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0
70화
몇 달을 이 집에서 살았건만, 그들은 서로의 침실에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응접실, 식당, 서재, 연구실. 침실은 방문한 적도 없고, 방문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잠깐 들어갈게요.”
“어, 어…… 들어와요?”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19세기 숙녀도 아니었고, 옷도 멀쩡하게 입고 있으니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시더 쪽이었다. 멈칫했던 그는 에스페란사가 ‘뭐야, 안 들어오나?’ 하고 생각할 때쯤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잠이 덜 깨서 몽롱한 눈에 들어온 시더는 완전히 성장한 모양새였다. 정오가 넘어서나 일어나던 시더 클라이번이 아예 외출복 차림이라니.
“어디 나가요?”
“나인 호더 남부 해군 부대의 전함에 문제가 생겼어요. 어젯밤부터 매달려서 고친 모양인데 해결이 안 돼서 내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안에 돌아오기 힘들 것 같은데…… 당신 혼자 괜찮겠어요?”
몇 달간 한 번도 터진 적 없는 긴급 상황이 하필 오늘? 아무래도 우연일 것 같진 않았다. 공작은 애초부터 에스페란사를 시더와 함께 부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요. 다녀와요, 조심하고.”
“내 안전은 문제가 안 돼요. 공작 같은 인물은 절대 나를 죽일 수 없으니까. 문제는 당신이죠.”
“그래도. 내 총 가져갈래요?”
시더의 얼굴에 겨우 미소가 서렸다.
“됐어요. 당신이나 잘 지켜요.”
그 말과 함께 시더는 몇 가지 장비를 더 내밀었다. 시더와 상시 연결되어 있는 수신기와 작은 수면 침이 들어 있는 장신구.
“수면 침? 이런 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사람은 뒷 목을 때리면 기절하게 돼 있어요.”
기절부터 사망까지 조절도 가능하다. 이런 중세의 왕위 쟁탈전에서나 썼을 것 같은 물건은 필요 없었다.
“그건 당신 거예요.”
“……나요?”
“네. 상황이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서 곤란할 것 같거든, 그걸로 당신 몸을 찔러서 잠들어요.”
“당신 지금 헛소리해요.”
제정신에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갑자기 기절을 해 버린다고 해도 더 곤란해지면 곤란해지지, 덜할 리 없었다. 그러나 시더는 제법 멀쩡한 척을 하며 말했다.
“기절한 사람한테 협박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그래도 에스페란사는 그걸 챙겨 두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고, 누구누구가 아이템을 싹 빼간 후라 인벤토리도 넉넉하니까.
그렇게 한바탕 정리가 되자, 시더의 눈에도 드디어 이성이라는 것이 돌아온 것 같았다. 한발 늦게 부스스한 머리칼이나 한쪽 어깨를 거의 드러내다시피 한 옷차림을 발견한 시더가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자고 있는데 막 들어온 건 당신이거든요.”
“누가 뭐라 했나요?”
눈빛으로 뭐라 했으면서. 시더가 나가고 나면 다시 침대로 들어갈 생각이었던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였다.
“백작님! 얼른 가셔야 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아래에서 커다랗게 소리 질렀다. 아마 시더에게 상황을 전하러 온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어찌나 절박하게 부르는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같이 초조해졌다.
“가 봐요. 급하다잖아요.”
시더는 뒤돌아 나가려다가 다급히 덧붙였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하든, 당신 안위를 제일 먼저 생각해요. 날 미끼로 쓰더라도 응해 줄 필요 없어요. 내 안위 정도는 내가 챙길 수 있으니까.”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그럼 갈게요,’ 하고는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에스페란사는 침대에 풀썩 앉았다.
‘갈리스턴 공작이 그렇게까지 위험한 인물인가?’
13년 후의 갈리스턴 공작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았다. 하지만 13년 전의 갈리스턴도 그 정도로 위험한 인물인가?
물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을 던전에 집어넣을 정도의 손속을 지닌 인물이라면, 그가 자선단체에 얼마나 많이 기부를 했든 그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에스페란사를 위협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지.’
시더는 자기 안위는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에스페란사도 마찬가지다. 갈리스턴이 무슨 목적으로 에스페란사를 이용하려고 하든, 에스페란사는 자기 마음대로 이용당해 주거나, 당해 주지 않기를 결정할 수 있었고, 중간에 빠져나올 자신도 있었다.
