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6
66화
그들이 해치워야 할 춤곡의 반주가 시작됐다. 마지막 곡이라 댄스 플로어가 꽉 찰 만큼 사람이 많았다.
호스티스인 탤벗 부인 대신 메리 탤벗이 줄의 맨 앞에 자리했고, 쇼드니 공작이 메리 탤벗의 손을 잡고 플로어에 나왔다. 메리에겐 삼촌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나이에 비해 노안이지만 13년 후에도 변함없이 저 얼굴 그대로일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며 에스페란사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현악기를 풍성하게 쓴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거 엄청 긴 곡 아니에요?”
“아. 그러네요.”
“……알고 있었죠? 진작 말하지.”
“춤추다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으면 말해요.”
시더가 장난을 걸자, 에스페란사는 뒤로 발을 물리며 눈을 흘겼다.
“왜요, 두고 도망가게요?”
“아니면 안아서 고이 저택으로 데려가는 법도 있고요.”
“으윽.”
“왜 그런 반응이죠? 상처받게.”
상처받는 척하긴. 에스페란사는 정말 상처라도 되는 듯 입매를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뭇 경쾌하게 발을 찍다가, 리드에 따라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도입부의 테마를 변형한 단조의 느린 선율이 흘러나왔다. 검은 구두코가 흰 공단 무도화 앞코에서 손가락 하나 정도 거리를 둔 채 움직였다.
신발에 눈이 있었다면 서로 코가 닿을까 봐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리드에 능숙한 신사는 결코 무도화에 스치는 법 없이 그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등을 받치듯 펼친 손도 거슬리는 부분 없이 편안했다.
에이번데일 백작이 나인 호더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신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러 명의 신사들과 춤을 춰 본 결과, 그의 팔 안에서 춤출 때가 가장 편안했다.
그리고 공작이 제일 이상했다.
에스페란사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을 조금 틀었다. 옆에서 춤을 추던 남녀와 닿으려던 순간 시더가 팔을 들어 어깨를 감쌌다.
“조심.”
“고마워요.”
“괜찮은 것 맞아요? 이런 실수를 하고.”
에스페란사는 입꼬리를 당겨서, 마치 시더가 웃듯이 웃었다.
“일부러 그랬군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공작은 에스페란사를 일부러 밀었다. 그의 리드는 무심하기는 해도 파트너를 휘청이게 할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자선 이야기를 꺼낸 이후에는 무심하다는 감상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초반의 서툰 리드까지도 전부, 전부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뭘 알고 싶어서 그랬을까.
‘내 신체 능력인가? 반사 신경?’
그 암살자들이 던전 안에 있었다면 에스페란사가 몬스터를 도륙하는 장면을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교댄스에서 확인한 반사 신경이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다고.
“확인이 끝났으면 이제 춤에 집중해 줄 건가요?”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듯 닿았다. 에스페란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검은 구두가 가지런히 모인 두 발 사이로 들어왔다. 구두코가 발 안쪽을 지그시 누르며 벌렸다. 에스페란사가 흠칫한 사이 스텝이 바뀌며, 다시 손가락 하나 거리로 멀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다.
“방금…….”
“왜요?”
“방금 그거 뭐예요?”
“글쎄요?”
시더는 모른 척 에스페란사의 손과 겹친 손을 높게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멀뚱히 몸을 돌린 에스페란사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시더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그래 봤자 몇 겹의 천에 손톱 끝이 뭉개질 테 아플 리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가볍게 투덜거렸다.
“방금 내 안에서 당신 순위가 2등으로 떨어졌어요.”
“무슨 순위인데요? 원래는 1등이었나 보죠?”
뜻밖에도 시더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관심을 가졌다.
“춤출 때 제일 편한 사람이요. 방금 그걸로 떨어졌어요. 분발해요.”
“원래 2등은 누구였는데요?”
‘지금 1등’ 대신 ‘원래 2등’으로 물어보는 부분에서 묘한 승부욕이 묻어났다. 에스페란사는 잠깐 고민했다. 사실 2등은 생각해 두질 않았다. 몇 안 되는 옛 댄스파트너들을 되새겨 본 에스페란사는 곧 원래 있었을 2등을 골라 냈다.
“음. 아마도, 옛날 헌터 동료일 것 같은데. 춤은 한 번밖에 안 춰 봤지만…….”
사교댄스 자체가 처음이었던 에스페란사에 비해 능숙해서 별걸 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감점된 점수를 포함하더라도 시더보다 나은 것 같지는 않은데.
“흐음. 그렇단 말이죠.”
“참고로 꼴찌는 갈리스턴 공작이에요.”
“그 정도예요? 공작이 춤을 못 춘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왕족인 공작이 춤을 못 췄으면 진작 사방팔방에 소문이 났을 텐데.
“못 추는 게 아니에요. 일부러 밀던데요, 뭘.”
“그걸 그냥 뒀어요?”
“그럼 어떡해요. 나도 같이 밀어요?”
당연히 미쳤냔 소리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시더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한 에스페란사보다도 더 불쾌해 보였다.
“아니면…… 내 생각엔 조만간 우리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길 것 같은데.”
복수할 기회?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의문을 무시하며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발이 붕 떠올랐다. 시더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그대로 에스페란사를 가볍게 내려놓았다. 음악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예요?”
“우리니까 우리죠.”
별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하지만 에스페란사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시끄러운 음악에 파묻힌 데다 거의 서로에게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이는 대화를 누가 듣지는 못했겠지만, 공개적인 곳에서 더 깊이 파고들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비밀 얘기를 할 시간이 넘치도록 많으니까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 춤이 끝나고, 그들은 다시 한 번 탤벗 부인과 인사했다. 에스페란사는 탤벗 부인이 새로 샀다는 오토마톤 다섯 종 중 남은 세 개를 볼 수 있었다.
