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3
63화
대화가 끊어진 사이 마차는 흰 증기를 뿜으며 왕궁처럼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자선 무도회의 취지에 맞게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산 초대장을 오토마톤에게 보여 주자 문이 열렸다.
“자동문이네요?”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가 보죠.”
시더는 잠시 침묵했다가, 탤벗 씨는 쇼드니 공작의 동생이고 탤벗 부인은 이 나라 최고 거부였던 서틀리 부인의 외동딸이라 이 집안은 쇼드니 공작 본인보다도 부유한 가족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집안답게, 무도회장은 산뜻한 꾸밈을 하고 있었다. 더워지는 날씨에 맞게 가벼워진 옷차림과 그에 맞게 새로 산 장신구. 다섯 쌍의 남녀가 마주 보고 추는 사교댄스. 이 무도회에서 자선이라는 명목에 걸맞은 것은 문 앞의 테이블에 놓인 장부와 그 위에 적힌 금액뿐이었다.
“같은 자선이라도 급을 따지거든요. 탤벗 부인 정도 되는 인물의 파티라면 참가자들이 내는 기부금에 0이 하나 더 붙죠.”
시더는 삐걱거리는 오토마톤을 못마땅히 바라보며 펜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서명과 함께 금액을 휘갈겨 썼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의심했다.
‘미쳤나 봐.’
“나도 체면치레는 해야 하니까요.”
“……아, 체면치레요.”
요즘 유독 돈 쓰는 게 헤퍼진 것인지, 지금까진 에스페란사가 몰랐던 것인지. 백작님이 백작님 돈을 쓰시겠다는데 일일이 말리는 것도 의미 없는 짓이라 에스페란사는 살 떨리는 금액에서 시선을 뗐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따라가 먼저 주최자인 탤벗 부인에게 인사했다. 탤벗 부인은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메리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간 마벨우드에 있었다죠? 레이디 코델리아는 어떻던가요?”
“처음에는 시무룩했지만 지금은 잘 지내요.”
“다행이에요.”
눈물이 많은 성격인지, 호스티스 역할에 맞지 않게 눈이 금세 발개진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냈다.
“아, 미안해요. 내가 이래요. 남의 일에 과하게 몰입하죠. 자선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이들이 구걸하러 다니는 것이 딱해서…… 어른이 가난하면 나태한 탓이지만 아이가 가난한 것이 어디 자기 탓인가요.”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붙든 자신의 소매가 살짝 구겨지는 것을 발견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들이 밥을 굶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좋은 일을 하고 계시네요.”
“별것도 아닌걸요. 보육원에 식재료를 전하고, 보육원이 없는 지역의 자선 사업가들에게 보육원 설립 자금을 지원하고, 이렇게 파티를 열어서 기부를 부탁하는 게 다예요.”
그러나 그 후에도 부인은 한참 동안 자선 사업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이들이 얼마나 딱한지, 보육원에서 거둔 아이들이 나이가 차서 나갈 때 보내 주는 편지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어머, 어머니. 손님들을 이만 놔 주세요. 로드 에이번데일, 미스 헌터. 얼른 들어가 보셔요.”
말이 길어지려는 찰나, 때마침 달려온 메리 탤벗이 부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자리를 벗어났다.
두 사람이 그다음으로 찾은 이는 레이디 퍼스였다. 인사를 건네자 노부인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란히 오면 얼마나 보기 좋으냔 말이야. 안 그런가, 에이번데일?”
놀림감이 된 시더가 한 소리 할 줄 알았건만, 그는 오히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기만 했다. 마치 그 몇 주 사이에 철이라도 든 것처럼. 부채 위로 보이는 눈가에 주름이 접혔다. 요놈 봐라.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뻔하지만, 그냥 말하지 마시죠.”
“흥,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레이디 퍼스, 무슨 생각을 하든 제게 도움이 되는 분은 아니시지요.”
“미스 헌터, 정말 저런 녀석과…….”
레이디 퍼스는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가서 춤이나 추든지 하게. 에이번데일, 숙녀의 댄스카드를 비워 두진 않겠지?”
오늘의 목적을 잘 알고 있는 에스페란사는, 처음부터 춤을 출 생각이 없었다. 한 곡 정도야 체면치레로 나쁠 것 없지만, 지금? 굳이?
“레이디 퍼스가 우리가 춤추는 걸 확인할까요?”
노부인이 멀어져 가는 걸 확인한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속삭이자, 시더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선의의 거짓말과 손해만 가득할 진실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답했다.
“아마도요.”
“우리가 춤을 안 추고 도망간 걸 아시면 곤란해질까요?”
“직접 경험해 볼래요?”
슬쩍 레이디 퍼스를 보니, 그새 제법 나이가 든 신사 하나를 붙잡고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쥐 잡듯 잡고 있었다. 슬하의 자녀가 열 살은 됐을 법한 나이의 신사는 그야말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예, 예, 고개만 숙였다.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귀부인은 진작 도망간 지 오래였다.
저기 걸리면 오늘의 목표는 물 건너가겠군.
에스페란사가 사뭇 비장하게 댄스 플로어를 응시하는 동안,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왜요?”
그러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팔목에 묶인 댄스카드를 끌러 냈다. 그러고는 에스페란사가 뭐라 하기도 전에 마지막 곡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죠?”