제아무리 왕족이라도 뒷 목을 때리면 기절하고 목을 베면 죽게 돼 있다. 13년 후에도 갈리스턴 공작이 무술의 귀재라는 소문은 없었으니 지금도 그럭저럭한 수준일 것이다. 그런 일반인 하나 제압하는 것 정도야.
* * *
공작의 저택은 마치 성채 같았다. 사실 성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파인먼트 하우스.
300년 전부터 장성한 왕족들의 거주지로 쓰인 이곳은 현 여왕에게 독립한 자식이 없는 탓에 여왕의 가장 가까운 젊은 친척인 갈리스턴 공작이 쓰고 있었고, 7년 후 열일곱 살의 루이 왕자에게 주어진다.
현 여왕의 할아버지인 퍼디난드 5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차례로 선왕 길버트 3세, 갈리스턴 공작 프레드릭, 그리고 셔버리 공작 어니스트였다. 길버트 3세가 일찍 죽자 외동딸인 해리엇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게 벌써 7년 전의 일. 해리엇 2세의 슬하에는 10살의 루이 왕자와 7살의 멜리사 공주가 있었다.
에드먼드 새턴은 전 갈리스턴 공작 프레드릭의 후계자였다. 퍼디난드 5세의 첫 손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셔버리 공작 부인은 한때 막내 왕자님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셔버리 공작의 부인이자 오펜바흐 공국의 공주였다. 20년 전 셔버리 공작이 죽은 후 작위는 왕실로 환원됐지만 공작 부인은 죽을 때까지 그 호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정보를 에스페란사가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속성으로 외웠지.’
에스페란사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갈리스턴 공작이 여왕의 사촌이란 것 정도였다. 애초부터 왕실에 큰 관심도 없었고, 그나마 유저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루이 왕자와 멜리사 공주에 대한 것만 조금 얻어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전하의 시종인 헨리 베이먼입니다. 로드 에이번데일께서는?”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셨어요.”
“급한 일 말씀이십니까?”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공작의 초대도 거절하냐는 불쾌감이 얼핏 묻어났다.
“아셔야 하나요?”
“……아닙니다. 들어가시지요.”
저택 내부의 붉은 벽에 다양한 모양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어떤 것은 사진이었다.
“어머, 벌써 왔구나!”
티 파티보다는 무도회에 있어야 할 것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40대 초반의 귀부인이 복도 반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시 말해, 옷차림이 부적절했다. 헨리 베이먼의 반응을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셔버리 공작 부인 전하.”
공작 부인이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잡았다. 무릎을 굽혔다 펴는 인사를 하자 공작 부인은 까르르 웃었다. 호의 어린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왜 이런 반응인 거지?
에스페란사가 들은 셔버리 공작 부인이란 인물의 성격과도, 갈리스턴 공작의 태도와도 맞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공무가 있어서 좀 늦을 거란다. 그 사이 파인먼트 하우스를 좀 둘러보지 않을래? 여기까지 와서 구경도 못 하고 가다니 아쉽잖니.”
마치 오래 알던 친척 언니마냥 친근하게 팔짱을 낀 공작 부인은 에스페란사에게 눈을 찡긋했다.
“공작 전하께서 공무가 있으시다고요?”
헨리 베이먼을 노려보자, 그는 눈을 슬쩍 피했다. 자기 주인도 지각이면서 누가 누구한테 뭐라 그래.
“으으응. 해군 부대의 훈장 수여식인가 뭔가. 나는 잘 모르겠더라. 에드먼드가 좋아하는 공무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뭐.”
갈리스턴 공작 에드먼드는 애국심이 투철하고, 사관학교 출신에 공군 조종사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본인도 군 관련 공무에 열심이니 군인들이 좋아할 법했다.
하지만 그거야 남의 사정이고.
‘그럴 거면 아예 늦게 부르든가.’
결코 좋아서 온 게 아닌 에스페란사에게는 썩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해군 부대에 갔다고 하니, 시더가 아침 일찍 나가게 된 게 누구 탓인지도 한층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먼저 어디부터 갈까? 날이 따가우니 정원은 됐고, 대신 정원이 보이는 방으로 먼저 가자.”