자선, 평판…….
탤벗 부인의 빨개진 눈은 처음 봤을 때보다 인위적으로 보였다.
루신다 맥스웰은 코델리아가 돌아오거든 같이 모이자고 인사하며 어머니인 맥스웰 부인의 손에 이끌려 돌아갔다. 메리 탤벗이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레이디 퍼스는 심술궂은 얼굴로 ‘하나를 시키면 하나만 하는 녀석 같으니라고’ 하고 투덜거렸다.
에드먼드 새턴은 언제 돌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마지막 춤을 출 때 그가 있었던가? 메리가 쇼드니 공작과 춤을 춘 것을 보면 그전에 돌아간 것 같기도 하다.
“에스페란사. 그 모자 가게가 어디라고 했죠?”
“무슨 모자 가게요?”
마차에 올라타며 시더가 물었다. 뜬금없이 튀는 대화를 따라잡지 못한 에스페란사가 눈만 깜박였다.
“아뇨, 됐어요.”
그는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 모자 가게는 갑자기 왜 물어보는지, 대체 복수의 기회는 무엇인지. 의문만 가득한 채 파티가 끝났다.
* * *
얼터 지구는 미궁처럼 복잡하게 얽힌 길로 이루어져 있어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길 잃은 양을 한입에 먹어 치우려 입을 벌리고 있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빠른 걸음으로,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거리를 주파했다. 곁눈질로 틈틈이 맵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닌 길이 많지 않은 탓에 한때 장의사가 살았던, 지금은 정보상이 살고 있는 거처로 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크 헤이븐리.
암살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스러운 이름이다. 웃기지도 않지.
에스페란사는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낡은 문이 끝까지 젖히며 벽에 부딪혀 푸르르 떨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님. 들어오십시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초연한 목소리가 에스페란사를 반겼다.
일말의 존중도 해 줄 필요가 없다. 이건 직업 윤리도 없는 놈이니까. 고객의 비밀을 지키지 않는 놈을 정보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이놈은 암살자일 뿐이다. 암살자한테 존중은 무슨.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추가적으로 의뢰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낡은 소파에 앉아 과자를 깨작거리던 잭이 작은 손을 흔들었다. 에스페란사는 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오늘 내내요.”
알 만하다. 공작에게 들은 게 있나 보지?
다시 정보상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차를 한 잔 더 준비하고 있을 뿐 동요가 없었다. 어린애를 방패로 데려온 주제에.
“잭, 빵집에서 기다릴래?”
지폐를 쥐여 주자, 잭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름대로 손익 계산을 할 줄 아는 꼬마는 가끔 오는 여자와 매일매일 만나는 정보상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돈은 네가 가지고, 방 밖으로 나가 있어.”
그 정도는 괜찮겠지. 잭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났다. 정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말하듯이.
꼴에 좋은 어른 행세라니.
“앉으세요.”
“루크 헤이븐리.”
이름을 불리자 창백한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빛이 변할 때마다 콧날을 중심으로 기묘한 대비를 보이는 양쪽의 얼굴.
“예.”
“암살 의뢰도 받나?”
“……저는 일개 정보상일 뿐입니다.”
“암살자 출신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 정보를 공작한테 팔아넘길 줄은 몰랐지만. 넌 신뢰가 없어. 신뢰도 없는 게 무슨 정보상이야?”
웃고는 있었지만 입맛이 지독했다. 처음부터 저놈과 거래를 트지 않았다면,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된 정보상을 찾았다면 모든 게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았겠는가?
공작은 에스페란사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테고, 마벨우드의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까지는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시더의 가설에 따르면 그렇다.
던전도 없고,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느닷없이 다치는 일도 없고. 어쩌면 트롤 가죽을 팔아넘겼던 사냥꾼을 일찌감치 찾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다 이놈 잘못인 것이다. 애초부터 잭을 이용해 에스페란사를 이리로 이끈 이놈 잘못.
“내 의뢰는 이거야. 갈리스턴 공작을 죽여.”
루크 헤이븐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사지와 호흡까지 철저히 통제하는 암살자라고 해도 눈꺼풀까지 어쩔 수는 없다.
“암살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손님.”
“어디 하나 부러뜨리는 건 괜찮고?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왜 그 꼴로 만들었어?”
아. 전부 알고 왔다.
정보상은 낮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 탄식이 에스페란사에게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어디까지나 시더가 응접실에 앉아서 늘어놓은 추측에 불과했지만, 하나하나 맞아떨어졌다. 만족스러우면서도 떨떠름했다. 어떻게 다 맞췄지.
정보상은 고장 난 축음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의뢰는 받을 수 없습니다. 정보와 관련된 의뢰를 가져오시면 받겠습니다.”
“널 뭘 믿고?”
루크 헤이븐리가 입을 굳게 닫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무슨 의뢰를 하든 공작에게 쪼르르 일러바칠 테니까.
“공작한테 잘릴까 봐 무서워? 지금 네 목이 잘릴 것 같진 않고?”
이럴 줄 알았지.
창백한 손이 낡은 소매 안쪽에서 움찔거렸다. 그 순간 에스페란사가 허공에서 꺼낸 리볼버로 자기 등 뒤를 겨냥했다. 펑. 새파란 마력탄이 벽에 묻혀 있는 총구를 정확히 맞춰 터뜨렸다. 그러나 시선만은 시종일관 루크 헤이븐리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마력으로 달아오른 리볼버가 정보상의 이마를 짓눌렀다.
“내 의뢰, 받아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