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69
69화
“그쪽에서 함정을 준비하든 말든, 우리는 우리의 복수를 해야죠.”
“그냥 내 복수인 거 같은데. 당신 복수 아니고…….”
“당신 복수가 내 복수 아닐까요?”
에스페란사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 왜지.
애초에 그렇게까지 복수할 일도 아니었다. 갈리스턴 공작에게는 호감이 없지만, 공작이 한 행동은 에스페란사에게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아무런 위협도 못 느꼈는데 복수를 해야 하나?
“일단 내용부터 읽어 봐요.”
아 그렇지. 아직까지도 밀랍 봉인은 그대로였다. 에스페란사는 인장을 뚝 뜯어 냈다. 갈리스턴 공작의 시종이 세심하게 초로 밀랍을 녹여 찍었을 인장이 너덜너덜해졌다. 뒤늦게 종이 아래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글자의 끝 획에 검은 잉크가 고인 것만 빼면 서명은 찍어 낸 듯 균형적으로 완벽했다. 본인의 글씨인지 알 수는 없어도 갈리스턴 공작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빳빳하고 부드러운 종이에 그의 이름과 같은 서체로 쓴 편지. 자간이 자로 잰 듯 반듯했다. 에스페란사는 눈으로 읽어 내렸다.
편지는 그래도 기록으로 남는다고 신경 썼는지 대면했을 때보다 훨씬 정중하다.
“이건…… 거절할 수는 없겠죠?”
“거절을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진 않네요.”
시간은 티타임에 맞고, 세 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잘 하면 저녁까지 먹고 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많다는 것은 공작이 그사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시간을 비워 볼게요.”
“네?”
“주말 두 시, 특별한 일은 없겠네요. 저번에 부품이 비에 젖은 기계들을 수리하려고 했는데 미리 해 두면 되겠어요.”
“네?”
에스페란사는 손가락으로 한 단어를 가리켰다.
“당신이 샤프롱은 아니잖아요.”
샤프롱이란 미혼의 숙녀와 동행하며 감독하는 여성을 뜻하며, 그 숙녀의 모친, 대모, 혹은 가까운 여자 친척이 맡는 역할이었다. ‘샤프롱과 동행해도 좋소’라는 에드먼드의 글은 달리 말하면 이렇게도 읽혔다.
‘후견인인 에이번데일 백작은 동행할 수 없다.’
“거절하진 않을 거예요. 애초에 이따위 초대를 해 놓고 고작 그 정도 양해도 해 주지 않는다면 속이 너무 빤히 보이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럼 그렇게 답장하도록 해요.”
“귀찮지 않겠어요?”
시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갔다. 눈높이에 있는 책 하나를 꺼내 펼친 그가 말했다.
“그보다는 당신이 더 걱정되네요.”
“공작이 무슨 함정을 파 놨든, 난 안 당해요.”
“그건 당신이 강하고 아니고의 문제는 아니죠.”
그러면? 에스페란사는 공작이 군대를 데려와도 일신으로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당신이 어설프게 착하다는 거예요.”
칭찬을 할 거면 제대로 하지, 어설프게 착하다니. 에스페란사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아닐걸요.”
시더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공작에게서 아무것도 모르고 기계나 만지고 있을 에이번데일 백작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걸 막기 위해서 작은 불편 정도는 감수하지 않겠어요?”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시더에게 말도 하지 않고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공작도 바보가 아니니 에스페란사가 시더와 상의하게 두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요?”
“함정이란 게 별 게 아니에요. 공작이 당신의 의지에 반해서 뭔가를 요구할 수 있게 되면 이미 함정에 빠진 거죠. 공작은 왕족치고는 드물게 정치적인 인물이고, 우린 그런 거에 좀 약하죠.”
“난 약한데 당신은…….”
“나도 약해요.”
거짓말하고 있네.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에요.”
“아, 네.”
그에게는 자기 단점을 시인하는데도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보이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시더는 책에 쌓인 먼지를 헝겊으로 털어 낸 뒤 에스페란사 앞에 놓았다.
“그러니까 우린 좀 대비를 해야겠어요.”
“그래서 이게 뭔데요?”
시더가 펼쳐 놓은 책장의 첫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보고 예절 공부 하라고요?”
헌터 생활 7년 내내 여왕 앞에서도 지적당한 적 없는 예의를? 이제 와서?
“사소한 부분에서 트집 잡히지 말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대비를 한다면서요. 당신은 뭐 할 건데요?”
“난 늘 그렇듯이 장비를 맡아야죠. 그거 읽어 보고 있어요.”
그는 그대로 연구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두꺼운 나무 문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참 나다가 끊겼다. 뭐지? 책을 성의 없이 뒤적거리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문을 연 시더의 뒤에서 바퀴 달린 기계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 안에 알 수 없는 부품들이 가득했다.
“뭐가 그렇게 많아요?”
“별로 많진 않아요. 일단 당신이 가진 물건들 좀 봐야겠어요. 쓸 만한 게 있는지.”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제외한 잡다한 마도구들을 꺼내 놓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쓰레기를 가지고 다니냐는 듯, 하나둘 건드려 보던 시더도 곧 빠져들듯 집중했다. 하나씩 들어보고 스티뮬러로 살펴보다가 아예 분해해 보려던 순간, 에스페란사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었다.