공작 부인은 애초에 에스페란사의 의견에 관심도 없었는지 팔을 붙잡고 가까운 응접실로 이끌었다. 연한 하늘색 소파와 같은 톤의 카펫과 커튼으로 장식된 방이 화려했다.
“내가 처음 오스던에 왔을 때, 파인먼트 하우스에서 선왕 전하를 뵈었지. 그 방이 바로 여기였단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마차 바퀴는 진흙투성이에, 일찍부터 한 화장도 엉망이 됐지. 그런데 이렇게 예쁜 응접실에 들어가자니, 너무 민망하지 않겠니?”
벽난로 위의 선반을 바라보던 공작 부인이 그 위에 올려진 장식품을 들어 보여 주었다.
“훌쩍거리던 나를 클레어 님이 달래주셨지. 정말 그때와 달라진 게 없구나”
“그때 이후로 다녀가신 적이 없으신가 봐요.”
“웬걸.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 그때는 공작 부인으로 불리시던 클레어 왕비께서 자주 불러 주셨거든. 하지만 에드먼드가 여기 머물기 시작한 후로는 처음이야.”
공작 부인은 애틋한 얼굴로 벽난로와 창의 커튼을 바라보았다.
“커튼은 새 걸로 바꿨구나. 그래도 색은 안 바꿨어. 참 에드먼드다운 일이지. 아, 미스 헌터, 에드먼드와는 언제 처음 만났지?”
“탤벗 부인의 자선 파티에서요.”
“아, 아. 자선 파티. 난 자선 파티는 지루하더라.”
그래 보였다. 공작 부인은 누가 봐도 쾌락과 자극을 찾는 밤의 무도회를 즐길 것 같은 인물이었으니까.
“저 오른쪽 방으로 가자. 베이먼, 자넨 여기 남아 있게.”
“하지만, 전하.”
“내 명령은 에드먼드의 명령만 못하다는 건가?”
헨리 베이먼은 마지못해 자리를 지켰다. 공작 부인이 눈을 찡긋하며 에스페란사를 잡아끌었다.
“저 성가신 베이먼을 떼어 놓고 온 이유가 있지. 여긴 원래 건드리면 안 되는 곳이거든.”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벽 귀퉁이에서 반대편 귀퉁이까지 딱 맞게 만든 긴 유리관 안에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고 묵직한 보석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다이아몬드는 유독 화려했다.
“하, 테미스의 다이아몬드. 내가 이걸 얼마나 탐냈는데 이런 곳에서 썩히고 있다니.”
공작 부인이 탄식하며 유리관을 열어 목걸이를 꺼내며 문을 흘끔거렸다. 눈치를 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공작 부인은 자기 목걸이를 끌러 유리관 위에 대충 올려 둔 다음 그 목걸이를 꺼내 목 위에 대 보았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탄성을 터뜨리다가 다른 목걸이를 대보길 반복했다.
“너도 하나 해 보지 않을래?”
“저는 별로…….”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질문이었던 듯, 멀찍이 떨어져 선 에스페란사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공작 부인은 다시 목걸이 구경에 몰두했다. 애초에 이러려고 궁전 구경을 하자고 한 게 틀림없었다. 이제야 에스페란사가 들은 이야기 속의 공작 부인 같아졌다.
“공작 부인 전하, 공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머머!”
공작 부인은 들고 있던 목걸이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밖에 누구 없니? 이것 좀 치워!”
헨리 베이먼이 미리 불러 놓은 듯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문을 나가던 에스페란사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공작 부인의 시녀인 듯한 귀부인이 공작 부인의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목걸이는요, 전하?”
“저기 어디 있을 거야.”
귀부인은 에스페란사에게도 다가와서 목걸이를 착용해 봤냐고 물어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앞서 나간 공작 부인을 따라가던 에스페란사가 별안간 멈춰 섰다.
“왜 그러니?”
성마른 목소리가 에스페란사를 재촉했다.
“아뇨. 아니에요.”
공작 부인의 재촉에 따라 복도를 걸어나가 문가로 향한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막 외출에서 돌아온 공작이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에스페란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미스 헌터. 다시 보는군.”