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4
64화
“그래도 돼요?”
“뭐 어때요. 그보다, 갈리스턴 공작이 도착한 모양인데.”
어느 쪽인지 가리키지도 않았는데, 에스페란사의 시선도 사람들이 쏠린 쪽으로 돌아갔다.
“안 보이네요.”
“들어 올려 줄까요?”
“하기만 해 봐요. 당신은 보여요?”
“보여요.”
둘 중 하나만 봤으면 됐지, 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관심이 식었다.
“그보다 내가 아까 뭘 봤는지 알아요? 우리가 없던 짧은 사이에 새로운 유행이 생긴 모양인데, 그게…….”
모자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에스페란사의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시더가 신기하다는 듯이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자, 머쓱하게 대꾸했다.
“누가 독순술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과한 걱정인 것 같은데요.”
“지금도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정말 그랬다. 하지만 그들을 쳐다보는 눈길은 아니었다. 무리 지어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만 소곤대기 여념 없는 것이 눈에 띌 일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시선이 모일 일은 아니었다.
그 시선이 향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제야 어느덧 지척에 다가온 인기척을 느낀 에스페란사가 뒤를 돌아봤다.
약간 치켜든 턱과 내리뜬 눈동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듯 오만했다. 새까만 머리칼, 정장, 장갑, 구두. 검고 광택 나는 것으로 휘감은 차림에서 흰 얼굴이 도드라졌다.
“에이번데일.”
낮은 목소리가 호명하는 소리에 시더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남자가 내민 손을 붙들었다.
“갈리스턴 공작 전하.”
갈리스턴 공작, 에드먼드가 딱딱한 얼굴로 손을 두어 번 흔들고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그는 그다음으로 에스페란사의 장갑 위에 입을 맞추었다. 에스페란사는 기민하게 무릎을 굽혔다.
“오랜만에 보는군. 사교에 취미가 없는 줄로 아는데. 숙녀분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참석했나?”
“자선 행사이니 참석자가 많을수록 좋지요. 전하께서도 그런 마음이신 줄 압니다만.”
“자선 행사는 가리지 않네.”
그 말은 다른 행사는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유명한 탤벗 부인의 자선 무도회에만 참석한 그들을 꾸짖는 듯도 했다.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갈리스턴 공작이 왜 그들에게 먼저 접근했을까? 이제는 호기심을 숨기지도 않을 셈인가? 그들을 감시한 목적은 호의일까, 적의일까? 암살자를 보냈다지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에이번데일. 내게 숙녀분을 소개해 주지 않을 건가?”
시더는 마지 못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 피후견인인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입니다.”
“반갑네.”
에스페란사는 집요한 눈길을 피해 시더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뭘 원하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끌려가는 수밖엔 없었다.
“살라망카 출신인가?”
“어머니께서 살라망카 출신이시고 전 파오룬에서 자랐습니다.”
“고생했겠군.”
별 의미 없는 호구 조사가 지나가고, 공작은 에스페란사가 양친을 잃었으며 후견인인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나인 호더로 왔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설정을 아직까지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식은땀이 흘렀다. 점차 표정이 어두워지는 에스페란사를 곁눈으로 내려다본 시더가 웃으며 대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전하를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그럼.”
얼른 자리를 뜨려는 순간, 갈리스턴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미스 헌터.”
“……네, 전하.”
불길하다.
“댄스카드는 비어 있나?”
아직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에스페란사의 댄스카드에는 마지막 곡에 적힌 시더의 이름밖에 없었다.
내키지 않는 손길로 댄스카드를 내밀자, 가죽 장갑으로 감싼 공작의 손이 바로 다음 곡에 그의 이름을 적었다.
에드먼드 새턴.
기나긴 작위와, 호칭과, 왕족 혈통을 증명하는 미들 네임을 전부 빼고, 왕족의 흔적이라고는 그 성밖에 남지 않은 이름. 기이하게도 에스페란사는 그 이름에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신호를 받은 것 같았다.
마침 곡이 끝났다. 시더는 굳은 눈으로 에스페란사의 어깨가 검은 장갑에 감싸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댄스 플로어에 선 두 사람은 모두 굳은 얼굴이었고, 그들 간에는 어떠한 감정적 교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니, 애초에 고작 춤이다. 원래 춤이란 건 사교가 목적인 행위인 만큼 여러 사람과 추는 것이다. 한 파트너와만 춤을 고집하는 것이 더 무례한 것. 춤은 키스가 아니란 말이다.
테이블에 놓인 술이 독했다. 파오란을 두고 왔는데, 괜한 짓을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댄스 플로어가 보이지 않는 자리로 향했다.
* * *
앞뒤로 군무를 두고 가운데 낀 네 번째 곡은 경쾌했다. 경쾌하다는 것은 대개 빠르다는 것이고 곡이 빠르면 춤도 빨라진다. 그러나 이 무뚝뚝한 리드에 따라 몸을 빨리 움직여 봤자 경쾌함 같은 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에스페란사의 몸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로는 대체 왜 이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 고민하느라 춤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찰나,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쥐고 있던 에드먼드의 무심한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발을 뻗던 에스페란사의 몸이 휘청거렸다. 박자에 맞춰 돌고 있던 옆의 커플과 부딪히려던 순간, 에스페란사는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실례했네.”
