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8
68화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던전 공략 직후에나 할 법한 짓이 멀쩡한 정신에 튀어나오다니.
슬그머니 시더의 머리를 감쌌던 손을 내려놓았다. 당황으로 빨라진 심장 소리가 온몸에서 쿵쾅거렸다. 시더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칭찬인가요?”
“시끄러워요.”
“아. 내가 잘못한 거예요? 느닷없이 끌어안은 건 당신인데?”
“……시끄럽다니까요.”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툭 밀어냈다. 그는 보란 듯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람. 충동이라고는 해도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 사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서 뭐.’
시더는 어쩔 줄 모르는 에스페란사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모자를 벗겨 에스페란사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다정한 손길이 삐져나온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에스페란사는 차마 시더를 마주 보지 못하고 모자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예쁜 모자였다. 화려하고 장식적이면서도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가벼운 장식과 귀부인이 쓸 법한 중후한 장식 사이의 균형을 잘 지켰다. 부드러운 공단 위의 몬스터 부산물은 보석처럼 그 자리에 잘 어울려서, 몰랐다면 에스페란사도 마법 장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직접 골랐어요?”
“직접 골랐죠. 이번에 맞춘 나들이 드레스와 어울릴 것 같네요. 그 하늘색 리본이 달린 것.”
그건 또 언제 다 기억하고 있었담. 그날 맞춘 여름용 드레스가 열 벌이나 됐고, 그중 외출용만 네 벌이었는데. 단지 머리가 좋은 것뿐이라고 해도.
“모자를 제대로 써 보려면, 어디 피크닉이라도 다녀와야겠네요.”
“그럴 시간이 있기나 해요? 수상한테 혼나러 다녀온 거 아니었어요?”
시더는 전혀 혼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날 혼내서 뭘 어쩌겠어요. 석사생을 받으라는 걸 특별 강의 세 번으로 마무리했어요.”
아, 이 사람 교수였지. 분명 날로 먹는 것 같지만. 수상이 어떻게든 시더를 효율적으로 부려먹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3년 전인데, 지금도 수상이 레이먼드 템프턴인가?
저 시더 클라이번한테서 뭐라도 뽑아 낼 수 있는 인물이라면 20년 동안 수상 직위를 유지할 수도 있는 거겠지. 중간에 5년 쉬었다고 했던 것 같지만.
NPC 알기를 우습게 아는 헌터들조차 레이먼드 템프턴에게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왕실 앞에서도 콧대 높은 헌터 협회가 협상에 응하는 것도 템프턴 수상이 전면에 나섰을 때뿐이었다.
그런 철혈 수상에게 불려가 혼이 나고도 눈도 깜짝 않는단 말이지. 무섭지도 않은가?
“상원 의원직은 유지하는 거예요?”
“아쉽게도요.”
아쉽긴 뭐가 아쉬워. 에스페란사는 키득거리며 시더를 따라 연구실로 올라갔다. 하녀들이 트레이를 가지고 나오는 중이었다. 에스페란사가 유독 좋아하는 녹색 티 세트에, 서재 안에 버터 향을 가득 채운 스콘, 예쁜 유리그릇에 덜어 놓은 장미 잼.
“이거 내가 만든 거 알아요?”
“그래요?”
“엄연히 말하면 내가 만든 건 아니고, 꽃잎 따는 걸 좀 도왔어요.”
“보통 그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진 않죠.”
“당신이 보통을 알아요?”
시더는 느릿느릿 턱을 괴며 받아쳤다.
“모르죠. 보통으로 살아본 적 없으니까.”
“아. 네에.”
“그래서 왜 갑자기 사용인들 일을 도운 거예요?”
“장미 잼을 좀 덜어 가려고요.”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잔에 먼저 차를 따랐다. 찻잔을 들자, 노을빛 같은 수색이 뺨에 비쳐 뺨이 붉게 보였다.
“당신 건 안 따라요?”
“……아.”
가만히 턱을 괴고 에스페란사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더가 뒤늦게 자기 몫의 찻잔에 차를 채웠다.
“장미 잼은 어디에 쓰려고요?”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나가 볼 건데, 잭한테 가져다주려고요. 그런데 저택 사람들이 만든 걸 내가 덜어 가면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일을 돕고 대가로 정당하게 가져가는 거예요.”
“에스페란사.”
찻잔 안의 무늬를 세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었다. 시더는 예의 속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고작 장미 잼 좀 가져가면서 대가 운운하는 것, 우습지 않아요?”
“……왜요?”
“이 집에 그런 걸 먹는 사람이라곤 나랑 당신뿐인데, 남는 걸 남에게 선물하는 게 뭐가 어때요?”
“아니, 얹혀사는 처지에서.”
“이제 와서 얹혀산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게 주인 행세를 했던가? 에스페란사가 혼란에 빠진 사이, 시더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 요즘 그 꼬마한테 관심이 많아졌네요.”
냉정하게 들리는 어조에 책망하듯 바라보자, 시더는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해명했다.
“원래 관심 없었잖아요.”
무심한 듯 가슴을 후벼 파는 한마디였다. 에스페란사는 삐걱삐걱 찻잔을 내려놓았다.
