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7
67화
벽에 묻어 놓은 총도 들켰다. 공작의 수족인 것도, 암살자 출신인 것도. 이제 더 얻을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는 이 숙녀가 그를 죽여도 방법이 없다.
루크 헤이븐리는 눈을 감았다. 죽어 가는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입을 다물겠다?’
의뢰를 받아 주지 않을 건 알고 있었다. 이런 놈에게도 의리가 있다면 말이지. 중요한 건, 오늘의 일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다. 공작은 이쪽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분명 정보상은 공작의 명에 따라 정보를 통제했겠지. 필요한 정보만 주면서 에스페란사의 시야를 좁히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만약 마벨우드의 던전 발생이 정말 공작과 연관이 있다면…… 결국 공작의 손에서 놀아난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만만했을까? 에스페란사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13년 후 같았으면 턱도 없을 일이다. 대단한 유명인사든, 심지어 왕족이라 해도 목숨은 하나니까. 헌터 에스페란사의 이름으로 할 수 있던 수많은 것들이 이곳에서는 몇 번의 다리를 거쳐도 불가능할 때가 많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헌터가 없는 시대. 에스페란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이름값만으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가진 것이 힘뿐이니, 힘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어디 공작에게 가서 일러바쳐 봐.”
문을 거칠게 닫고 나왔다. 잭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씹던 과자를 꿀꺽 삼켰다. 안에서 난 총성을 의식하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저기, 안에서…….”
“안 죽였어. 들어가 봐도 돼. 다음에 보자.”
잭이 들어가면 정보상은 생각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잭의 머리칼을 다시 흩뜨렸다. 잭은 만지지 말라고 투덜거렸지만, 에스페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잭이 슬금슬금 문을 열었다. 정보상과 에스페란사가 틀어지면 가장 난감한 것은 바로 잭이었다. 다 큰 어른들이, 싸우지 말지.
사소한 부분에서는 그간의 정도 있으니만큼 정보상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문제가 커지면 에스페란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숙녀는 마법사니까. 정보상의 목을 바로 따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얼터 지구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어린 잭은 본능적으로 누가 더 강한지 알았다.
보아하니 오늘은 그 직전까지 간 모양이다. 벽면에는 총구가 터진 장총. 뜨끈한 자국이 그대로 남은 이마를 만지며 생각에 빠진 선생. 그래도 그 자국 외에는 다친 곳이 없는 것 같다.
잭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정보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총이 터졌으니, 너무나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설리번을 찾으러 가야겠다.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찾으러 가는 것도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피곤했다.
세상은 괴짜 마도 공학자 하면 에이번데일 백작을 떠올린다. 그러나 루크 헤이븐리는 설리번에 비하면 백작은 대단히 점잖은 신사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 헌터는 의도치 않게 그에게 최고의 복수를 한 셈이다.
* * *
그게 나흘 전의 일이었다. 오늘은 다시 얼터 지구로 가야 한다. 잭과 약속한 날짜였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별거 아냐.”
“멍하니 거울만 보시고. 저번 파티 이후로 내내 그러신 것 같아요.”
“파티랑은 상관없는데.”
아주 상관없진 않았다. 그때의 일 때문에 정보상을 뒤집어 놓았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애니가 생각하는 달콤 쌉싸름한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뿐이지.
“제가 머리 땋아드릴게요. 오늘 주방에서 버터 하나를 통째로 다 썼대요. 캐셔 부인이 작정했나 봐요.”
“진짜? 저번에 만든 그 장미 잼도 나오나?”
“아마도요? 아가씬 또 그걸 그 얼터 지구 꼬마애한테 가져다주려고 그러죠?”
“계속 신경 쓰여서. 그래서 내가 꽃 따는 거 도왔잖아.”
아무리 허락을 받았다지만 얹혀살고 있는 처지니 신경이 쓰여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럭스 부인은 숙녀가 하녀들이나 하는 일을 하면 어떡하냐고 야단을 쳤지만, 에스페란사가 혼자 사과 상자 세 개를 드는 걸 보더니 못 본 척해 주었다.
“에이. 아가씨가 장미 잼 좀 덜어간다고 뭐라 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그냥 빈민가 꼬마애한테 너무 정 주시지 말라고요.”
“아…….”
“아가씨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그런 애들이 커서 뭐가 되겠어요.”
태연하게 떨어지는 멸시의 말이 불편한 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두면 잭에게 남은 미래는 정말 그것뿐이다. 그러나 그 애를 책임져 줄 수는 없다. 그런 책임감도 없을뿐더러 그 애가 어른이 될 때까지 여기에 머무를 수도 없을 테니까.
“내려가자.”
에스페란사는 착잡한 기분으로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잭에게든, 이 세계에든.
시더의 선을 넘은 순간부터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응접실에 내려오자, 바구니를 채우고 있던 매들린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세상에, 매들린! 그게 다 뭐야?”
“아가씨가 가져가실 거예요. 캐셔 부인이 아가씨 자선하시라고 챙겨 주셨어요.”
자선이라니. 에스페란사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피크닉 바구니를 받아 들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걸 자선이라고 할 수 있나?
“고맙다고 전해드려. 그런데 시더는?”
“누구요?”
“……로드 에이번데일은 어디 계셔?”
애니가 꺅 소리를 질렀다. 에스페란사는 난감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았다.
“이름을! 이름을 부르시는군요!”
“쉿!”
“아. 알았어요.”
입을 양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젓는 모습이 썩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매들린이 혀를 차며 고기를 다져 넣은 샌드위치를 바구니에 넣었다.
“백작님께선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어딜 갔길래?”