긴 드레스 자락을 밟을 뻔한 에스페란사는 에드먼드를 노려보려다 황급히 눈을 돌렸다. 관찰하듯 가늘어진 시선이 금방 제 박자를 찾아간 에스페란사의 무도화 끝에 머물렀다.
‘방금, 일부러 밀었어!’
에스페란사가 몸의 중심을 잡는 데 능숙한 헌터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넘어졌을 것이다. 댄스 플로어의 신사 숙녀들이 도미노처럼 넘어지고, 음악은 멈추고, 파티는 난장판이 되겠지.
그러나 그 난장판을 생각하는 중에도 경쾌한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고, 에드먼드는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리더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스페란사는 혹시나 공작이 다시 밀어 넘어뜨리는 것은 아닐까 경계해야 했다.
“미스 헌터.”
어지럽도록 빙글빙글 도는 부분이 끝나고, 서로 마주 보는 자세로 바뀌자 에드먼드가 입을 열었다.
“자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뜬금없는 물음이다. 게다가 방금 사람을 밀쳐 놓고. 의도가 뭘까? 의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할 남자가 아니다. 적어도 13년 후의 갈리스턴 공작은 그랬다.
아니, 에스페란사가 그를 처음 본 것은 게임 시점으로 지금으로부터 8년 후. 8년은 사람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긴 시간이지만 에드먼드에게는 그럴 법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 아마도.
아차 한 사이 대답을 할 시기를 놓쳐 버렸다. 마침 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마치 잠깐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좋은 일이지 않을까요?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 주는 것이니까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듯, 에드먼드는 잠시 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플로어를 한 바퀴 돈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탤벗 부인은 보육원에 후원할 기금을 모으기 위해 무도회를 열었네.”
바로 이 무도회였다. 티켓을 비싼 값에 팔고, 파티에 참가하는 명사들에게 기부금을 받는다. 이 외에도 기부된 물건을 경매에 부치거나 소소한 생활용품을 팔아서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선 사업은 작위 없는 숙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업이었다. 그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중 탤벗 부인의 것이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적이었다.
부인은 본인의 유명세와 부를 사업에 톡톡히 이용했다. 자선이 아니라 다른 사업을 했어도 대성했을 인물이었다.
“탤벗 부인은 이 무도회를 위해 홀의 문을 바꾸고 새 오토마톤을 다섯 대나 구입했네. 무도회를 열지 않고 그 돈을 기부했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부인은 그 수고를 들여 기부금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지.”
“그게 뭔가요?”
“평판.”
옷자락이 스쳤다. 동작이 변하면서 대화가 뚝뚝 끊겼다. 팔만 붙든 채 멀어졌던 몸이 다시 마주 보자, 에드먼드가 물었다.
“자선 사업가의 8할은 사기꾼이고, 나머지는 자선으로 평판을 사지. 미스 헌터, 자선이 정말로 좋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선을 해야 하는가?”
에스페란사는 이마를 찡그렸다.
탤벗 부인은 자기의 사업에 진심으로 애정이 있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오늘 진심으로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들이 내일 좀 더 좋은 빵을 먹을 수 있게 차고 있던 장신구 한 짝을 내놓을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동정심 많은 사람들 중 그 불쌍한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자신들의 특권과 상속된 부를 포기해야 한다고 할 사람은 없다. 딱 그 정도의 정의감.
노블레스 오블리주. 귀족의 의무. 귀족이라는 특권층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성의 표시이자 책임에 대한 세련된 회피.
‘나라고 다를 건 없지.’
에스페란사는 자신도 그런 사회의 환상만을 취하고, 그 혜택에 기생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를 바 없었다. ‘자선은 좋은 일인가?’ 하고 묻는 에드먼드 새턴도.
그래도, 그 위선은 어쨌든 누군가를 살린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한참의 침묵 후, 마지못한 대답이 떨어졌다. 요점에 닿지 못한 채 빙빙 맴도는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미스 헌터. 만약 그대에게 ‘자선’의 기회가 있다면, 하겠는가?”
빙글빙글 돌던 열 쌍의 남녀가 멈춰 서서 서로를 향해 인사했다. 에스페란사도 에드먼드의 앞에 서서 무릎을 굽혔다. 천천히 굽은 무릎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갈리스턴 공작이 대체 뭘 원하는 것일지 고민했다. 그러나 여전히 잡히는 게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말끝을 흐렸다. 음악이 끝나가고 있었다. 손을 놓고 떨어지려던 찰나, 에스페란사가 흐리던 말끝을 올리며 물었다.
“얼터 지구의 정보상은 전하의 자선 사업을 돕는 중인가요?”
에드먼드의 무미건조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변화가 보였다. 놀란 낯을 가리듯 그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 장갑에 감싸인 손이 에스페란사의 손목을 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마치 화면을 느리게 재생한 것처럼, 그러나 흠 없이 우아했다.
“그자의 이름은 루크 헤이븐리.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