯 시더에게 목걸이를 넘겼다. 에스페란사는 뚱하니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러다 정말 늦겠어요.”
“이렇게 할까요? 늦으면 저 상자 통째로 당신 줄게요.”
“필요 없어요.”
피식 웃은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등 뒤로 가서 섰다. 이내 깊게 파인 드레스의 네크라인 위로 선명한 빛의 보석이 드리웠다. 목걸이를 걸어 주며 손끝이 흰 목덜미를 스쳤다. 에스페란사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작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시더가 천천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자, 다 됐어요.”
“정말 가문의 보석 같은 거 아니죠?”
“어머니의 개인 보석이지 가문의 것은 아니에요. 난 가문 걸 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그런 걸 좀 따지는 성격이고.”
시더는 유난스럽다는 듯이 에스페란사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어이가 없어서. 내가 아니라 당신이 알아서 신경 써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난 상관없어요.”
“……그것참, 고맙네요.”
에스페란사는 차가운 보석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테두리를 따라 살갗을 문질렀다. 이런 것도 선뜻 빌려주고. 별것 아니라고 하지만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손님’이었을 때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이걸 다정함이라고 부르면 다정이란 말에 실례하는 기분이었지만, 배려라고 부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유행을 타지는 않지만 그래도 옛날 장신구라. 좀 고칠래요?”
“당신 부모님 물건이라면서요?”
“보석은 원래 고쳐 쓰는 거예요.”
“아, 네에.”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사탕 몰래 집어 먹은 어린애처럼 모른 척을 하는데, 별수가 없었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아요.”
시더는 미소와 함께 팔을 내밀었다. 에스페란사가 반사적으로 팔을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걸음을 옮기며 뒤늦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 * *
증기 마차가 덜컹거리며 포장된 길을 따라 달렸다.
비스듬히 쓴 모자와 주름이 잔뜩 잡힌 드레스는 무도회에 가는 차림치고 소박했다. 명색이 자선을 명목으로 열리는 무도회이니만큼, 공작새처럼 화려함을 뽐내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은 숙녀의 따뜻한 마음과 신사의 빈곤층을 배려하는 성정이었고, 그것은 테롯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였다.
놀랍게도 시더는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아서는. 그리고 그런 그의 의외의 세심함은 상황별로 복잡하게 가려야 하는 사교계의 예의에 둔한 에스페란사에게 도움이 됐다.
“자선 파티는 처음이라고 했으니 한 가지만 충고할게요.”
“네, 뭐.”
에스페란사는 쿠션에 턱을 괴었다. 처음 증기 마차에 탔을 때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에이번데일 저택의 증기 마차에 쿠션이 두 개나 생겼다. 하나는 끌어안고 하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자선 파티에서 보육원 운영에 대해 자세히 묻지 말 것.”
“왜요?”
“그게 법칙이에요. 탤벗 부인의 상냥한 마음씨에 대해서만 칭찬하도록 해요.”
이게 연극도 아니고 할 말이 정해져 있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안 그래도 보육원 관련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빈민가 꼬마 때문에?”
“잭이에요.”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시더가 덧붙였다.
“그래요, 잭. 어쨌든 꼬마를 맡길 곳을 찾는 거라면 차라리 레이디 코델리아에게 물어봐요.”
에이번데일 영지도 후보에 들어갔었으나, 시더도 아이를 맡아 줄 만한 사람을 모른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찾아보면 보육원도 있겠지만 코델리아에 비해 매우 나태한 영주인 시더는 ‘있겠죠, 아마’ 하는 대답으로 에스페란사의 신뢰를 박살 낸 바 있었다.
“코델리아는 다다음 주에야 올라오잖아요. 개인적으로 그 파티에서 물어보면 안 돼요?”
“안 되죠. 우리의 우선적인 목표는 갈리스턴 공작이고, 그런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자선에 최선을 다하는 신사 숙녀들의 체면이 상하잖아요.”
고작 그런 얘기에 상할 체면이라면 애초부터 없는 게 아닌가?
“그럴 거면 자선을 왜 한담.”
투덜거리며 쿠션에 얼굴을 완전히 묻으려고 하자, 시더가 그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시더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모양이 된 에스페란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급하게 벌인 짓이라 시더도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맞다. 화장! 큰일 날 뻔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이런 실수로 대충 뭉개 버리기에는 무도회라는 말에 들떠서 꼬박 한 시간을 에스페란사의 얼굴에 이것저것 칠하던 애니의 정성이 너무 컸다.
시더는 손바닥에 묻은 입술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묘한 기분으로.
약간 끈적거리는 입술 화장이 제법 온전한 모양으로 남았다. 색깔이 묻어난 것뿐인데 감각까지 묻어난 것 같았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시더. 왜 그래요?”
시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술 자국이 그대로 남은 손을 주먹 쥐어 흔적을 감추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