어지간해서는 정오 이전에 일어나는 일이 없는 양반이, 어딜 그렇게 급하게 나갔담.
“수상 각하께서 호출하셨대요. 의회 출석률 최하위라고.”
애니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마벨우드에 다녀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닌가?
‘나 때문에 그런 건가.’
“백작님 출석률은 3년 연속 최하위였는데, 이제 와서…….”
아. 괜한 걱정이었다. 하기야, 에스페란사가 있든 없든 그는 본래 의회 일에 관심이 없었다. 자기 대에서 에이번데일 백작의 상원 의원직이 박탈당한다고 해도 오히려 쓸데없는 명예직 하나 덜었다고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름을 부르시는 건가요?”
“……그렇게 됐어. 아, 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백작님을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은 아가씨뿐이실걸요.”
애니는 그저 이 새로운 정보에 대한 흥미를 담아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에스페란사의 심장에는 돌덩이가 떨어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젊은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백작이 된 그에게, 그나마 친구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신사들은 그를 에이번데일이라고 불렀다. 죽은 대모의 자매라던 레이디 퍼스도 마찬가지. 가까운 상급 고용인들도 결국은 고용인이기 때문에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순 없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 주길 원하던 그를 밀어내고, 못 본 척했었다.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손톱이 치맛자락을 긁었다. 떨리는 손이 겨우 천을 그러쥐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언제 온다고?”
“아마 아침 일찍 나가셨으니 곧 오실, 어머, 오셨네요!”
창밖을 내다보며 말하던 애니가 에스페란사를 손짓해 불렀다. 증기 마차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시더는 내리자마자 지팡이 끝으로 증기 마차의 앞판을 두드리며 마부 테일러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마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테일러는 마차를 마저 몰아 차고로 가져갔다. 손에 뭐가 들려 있는 것 같은데. 각도 때문에 거기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창문 밖으로 목을 빼는 대신 응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주인을 맞이하러 나온 하워드 집사와 럭스 부인이 에스페란사를 보고 인사했다. 집사는 안경에 달린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골치가 아픈지 주름진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백작님. 그러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의회 출석률을 작년 수준으로 유지만 하셨어도……! 설마 수상 각하께서 백작님을 의회에서 제명하겠다고 하신 건 아니겠지요?”
“고작 출석률 따위로 제명당할 것 같았으면 날 부르기 전에 제명했겠지. 하워드, 쓸데없는 걱정 말게.”
“수상 각하는 한다면 하시는 분 아닙니까.”
“괜한 협박인 거지. 의원직이 없으면 내가 이민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하시니.”
“철저하신 거지요. 참, 그런 분이 없습니다. 한 30년은 더 해 주셔야 하는데.”
“그럴 거면 왕을 하지, 뭐 하러 수상을 해.”
“그런 불경한 말씀은 마시고요!”
에스페란사는 그들의 대화를 뒤로한 채 시더의 지팡이 끝에 시선을 두었다. 인사를 하러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시더의 얼굴을 보니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상념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다시 들어가는 것도 우습고…….
“에스페란사. 이왕 나왔으면 이쪽 좀 봐 줄래요?”
그리고 시더는 그런 걸 모른 척 봐줄 사람이 아니다. 에스페란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고용인들이 바쁜 척 흩어졌다. 어느덧 바짝 가까이 다가온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머리에 뭔가 푹 눌러 씌웠다.
“이게 뭐예요?”
“모자요.”
손으로 더듬어 보니 과연 여름 나들이 모자였다. 챙이 넓고, 위에 장식이 잔뜩 있었다.
“갑자기 웬 모자예요? 사 줬으니 고맙긴 한데…….”
손끝에 걸린 장식을 만지작거리던 에스페란사가 말을 흐렸다. 딱딱하고 둥근 구슬 같은 것. 거기까진 흔한 장식이지만, 지문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구슬 장식이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이런 특징을 가진 물질을 알고 있었다.
“……그 모자 가게에 다녀온 거예요?”
“유행이라잖아요? 남들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당신이 못 가질 이유가 없죠.”
“연구용이 아니고요?”
“그건 따로 있어요.”
정말 이 남자가 할 법한 행동이다. 에스페란사의 것만 사 왔으면 낯설 뻔했다.
“어쩌다가 모자 가게까지 갔어요?”
“의회로 가는 길에 가게가 있다기에 들른 것뿐이에요. 이른 시간이라 안 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열었더군요.”
“운이 좋았네요. 몇 시간씩 줄을 서도 못 구한다던데.”
잠깐만. 에스페란사는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몇 시간씩 줄을 서도 못 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구했지? 가게 문 여는 시간부터 지갑을 들고 기다리는 하녀들이 블록 끝까지 늘어서 있다던데.
“당신…….”
“하녀들 사이에 줄 서서 기다린 건 아니에요.”
“그러면요?”
“개장 전의 가게를 열게 하는 방법이 다 있죠.”
안 들어도 뭔지 알 것 같았다. 고작 모자 하나를 사기 위해 개장 시간도 되지 않은 가게를 웃돈을 주고 열었단 말이지.
시더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오만하고 자기 관심사 외의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귀족 신사였다. 그사이에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에스페란사를 선 안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선 안으로 뛰어든 건 에스페란사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다음 행동은 순전히 충동적인 것이었다.
시더의 몸이 에스페란사가 당기는 대로 움직였다. 프록코트 위를 수놓던 금빛 머리칼이 에스페란사에게로 쏟아졌다. 흰 어깨 위에 바깥바람을 쐰 뺨이 닿았다. 긴 속눈썹이 드러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뒷머리를 끌어당겨 어깨에 묻게 한 채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