관심 없지 않았어요.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머릿속에 온갖 변명이 덩어리졌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푹 내쉬며 잔을 내려놓고 쿠션을 꽉 끌어안았다. 쿠션에 눌린 뺨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원래 조카 때문에 애들은 좀 신경 쓰기도 했고.”
신문팔이 잭을 떠올려 보았다. NPC와도 친하게 지낸 적이 없는 에스페란사가 그 애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건 비단 정보 때문만이 아니었다. 번거롭지만 정보는 사이러스가 소개해 준 정보상으로부터 얻어도 되니까.
빈민가에서 사는, 영리하고 야망 있는 꼬마.
“조카 얘긴 처음 들어요.”
처음 하는 거니까. 무의식적으로 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게임 바깥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생각조차도 거의 하지 않았다.
“언니랑 나이 차이가 좀 나요. 열 살 차이. 조카는 세 살인데……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귀여워했거든요.”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시더는 가만히 들어 주었다. 에스페란사는 몸통과 무릎 사이에 쿠션을 끼우고 두 팔로 무릎을 안은 채 웅얼거렸다. 상대가 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 반, 못 들은 척해 주길 바라는 마음 반.
“태어난 지 3년 된 게 말도 똑똑하게 잘 하고, 생긴 게 날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건 다 핑계고, 사실 언니가 임신했을 때부터 그 애를 귀여워하긴 했어요. 그래서 애들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어요. 어른보다 약하고, 보호해 줘야 하고. 모른 척하기가 어려워요.”
“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냥, 평범해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고, 성격은 좀 까다롭지만. 잔소리도 많고.”
쿠션 위로 피식 웃은 에스페란사가 뺨을 기울인 채 속삭였다.
“보고 싶다…….”
처음이었다. 입 밖에 낸 순간 감정은 실체가 되었다. 온기 없는 쿠션을 쥐어짜듯 끌어안은 채 숨을 다잡았다. 울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이가 찬 자매가 서로 바쁘면 몇 달 만나지 못하는 것 정도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영영 못 보는 건 아닐 테니까.
금방 괜찮아졌다. 따뜻한 차와 달콤한 버터 스콘과 널찍한 소파가 있었다. 무엇보다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으니 외롭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쿠션에 입술을 묻은 에스페란사가 아까보다 더 뭉개진 발음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 때문이기도 해요.”
“나 때문이요?”
“당신이…… 날 걱정했잖아요.”
공기가 멈추던 그 순간. 전투 직전의 긴장감, 기대감에 휩싸인 그 무엇이 선을 넘어오던 순간. 머리로 인식하던 현실감이 밀려 들어왔다. 고작 한마디 말로.
눈이 마주치자 에스페란사는 쑥스러워 뺨을 둥글게 밀어 올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때부터 나한테 여기가 진짜 같아졌나 봐요.”
성기게 땋은 머리채에서 남은 잔머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뺨을 간질였다. 바람에서 버터 향이 났다. 어느덧 무성해진 나뭇잎에 바람이 부딪히며 비 쏟아지는 소리를 냈다.
장미 잼은 혀가 아리도록 달았다. 에스페란사는 스콘 위에 장미 잼을 올려 입에 넣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달게 만들 거라곤 말 안 했잖아…….”
시더는 한발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페란사도 머쓱하게 웃었다. 분위기를 짓누르듯이.
“그 꼬마한테 가져다줘도 되겠어요?”
“이 상태로는 안 되겠어요. 이가 다 썩어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정 그 애가 신경 쓰이면 데리고 와요. 꼬마 하나인데, 이 집안에도 어디든 쓸 데가 있겠죠.”
시더는 여느 때보다 퍽 관대하게 말했지만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저었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애가 다 클 때까지 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애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확실히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정갈한 노크 소리가 말을 끊었다.
“백작님, 에스페란사 아가씨. 집사입니다.”
“들어오세요.”
하워드 집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성장을 하고, 흰 장갑을 낀 손 위에 은쟁반을 올린 채 나타났다. 정작 진짜 귀족인 그의 고용주는 베스트는커녕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매우 방만한 차림이었는데도.
“티타임을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편지를 확인하다가, 이 늙은이가 뭔가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봉투 외면에는 흘린 글씨로 에이번데일 저택의 주소와 함께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귀하’라고 적혀 있었다. 집사가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에스페란사 앞에 내밀었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에스페란사가 편지를 받아 들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고 편지를 뒤집자 붉은 밀랍 인장이 나타났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초로 밀랍을 녹인 뒤 인장을 찍은 것이었다. 실링 기계로 인장을 찍고 타자기로 글을 쓰는 이 시대의 기준으로도 백 년쯤 뒤처진 방식이었다.
“무슨 편지길래?”
“이 문장, 본 적이 있는데.”
하지만 귀족 이름도 못 외우는 에스페란사가 귀족의 문장을 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물레바퀴 가운데에 그려진 불새. 물레바퀴 위에 낫은 왕실의 문장인데, 불새?
에스페란사의 머리는 답을 내기를 포기했다. 왕실 문장이 아닌 건 확실한데. 다행히 이 자리에는 에스페란사 대신 답을 내줄 사람이 있었다. 헷갈리는 기색도 없이 명쾌했다.
“갈리스턴 공작이네요.”
“아.”
“말했잖아요. 복수할 기회가 생길 거라고.”
갈리스턴 공작의 초대장.
이건 누가 봐도 복수가 아니라 함정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