“당신,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두고 가라고요?”
“꼭 그런 뜻은 아니고.”
아니기는. 속내가 뻔했다. 하지만 벌써 날이 꽤 저물었다. 잭이 기다릴 시간이다.
“지금 몇 시예요?”
“여섯 시 반이요.”
“악!”
진짜 늦었잖아! 속내를 알고도 어울려 주고 어쩌고 할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실내용 드레스 위에 바로 로브를 걸쳤다.
“이거 다 분해해 봐도 돼요?”
“맘대로 해요!”
에스페란사는 거침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매들린에게서 피크닉 바구니를 받아서 뛰쳐나가는 속도가 바람처럼 빨랐다.
시더는 그 모습을 서재 위에서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고 에스페란사의 마도구 연구에 매진했다.
특별히 흥미가 가는 물품도 있었지만 호기심은 한편에 접어 두었다. 목표는 오직 갈리스턴 공작의 수작을 방지할 수 있을 만한 물품이다.
손안에서 공구가 능숙하게 굴러갔다. 옆에 꺼내 놓은 노트에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이니셜로만 적은 전문용어들과 숫자들이 난무했다.
* * *
주말까지 쭉 그랬다. 에스페란사는 그놈의 예절 책을 거의 꼭꼭 씹어 읽어야 했다. 왕족을 대하는 예의에서 꼬투리를 잡히면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지금은 헌터가 왕족 앞에서 콧대를 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갈리스턴 공작이 대놓고 숙녀의 예의범절을 지적하지는 못하겠지만, 동석한 셔버리 공작 부인은 할 수 있었다. 시더의 말을 들어보면 남 괴롭히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배울 것이 많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이전에 여왕을 만났을 때 속성으로 배웠던 것에서 적당히 덧붙였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니 적당히 티타임용 예절만 익히면 됐다.
갈리스턴 공작은 흔쾌히 에이번데일 백작의 동행을 허락했다. 두 사람 몫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코델리아에게선 드디어 다음 주에 만날 수 있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거기에 갈리스턴 공작의 초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보냈는데, 편지가 먼저 도착할지 코델리아가 먼저 출발할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에스페란사는 이 모든 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으나, 에스페란사만 빼면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말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자.”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귓바퀴에 귀걸이처럼 보이는 작은 기계를 달아 주었다. 반대쪽 귀에 단 것은 같은 모양이지만 아무런 기능이 없는 장식품이었다.
“대화를 전부 녹음해요. 하나도 빼지 말고. 일단은 통신 장비라 내 것과도 연결되어 있긴 한데, 파인먼트 하우스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통신 기능은 쓸 일이 없을 테고.”
귀걸이를 빼서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예쁜 장신구 같았다. 무슨 기능이 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티가 전혀 안 나네요.”
“당신이 가지고 있던 통신 장비를 응용해서 만든 거예요.”
에스페란사는 며칠 만에 마도구에서 잡동사니로 변해서 돌아온 물건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 고철에서 마도구의 원형을 떠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작은 우리를 떨어뜨려 놓으려 할 테니까, 대비를 해야죠. 이것만 있는 건 아니고, 기다려 봐요.”
시더는 서랍에서 까만 벨벳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상자를 열자, 반짝이는 보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명을 받은 보석이 눈이 시릴 정도라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반지?”
“그냥 반지가 아니에요.”
새빨간 보석은 손가락을 반 이상 가릴 정도로 알이 컸다. 그냥 반지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렇게 그냥 반지 같이 생겼는데, 여기에 무슨 기능이라도 있다는 건가? 이건 마정석도 아닌데.
“어떻게 쓰는 건데요?”
“봐요.”
내민 손 위로 에스페란사도 손을 포개 올렸다. 안정적으로 손바닥을 받치던 시더의 손은 그대로 손끝까지 미끄러져 내려가, 반지를 약지에 끼워 주었다.
에스페란사가 마력을 불어넣자, 시계 부품처럼 아주 작은 부품들이 미세한 소음과 함께 움직였다. 반지 안쪽이 약하게 달아올랐다. 짧은 화살표 모양.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더는 손안에서 회중시계를 들어 올렸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모습이 날것 그대로 보이는 모양의 시계였는데, 시계의 침이 네 개였다. 그중 하나는 에스페란사가 앉아 있는 방향을 향해 있었다.
시계 안쪽에 박힌 붉은 보석. 에스페란사가 멍하니 물었다.
“잠깐, 이거 설마 내 피예요?”
“설마요. 이렇게 많이 뽑은 적 없잖아요”
안심하려던 찰나, 시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피는 안쪽에 있어요. 피를 가리려고 루비를 고른 건 맞아요.”
“으…….”
자기 피가 든 반지를 끼고 있는 기분이란.
“되게, 당신 같은 인간이 된 기분이에요.”
“괜찮은 기분이겠네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해가 반짝 떠오른 주말 아침. 분주한 소리에 에스페란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바삐 뛰는 발소리가 이어지고 이내, 쿵쿵쿵.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에스페란사, 일어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