마지막 곡? 하필?
“왜 먼저 추지 않고요? 곧 다음 곡이 시작될 텐데.”
“그런 식으로 해치우는 건 재미없으니까요.”
에스페란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더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의 태도에서는 별다른 틈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냥 군무가 싫은 거죠?”
“그런 것도 있고. 자, 에스페란사. 꼬마 친구들이 왔네요.”
무슨 소리인가 하며 시더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에스페란사는 실비아 험프리를 비롯하여, 험프리 무도회와 몇 번의 티 파티에서 친분을 쌓은 소녀들을 발견했다.
“미스 헌터, 오랜만이에요! 로드 에이번데일. 그 말씀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꼬마 친구들?”
“아, 어엿한 숙녀분들.”
시더는 이제 됐으니 가 버리라는 듯 매정한 미소를 띠었다.
코델리아의 안부를 물으러 온 실비아 험프리와 그 친구들이 에스페란사를 시더에게서 손쉽게 분리해 냈다.
시더는 어, 어, 하는 사이에 끌려간 에스페란사를 보고 픽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거대한 괴물을 능수능란하게 상대하는 에스페란사가 숙녀 셋의 손길에 쩔쩔매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제 저 픽시 같은 숙녀들이 에스페란사를 붙잡아 놓는 동안, 그는 구태여 친애하는 숙녀분을 대동한 채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사들을 해결해야 했다.
조금만 덜 친애했어도 신경 안 썼을 텐데. 에스페란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더가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더의 의도대로 에스페란사는 ‘픽시 같은 숙녀분들’에게 꽉 붙잡혀 있었다. 정말로 양팔이 꽉 붙들린 상태였다.
“코델리아는 어때요? 마벨우드로 돌아갈 때 아주 안 좋아 보였는데.”
“확언하긴 어렵지만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조만간 돌아올 거고요.”
“어머, 정말이에요? 하지만 분명 소문이…….”
소문씩이나 났으니 코델리아의 친구들이 걱정돼 어쩔 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마벨우드의 레이디 코델리아가 전 약혼자의 상경 소식에 꽁무니를 뺐다고 했을까?
아무튼 남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남의 불행 소식을 얼마나 즐겁게 물어뜯었을지 알 만하다. 마벨우드에 있는 내내 그 사실을 곱씹었을 코델리아를 생각하면, 그 유순하지만 성질 급한 아가씨가 얼마나 속으로 분을 삭였을지.
“내 일이 아니라 함부로 말해 주기가 좀 그래요.”
“그래도 괜찮은 거죠?”
그 부분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벨우드의 던전 사태는 영지 자체에는 결코 행운이 아니었을지라도, 코델리아에게는 호재로 다가왔다.
사건 이후 부쩍 사이가 좋아진 알라스테어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알라스테어가 던바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코델리아는 나인 호더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들 무슨 얘기 해요? 에스페란사. 언제 돌아왔어요? 나만 몰랐나?”
쾌활한 루신다 맥스웰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서 와. 우리도 방금 만났어. 그런데 너, 머리에 그거!”
모두의 시선이 루신다의 머리칼로 향했다. 루신다가 보란 듯이 무릎을 굽혀 주었다. 작은 모자처럼 생긴 것이 독특하고 귀여웠다.
“세상에, 어떻게 구한 거야! 우린 캐시가 세 시간 동안 모자 가게에 줄을 섰는데도 못 구했는데!”
“운이 좋았지, 뭐.”
“어때,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아직은 모르겠어.”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루신다 맥스웰의 머리 장식에 꽂혔다. 눈이 가늘어졌다.
“루신다, 잠깐 만져 봐도 될까요? 벗기진 않을게요.”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에스페란사는 모르겠군요? 얼마 전에 생긴 모자 가게에서 파는 장식이에요. 독특하기도 한데, 이걸 쓰면 밤새도록 파티장을 돌아다녀도 술 취해 얼굴이 빨개지거나 피곤해서 시커메지는 일이 없대요. 그 가게의 모자도 그렇고요.”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진 모르겠지만요.”
“확인해 보려면 루신다에게 술을 먹여 보는 수밖에!”
에스페란사는 어린 숙녀들이 깔깔거리며 루신다에게 먹일 술을 찾으러 가는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손바닥으로 내렸다.
“장비인가?”
에스페란사는 7년 차 헌터의 감으로 거의 확신했다. 저건 몬스터 깃털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방문했던 마법 용품 상점에도 몬스터 가죽이 유통되고 있었지. 그때는 우연이라는 듯이 끼어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효과를 자랑하는 상품이라며 여기저기에 팔리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몬스터의 존재를, 혹은 몬스터의 부산물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인 관념을 물밑으로 깔아 두려는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파티장에서도 벌써 열 명이 넘는 귀부인이 같은 장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들불처럼 번지는 유행이라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자리 잡는 것이 가능한가?
에스페란사가 마벨우드에 머물렀던 것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이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에스페란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더를 찾았다. 시더는 어떤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나, 에스페란사가 그를 발견하고 파티장을 가로질렀을 때쯤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 대화를 끝마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하던 얘기 마칠 때까지 기다릴게요.”
“얘기 다 끝났어요. 할 말은 그게 끝이지? 그럼 잘 가게.”
그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있었던 듯한 신사는 품위 없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시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